지상낙원 유토피아로 초대합니다
경기의정부서5-* 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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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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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YES24 어린이 독후감 대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유토피아’ 라는 제목이 왠지 모르게 끌리는 제목이고, 얼추 아는 유토피아는 자유롭기 때문에 이 책도 자유로울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유토피아는 어떤 책 일까?
유토피아는 ‘인간이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 꿈꾸는 곳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성경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왔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젓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이 글은 이사야서 11장 6절~10절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글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아사야가 쓴 글이다. 아사야는 이런 곳을 유토피아라고 생각하고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토피아’하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고, 그 개념을 본격적으로 말했던 사람은 아마 500년 전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토마스 모어일 거다. 그는 그리스어 ‘Ou'와 ’topos' 를 조합하여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었는데, 원래 이단어는 no - where 즉, ‘이 세상에는 없는 곳’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단어는 ‘good-place' 즉(좋은곳)이라는 뜻을 가진 ’eu-topos'의 동음이의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실현 불가능한 세계’ 지만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이상을 담아 늘 꿈꾸는 ‘ 더 좋은 세계’라는 의미로 지은 것 이다.
유토피아라는 제목의 책은 1516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구상하고 쓴 곳은 플랑드르 지방이었다.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왕위에 오르다, 새로운 임금이 왕위에 오름)를 하고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와 헨리 8세의 누이인 메리를 약혼시키려 했는데 그만 카를로스 1세와 약혼은 깨지고 말았다. 이에 화간 난 헨리 8세는 1517년 폴랑드르에 대한 양모 수출을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플랑드르는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소유지로 아버지인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1세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이었다. 플랑드르 지방은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땅이다. 이곳은 공업, 그 중에서도 옷감을 만드는 기술이 최고였다. 그래서 영국은 옷감 짜는 양털을 플랑드르에 수출을 하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양털을 수출을 금지하여 카를로스를 압박하려 했다. 그런데 양모 수출을 못하게 되자 오히려 영국 왕실의 재정적 손실만 커졌다. 이에 헨리 8세는 플랑드르에 사절단을 보네기로 했는데 런던의 상인들은 그들의 대변인으로 모어를 추천했다. 모어는 플랑드르에서 약 7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통상조약을 잘 체결했다. 플랑드르에 머무르는 동안 <<유토피아>> 2권을 썼고, 그 후 귀국을 해서 1권을 써서 <<유토피아>>를 완성 시켰다. 처음에는 라틴어로 쓰였으며, 원래 제목은 <<사회의 가장 좋은 정치 체제에 관하여, 그리고 유토피아, 새로운 섬에 관한 즐거움 못지 않게 유익한 황금의 저서>>였다. 제목이 너무 길어서 사람들이 제목을 유토피아 라고 줄여서 말한 것 이다.
<<유토피아>>는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여 역시 가상의 세계인 유토피아를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마스 모어에게 말하고, 토마스 모어는 그의 말을 글로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알리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두 편으로 되어 있다. 1편은 유럽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2편은 말 그대로 토마스 모어가 꿈꾸는 이상 세계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이다.
그런데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게된 사회적인 배경은 뭘까? 그당시 영국의 토지 정책은 인클로저 정책이었다. 인클로저 정책이란 미개간지, 공유지 등 공동 이용이 가능한 토지에 담이나 울타리 등의 경계선을 치고 남의 이용을 막고 사유지로 하는 정책이다. 이 시기 영국은 양모 무역이 한창 발달 하던 때였는데 양모값이 크게 오르자 영국의 귀족들은 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농사 짓는 소작인을 몰아내고 그 땅에 양을 길러 양모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기거리오 쫓겨난 농부들은 거지 신세로 전락하여 먹을 것을 찾아 멀리 떠나기도 하고 굶어 죽기도 하고 도둑질을 하다가 교수형(사형)에 처해지기도 하는 절박한 처지가 된 것이다. 무역과 자본주의는 영국을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그 혜택을 누린 사람은 일부 부유한 귀족이었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더욱 더 가난해졌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국가도 백성의 편보다는 귀족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은 역할을 했다. 그로인해 농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농촌사회는 붕괴되기 시작하고 더불어 곡물값은 폭등하고 실업자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마치 도미노 처럼 말이다. 토마스 모어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지켜보며 좀 도 인간답게 사는 인상적인 사회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의 결실이 바로 <<유토피아>>라는 책이다. <<유토피아>>는 출판되자마자 유럽 사회의 지성인들에게 큰 관심을 얻었다. 당시 유럽 사외는 르네상스(프랑스어-다시 태어남)라는 새로운 물력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르네상스는 그리스 . 로마 문화를 모범으로 삼아 학문과 예술을 부활시키고, 인간적인 문화를 창조하려는 문화운동이다. <<유토피아>>는 그 물결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유토피아>>는 오랜 세월 독점적인 권력을 누리던 가톨릭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했고, 또 소외된 서민들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길을 담은 책이었다.
가톨릭 중심의 사회에서 종교적인 관용을 주장하고, 남자와 여자의 평등한 교육 등 당시로서는 천지가 개벽할 만한 주장을 펼쳤다. 오늘날 인권이 존중되고 남녀 평등을 수중하게 여기는 생각은 이때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제 1 장은 이렇게 끝난다. 이 1 장에서는 그저 유토피아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이 정도 만으로도 이 책을 다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 마지막의 말 처럼 유토피아로 인해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남 여 평등이 이때부터 실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1장을 읽어보면 토마스 모어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엄청난 책을 지을 수 있었나 얼추 감이 올 수도 있고, 궁금할 수도 있다.
2.토마스 모어 그는 누구인가?
그는 어쩌면 <<유토피아>>라는 책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죽은지 400년이 지난 1935년 로마 교황청이 그에게 성인의 칭호를 부여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토마스 모어는 1478년 2월 6일 런던에서 법관이던 존 모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2살이 되었을 때,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종교계의 큰 지도자였던 존 모턴의 시중드는 아이로 들어갔다. 토마스 모어의 영특함은 그때부터 드러났다. 모턴 대주교의 추천으로 보통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인 14살에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모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고 당시 유럽 사회의 새물결인 르네상스의 기운을 받아들이는데 열심이었다. 하지만 모어는 법률가로 자라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하고 뉴인 법학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1500년 23살의 젊은 나이로 변호사가 되었고, 1504년 27살의 모어는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했는데,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헨리 7세의 세금 청책에 반대하다가 의원직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젊은 나이에 그런 대단한 일에 도전했는데 단지 나의 생각을 말한 것 만으로 일자리를 잃는 다는 것은 정말로 처참한 일 인 것 같다.
그는 정치에서 손을 뗀 후 학문의 세계 빠져 들었다. 그는 문학, 철학, 역사, 과학 등 다양한 분야 공부했는데,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저술들이 많이 탄생했다. 1548년 출간 한 <리처드 3세>라는 책은 나중에 셰익스피어가 지은 희곡 <리처드 3세>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1505년 모어는 제인 콜트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모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린 아내에게 라틴어와 음악을 가르치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제인 콜트는 지주의 딸이었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유럽의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그때의 여성들이 집 밖을 나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 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모어는 좋은 아빠이기도 했다. 딸들 교육에 늘 깊은 애정을 가졌고, 집안에 기도실을 두어 스스로 기도 생활을 함으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 7시까지 기도하고 공부하였으며 매일 아침 미사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또한 세속적인 안락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 항상 거친 모직 셔츠만 입였다. 모어는 귀족으로 많은 재물을 관리하고 결코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소유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도 검소란 생활을 하도록 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돕고 양로원을 세워 불쌍한 노인들을 보살폈다. 또한 런던시의 전속 법률가가 되어 가난한 시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변호 활동을 하여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자원 봉사자는 이 모어가 먼저 한 것이 아니가 싶다. 그리고 이 모어의 행동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겸손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잘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가 싶다. 물론 그 전에 먼저 한 사람들도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지금 생각하는 바로는 모어가 가장 먼저 한 것이 아닌가 싶다.
1509년 헨리 8세가 국왕으로부터 즉위한 후부터 모어는 영국의 정치와 외교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510년 런던 부시장으로 임명되었고, 1515년엔 플랑드르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유토피아>>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헨리 8세는 모어의 공정하고 치밀한 업무처리 능력을 높이 신임하여, 1529년 그를 취고 법관인 동시에 수상에 해당하는 상서경이라는 자리에 임명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대법원장 겸 국무총리가 된 셈이다. 하지만 상서경 자리는 토마스 모어의 마지막 공직이었다. 왜냐하면 상서경이 된 지 5년 만에 반역죄로 체포되고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이유는 헨리 8세에게 있었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던 모어는 이런 상황에서 오직 침묵만을 지켰다. 공개적으로 헨리 8세를 비난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헨리 8세는 모어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민들로부터 가장 신망이 높은 토마스 모어를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으면 점점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토마스 모어를 설득했으나 모어는 왕의 뜻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은 오랜 친구였던 노오포크 공작이 그를 찾아와 “토마스, 우리는 함께 국왕을 위해 일하지 않았던다. 국왕의 분노는 곧 죽음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하자 모어가“그럭이 전부인가? 그렇다면 자네와 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네. 다만 내가 오늘 죽는다면 자네는 내일 주게 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라고 했다. 모어는 말 대신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나는 이 모어의 말이 이해가 않간다. 국왕의 분노는 곧 나의 죽음 이라는 것 인에, 모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의지와 진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임제 선사께서 말씀하신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에 이르든 주인이 되면 그곳이 참된 곳 이다.“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시킨것이 아닌 나신의 의지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답하기는 어려운데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정도로 그때 당시의 정치를 바꾸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마음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점령 당했을때의 조국을 찾고 싶은 마음과 지금 우리나라의 통일을 원하는 것과 같을 것 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세워도 뜻데로 되지 않으니 참 슬픈 일 이다.
1533년 앤 왕비의 대관식에 참석을 하지 않았으며, 1534년 의회에서 통과된 왕위 게승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이때 통과된 왕위 계승법은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공주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고 앤 왕비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어는 이 법안ㅇ에 동의를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 같다. 1534년 5월 토마스 모어는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모든 수입을 잃고 부동산을 몰수당했으며 가정에 큰 위기가 닥쳤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다. 모어는 런던탑에 약 15개월 동안이나 갇혀 있었지만 결코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평소에 자신이 하던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일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펜을 빼앗겼고 책도 들여오지 못하여 저술 활동도 저술 활동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심문은 불시로 반복되었다. 식사량은 점차 줄었고, 관절염이 도져 한 고통을 겪었으며 건강이 많이 나빠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으며 또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그를 보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1535년 7월 1일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6일 단두대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소. 천국에서 다시 만나 유쾌하게 삽시다.”라고 했다. 또한 차마 사형딥행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형리들에게는 “기운을 내게. 자네의 직책을 과감하게 수행해야 하네. 내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아차! 수염은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잘리면 안되지.”하는 말을 했다. 그리도 들을 일일이 포옹한 다음 마지막으로 헨리 8세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의연하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사형당할 때“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앞서 하느님의 신하로 죽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사형당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모어가 정말 위인은 위인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든 그를 성인으로 생각하고, 존경했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말로 그동안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그를 본받아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에 가깝게 지냈던 네덜란드 유명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했다.“토마스 모어, 영국의 수상 그는 눈보다 순결한 영혼을 가졌다. 영국에서는 그가 가진 천재성을 과거와 미래를 통틀러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파냐 카를로스 5세 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훌륭한 협력자를 잃는 것 보다 차라리 내 영토 중에 가장 아끼는 도시를 잃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이들의 이야기는 그를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5년 5월 20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성인으로 추대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즉슨 앞에도 말했듯이 그를 어떤 것보다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또는 후회했을 수도 있다. 후회하는 것은 그를 모욕했던 것이 후회된다고 보면 될 수 있겠다. 토마스 모어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모어가 죽었다고 실망 할 수는 없다. 앞으로 기대해 볼만 하다.
3.유토피아 섬을 탐험한 사람, 라파엘에 대한 이야기
이 책은 소설이지만 모어는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구성을 해 놓았다.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들을 이야기 곳곳에 배치해 놓아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유토피아 섬이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될 것 이다. 이러니 나도 정말로 유토피아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착각이 사실일지 궁금하기 때문이다.아마 모어는 이 점을 노린 것 같다. 한 가지 예로, 책의 도입부에 보면 모어가 외국과의 협상차 네덜란드로 출장을 갔다가 거기서 라파엘을 만났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실제로 모어는 1515년 네덜란드의 플랑드르에 외교 사절로 파견된 일이 있었다. 물론, 라파엘이란 사람은 모어가 창조해 낸 가상의 인물이다. 책을 읽어보면 모어가 라파엘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사실은 모어가 라파엘이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라파엘은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유토피아 섬을 탐험하고 거기서 살아보기 까지 했다는 행운아 라파엘은 모어앞에 어떻게 등장하고 그는 어떤 개성을 지닌 사람일까? 모어가 라파엘을 만난 곳은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 이라는 곳이다. 모어는 플랑드르에 출장 갔다가 잠시 안트베르펜에 머물렀다. 앞에 말한 양모사건 때문에 다시 무역 관계를 재개 하고자 플랑드르고 사절단을 보낸 것 이다. 당시 영국의 정치와 행정, 외교를 주름잡던 모어는 영국 상인들의 요구로 이 사절단의 이원이 된 것이다. 드디어 사절단이 만나 여러 번 회의를 했으니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얼마간 회의를 쉬기로 했고, 모어는 그 틈을 타서 얼른 개인 볼 일을 보러 안트베르펜으로 갔다. 모어는 안트베르펜에 머물면서 피터 자일스라는 청년을 자주 만났다. 자일스는 똑똑하고 훌륭한 학자였는데 모어는 자일스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향수병을 달래곤 했다. 이 자일스라는 사람은 실종 인물로 모어의 친구다. 자일스는 에라스무스의 친구이기도 해서, 에라스무스를 모어에게 소개했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라는 풍자 소설을 쓴 네덜란드의 유명한 인문학자이다. 이런걸 ‘유유상종(비슷한 사람까리 어룰림.)’이라고 하면 되겠다. 어느 날 모어는 자일스의 소개로 ‘문제의 인물’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라파엘은 ‘신은 병을 고친다’는 뜻이고, 히드로다엣\우스는 ‘넌센스(허풍선이-너무 과장하여 실속이나 믿음성이 없는 말과 행동을 자주 하는 사람)의 조제자’ 라는 뜻이다. 라파엘은 외모의 약간 무관심한 편이었는지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으며, 수염은 길게 나 있고, 망토는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어서 모어는 그를 뱃사람으로 생각했단다. 그러나 자일스의 소개에 따르면 라파엘은 학식이 매우 높고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정통하며 철학에도 관심이 많은 학구파이다. 게다가 호기심도 짱! 다른 세계를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고향 포르투칼을 떠나 ‘아메리고 베스푸차’ 가 이끈 팀에 합류해서 여기저기를 탐험한 색다른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항해사 이다. 신대륙의 초기 탐험자로 1497년 ~ 1503년 까지 아메리카를 여러번 항해했다. 그러니 라파엘을 실종 인물인 베스푸치의 일행으로 설정해 놓은 건, 라파엘과 유토피아 섬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지가 아닐까 싶다. 15,16세기 당시의 유럽에서는 신대륙 발견 이후 탐험 열풍이 굉장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다.
이런식으로 이 후 라파엘에 대하여 쭉 나오고 다음은 유토피아에 대하여 소개하고, 다시 토마스모어가 살던 시대의 사회를 비판도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끝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유토피아’를 알게 되었고, 그동안 ‘자유’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자유’라는 것은 누군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 이고, 그 자유를 잊게 되면, 어느순간에 보면 나는 무언가에 복종하게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토마스모어는 이 ‘유토피아’를 쓸 때 그때 당시, 그 훗날 자손들에게도 언제나 자유를 잃어버리지말고 항상 지니고 다니며 토마스모어처럼 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토마스모어처럼 되고 싶은 사람은 가장 중요시해야하는 것이 ‘자유’라고 말이다. 나도 ‘자유’라는 말을 가슴 깊이 세겨두고 ‘유토피아’가 있다고 믿는다면 내가 유토피아를 만나고 이 책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요 며칠동안 유토피아라고 추정되는 섬에서 노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꼭 유토피아가 있을 것 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유토피아에 접촉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