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일상 속의 깨달음
고수(高手)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그들의 눈은 남들이 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단번에 읽어낸다. 핵심을 찌른다.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는 맑고 깊은 눈, 평범한 곳에서 비범한 일깨움을 이끌어내는 통찰력이 담겨 있다.
[ 연기 속의 깨달음 - 이옥과 박지원의 소품산문]
이옥의 <연경>과 박지원의 <관재기>, 두 글 모두 절집에서 연기를 화두삼아 스님들과의 문답을 적은 글이다. 이옥은 담배를 사랑한 나머지 담배의 역사를 정리할 만큼 담배에 벽이 있었던 인물이다. <연경>에서도 담배를 소재로 법문을 펼치는데, 장난삼아 쓴 것 같지만 불교의 연기설에 대한 비판을 담은 일장 논설이다. 박지원은 관재라 이름붙인 벗의 집을 위해 글을 써주면서, ‘헛것을 보지 말고 제대로 보라’는 일침을 담았다. 두 글 모두 장난투가 배어 있지만 행간에 만만찮은 내공이 느껴진다.
[그림자놀이 -이덕무와 정약용의 산문]
그림자는 삶의 그늘이다. 그림자는 허상일 뿐이지만 실체가 드리우지 않고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덕무와 정약용이 이 그림자를 소재로 글을 남겼다. 슬픈 광경도 있지만, 읽는 이가 함께 환해지는 그림자놀이도 있다. 두 사람은 그림자를 통해 남들이 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단번에 읽어낸다. 핵심을 찌르는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
[천하의 지극한 문장 - 홍길주의 이상한 기행문]
홍길주는 이렇게 말한다. “문장은 다만 책 읽는 데 있지 않다. 독서는 단지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모두 독서다” 그가 두 번의 여행을 소재로, 한편의 훌륭한 문장론을 완성하였다. 아주 같다고 해도 안 되고, 같지 않다고 해도 또한 안 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라 했다. 여행과 문장 작법은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데 따지고 보니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신선의 꿈과 깨달음의 길 -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허균의 생각]
허균은 <홍길동전>의 작가로 유명하다. <호민론> 같은 글도 그의 개혁사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허균은 마음공부와 관련된 글도 많이 남겼다. 또 도사 남궁두의 수련과정을 적은 소설 <남궁선생전>은 오늘날 단학 수련하는 사람들이 교과서로 삼을 만큼 정심한 연단이론을 섭렵하고 있다.
[세검정 구경하는 법 - 정약용의 유기 세 편]
정약용이 30대 초반 서울 명례방에 살 무렵에 지은, 벗들과의 노님을 적은 글 세편을 모았다. 강진 유배시절의 글들과 달리 젊은 날 그의 글에는 생동하는 삶의 활기가 느껴진다. 친구들과 수종사에 올라 술잔을 나뉘며 노니는 그의 가슴에는 청운의 꿈이 가득했을 것이다. 또 마른번개가 우르릉거릴 때 동무들을 부추겨 세검정에 나서는 그의 모습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핵심을 꿰뚤어 보는 뛰어난 안목이 느껴진다.
2부 - 맛난 만남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다.
[이런 집을 그려주게 - 허균과 화가 이정]
허균은 화가 이정에게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그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정은 허균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허균은 “이제 누구와 더불어 세상 밖에서 노닌단 말인가? 그가 죽어 풍류가 문득 다하고 말았다며” 애통해하였다. 의리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취하지 않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권력이 높은 자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정은, 평양 기생에게 얹혀 술에 절은 청춘을 탕진하다 숨을 거두었다. 참 이런 것은 불공평하다. 재능있는 자가 진흙탕 속에서 뒹굴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해 허균은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산자고새의 노래 - 허균과 기생 계랑의 우정]
남녀 사이에도 우정이 있을까?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더구나 상대가 기녀였다면? “이화우 흩뿌릴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으로 유명한 기생 계랑과 허균은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허균은 그 때문에 곤경에 빠지기도 했으나 진정으로 그녀의 재주와 인간을 아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허균은 “오래 사귀었으나 몸을 나누지는 않았다. 그녀는 음란함을 즐기지 않았고 나는 난잡함에 미치지 않아 오래오래 우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어떤 사제간 - 권필과 송희갑의 강화도 생활]
서정 깊은 시심으로 당대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뛰어난 시인 권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그가 임진왜란 이후 세상에 뜻을 접고 강화도에 은거할 당시, 송희갑이란 자가 천리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와 제자 되기를 청했다.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 된 권필을 송희갑은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시를 배우고자 하는 송희갑에게 권필은 불법으로 월경을 해서라도 중국으로 가 배움을 넓히라고 독려하였고, 스승의 말씀을 받든 제자는 바다에서 수영을 배우다 짠물에 기혈이 삭아 결국 병들어 죽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히 사제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끈끈한 무엇이 있다.
[삶을 바꾼 만남 - 정약용과 강진시절 제자 황상]
열다섯 나이에 정약용을 처음 만난 황상. 그는 당시 천주학쟁이로 몰려 강진에 귀양와 있던 정약용에게 제자되기를 청하였다. 머리가 나쁘다며 주눅든 제자에게 정약용은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큰 병통이라며, 꾸준히 노력한다면 눈부신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격려한다. 제자는 이 가르침을 평생을 두고 잊지 않았다. 훗날 예순을 눈앞에 둔 나이에 꼬박 18일을 걸어와 스승의 묘 앞에 선 제자의 손에는 스승이 예전에 주었던 부채가 들려 있었다. 그 옛날 더벅머리 소년에게 던져준, 오로지 부지런하면 된다던 스승의 따스한 가르침이 한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놓은 것이다.
[실내악이 있는 풍경 - 홍대용과 그의 벗들]
마음 맞는 벗들이 한자리에 모여 허물없이 흉금을 털어놓는 광경은 참 아름답다. 이익을 따지고 출세만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무한경쟁의 피비린내가 아니라, 바라보기만 해도 기쁘고 오가는 눈빛만으로도 즐거움이 넘친다.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홍대용이 주동이 된 실내음악회에는 김억, 이덕무, 박지원, 홍경성, 이한진, 김용겸, 홍원섭 등의 인물이 함께 했다. 신분 낮은 악공에서 학문 높은 선비까지 신분의 간격도 나이 차도 까맣게 잊고 한자리에 앉아, 각자의 악기에 몰두하며 조화를 즐거워한다. 꿈결같이 아련하고 그리운 풍경들이다.
[돈 좀 꿔주게 - 박지원의 짧은 편지]
척독, 엽서쯤에 해당하는 짤막한 편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척독은 시간이 없어 짧게 쓴 것이 아니다. 절제된 비유와 간결한 표현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 척독은 두 사람만이 아는 암호를 감춰 마음을 주고받는 널찍한 통로였다. 특히 박지원의 척독에서는 특유의 톡쏘는 풍자와 촌철살인의 해학이 빛을 발한다. 당시 지식인들의 삶의 속살이 훤히 들여다뵌다. 박지원은 돈을 꿔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도 돈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할 말은 다 하고 피차 구김살이 없다. 깊은 정과 든든한 신뢰가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노을치마에 써준 글 - 가족을 그린 정약용의 편지]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가족과 주고받은 사연을 보면 부모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아비의 못난 자의식이 뚝뚝 묻어난다.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잘라 아들 딸에게 아버지의 당부를 적어 보냈다.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과 함께 자식들이 행여 그릇될세라, 학문을 게을리할세라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읽힌다. 또 세살 어린나이에 마마에 걸려 숨진 막내 농아를 위해 쓴 글에서는 아비 노릇 한 번 못한 참담한 심정이 드러난다. 마마로 죽은 아들이 못내 가슴 아팠던 아버지는 뒤에 천연두를 치료하는 방법을 정리한 <마과회통>을 지어 안타까움을 달랬다. 절망을 극복하는 다산다운 방법이었다.
1부 - 벽에 들린 사람들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던 맹목적인 자기 확신, 추호의 의심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그립다.
[미쳐야 미친다 - 벽에 들린 사람들]
꽃에 미친 김군, 표구에 미친, 방효량, 벼루에 미친 정철조, 국화에 미친 심씨, 비둘기 사육에 관심이 있었던 유득공,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눈물을 찍어 그림을 그렸던 이징, 우연히 왕희지와 비슷하게 써진 글씨에 제가 취해 과거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한 최흥효, 한 시대 정신사와 예술사의 발흥 뒤에는 이처럼 한 분야에 이유없이 미치는 마니아의 존재가 있었다.
[굶어죽은 천재를 아시오? -독보적인 천문학자 김영]
홍길주의 수학선생이자, 관상감 관원으로서 역상산수에 있어서만큼은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던 김영, 그러나 농부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신분 때문에 멸시를 당하고, 처절한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저자는 능력 있는 자가 손가락질당하고,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남의 것을 훔쳐다 제 것인 양 속이는 세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독서광 이야기 - 김득신의 독수기와 고음벽]
김득신은 자못 엽기적인 노력가다. <백이전>은 무려 11만3천 번이나 읽었고, 만 번 이상 읽은 것만도 36편에 달했다. 그 이하는 아예 꼽지도 않았다. 너무 노둔하여 주변 사람들을 웃겼던 김득신을 사람들은 자주 화제에 올렸지만, 그 안에는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그의 노력에 대한 외경이 담겨 있었다.
[지리산의 물고기 -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는 스스로를 간서치, 즉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했다.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부어 피가 터지는 지경에도 책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써보내던 그였다. 가난하여 책 살 돈이 없어 늘 빌려보았는데, 한 권 책을 읽으면 너무 기뻐 읽고, 중요한 부분을 베껴 놓았다. 이렇게 읽은 책이 수만권, 베낀 책만 수백 권이었다. 처참한 가난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은 사람을 압도한다. 독서가 지적 편식이나 편집적 욕망에 머물지 않고 천하를 읽는 경륜으로 이어지던 그의 지적 토대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송곳으로 귀를 찌르다 - 박제가와 서문장]
꿈결처럼 아름다운 서사와 문장을 보여주는 박제가의 <묘향산소기>, 묘향산 기행을 떠난 박제가는 신새벽 등불을 켜고 <서문장전>을 읽는다. 서문장은 어떤 사람인가? 중국회화사에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기린아로 추앙받는 그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불우를 곱씹다 결국에는 송곳으로 귀를 찌르고 도끼를 제 머리를 내리치는 극심한 분열증에 시달린다. 살아서 뜻을 얻지 못한 채 분을 품고 세상을 떠난 서문장과 문장공부를 버리고 경국제세 공부에 몰두하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써먹을 데도 없었던 박제가. 그럼에도 박제가는 껍데기의 삶은 살지 않겠다. 뼈가 썩은 뒤에도 길이 남을 정신으로 살겠다고 하였다.
[그가 죽자 조선은 한 사람을 잃었다 - 노긍의 슬픈 상상]
노긍은 과시에 있어서 당대에 겨룰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뛰어났던 인물인데, 과거시험장에서 글을 팔다 선비의 기풍을 무너뜨렸다는 죄목으로 귀양살이를 했다. 고작 이런 인간이 죽었는데, 이가환은 조선이 한 사람을 잃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왜일까? 노긍의 행동에서는 높은 식견과 포부를 품었으되, 그 뜻을 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싸늘한 냉소, 영락에 영락을 거듭한 집안과 스스로의 기막힌 처지에 대한 자기연민이 진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