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 겨울 <공장의 불빛>
이화여대 방송반 스튜디오.
서울대 메아리, 이화여대 한소리, 경동교회 빛바람 중창단 등 일군의 젊은이들의 노래 녹음이 극도의 긴장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야음을 틈타 가수 송창식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담요로 창문을 가린 채 강근식, 배수연, 조원익 등 당대의 뮤지션들이 연습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급박하게 녹음한 반주 위에 실린 이들의 노래는 원주 카톨릭 센터 스튜디오에서의 편집을 거쳐 2,000개의 불법 카세트 테이프로 배포된다.
앞면에는 노래가 뒷면에는 반주가 담긴, 한국교회사업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카세트테이프는 오랫동안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며 대학가와 노동현장으로 퍼져나간다.
# 2004. 가을 <공장의 불빛>
KOCCA Studio.
이지영, 이소은, 이승렬, 이은, 이적, 남상일 등 젊은 가수들과 록커 전인권의 노래, 국악 오케스트라에서 현악 오케스트라, 브라스, 사물이 이르기까지 다양한 악기로 충실하게 구현된 <공장의 불빛>의
마스터링이 진행되고 있었다.
2002년 겨울 최초의 기획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22살의 젊은 음악인 정재일에 의해 리메이크되기까지의 짧지않은 과정이 그리고 78년 이후 작사·작곡자 김민기를 짓눌러온 "불행한 때에 태어난 자식을 어디 보육원에 맡겨 놓고 아직 못 찾은 것 같은" 길고 오랜 죄책감이 그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사반세기만의 공식화 - <공장의 불빛>
1978년 겨울 불법 카세트테이프로 제작되어 79년 초 배포되었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 2004년 10월 드디어 '공식' 출시된다. 최초 제작된 이래 사람들 사이에서 복제와 재복제를 거치며 가사조차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운 조악한 음질로만 전해져 온 <공장의 불빛>이 사반세기만에 비로소 그 음악적인 색깔과 깊이를 온전히 담아 세상에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음반 발매의 의미를 넘어 정치적 상황에 의해 거세 당했던 한 시대의 복원이자 음악적인 복권이라 할 수 있는 <공장의 불빛> 공식 음반은 1978년 카세트 테이프의 음원에 70년대 이후 민중미술, 사진작품
현장기록 사진들을 영상으로 편집하여 만든 DVD와 2004년 정재일이 편곡,프로듀스하고 이지영, 이소은, 이은, 이적, 이승렬 등 젊은 가수와 록커 전인권 등이 참여한 리메이크 CD가 한글/영어/일어/중국어 대본이 함께 묶여 선보인다. <공장의 불빛> 타이틀은 전태일 열사의 일기장에서 글자를 한자한자 집자(集字)하여 만들어졌다.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에 주목한 불법음반의 효시
김민기 작사·작곡 노래굿<공장의 불빛>은 70년대 후반 한국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상황을 정형화된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작품으로 그 내용적인 면뿐만 아니라 카세트테이프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또한 혁명적 발상을 담고 있다.
당시 제도권의 심의와 상관없이 세상에 나온 불법 음반인 <공장의 불빛>은 이후 80년대 민중운동의 정서적 대변자 역할을 했던 숱한 민중가요 불법 음반의 효시가 되었고, 반주만 따로 녹음되어 누구나 이에 맞추어 극을 꾸밀 수 있도록 만들어진 뒷면은 소위 가라오케 테이프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김민기는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카세트테이프의 매체적 특성-휴대성과 간편함을 간파했고 <공장의 불빛>은 이후 대학가와 노동현장으로 놀랄 만한 대중적 확산력을 가지며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다.
또한 <공장의 불빛>은 노래라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전달매체를 통해 비극적인 사건의 내용을 객관화함으로써 노동문제를 널리 사회화해 내었다는 데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노래굿 <공장의 불빛>
다양한 음악양식과 악기사용, 한국대중음악사의 새로운 시도
<공장의 불빛>은 '편지-교대-사고-작업장-야근-음모-선거-싸움과 패배-해고와 새로운 결의'로 이어지는 과정이 노래와 음악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자체로 극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오페라로 파격적인 내용의 가사사용, 가사의 연극성 등 한국대중 음악사에 있어 새로운 시도를 해낸 작품이다.
어둡고 초라한 악절의 집요한 반복으로 구성된 '교대',주로 군대사회에서 구전되는 선율을 빌려 노동자 간의 미묘한 대립점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야근',동요적 순결성과 제련된 언어 감각이 결합된 '공장의 불빛', 레시터티브(敍唱) 스타일을 말 그대로 한국적으로 풀어낸 '음모', 진양조의 민요적 감수성을 현대적으로 재창출해 낸 '두어라 가자',그리고 익히 알려진 '이 세상 어딘가에' 까지…. 구전가요, 트위스트, 흑인영가, 남도소리, 풍물, 포크와 성악곡의 요소들까지 다양한 음악양식과 전자악기에서부터 국악기에 이르는 다양한 악기 사용으로 각 장면의 분위기를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공장의 불빛>은 서정적이라고만 생각되는 노래가 얼마나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70년대를 거치며 김민기가 노래들을 통해 다양하게 활용하고 실험했던 요소들, 그가 단련해 온 음악적 역량을 집대성한 작품인 동시에 단형의 노래들에서의 한계를 넘어 뮤지컬(노래극)로 이동하는 김민기의 음악세계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1978 <공장의 불빛> DVD
정재일이 리메이크한 2004 <공장의 불빛> CD가 정치, 시대적인 상황에서 오는 선입관에서 벗어나 음악 자체에 충실하고 자유로운 해석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다면, 1978 <공장의 불빛> DVD는 당시 그 시대에 대한 충실한 복원이자 엄혹한 상황에서 음반 제작에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헌정의 의미를 지닌다. DVD는 당시 제작했던 3개의 마스터 테이프를 찾을 길이 없어 처음 제작되었던 2000개의 테이프 중 김민기의 지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5개의 카세트테이프를 찾아 디지털로 복원하고 다시 마스터링하는 작업을 거쳐 제작되었다. 이를 음원으로 오윤, 조세희, 최민식, 이기원 등 여러 작가들의 70년대 이후 민중미술, 판화, 현장기록 사진 등을 동영상으로 편집한 이미지를 함께 담았다.
카세트 테이프의 후면에 담겼던 반주녹음 역시 같이 수록되었으며, 한글, 영어, 일어, 중국어 자막을 선택할 수 있다.
리메이크 2004 <공장의 불빛> CD
-김민기와 정재일의 만남
2002년 겨울부터 시작된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 작업은 이 작업을 총괄할 편곡자의 섭외로 적지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다양한 스타일과 장르가 담긴 <공장의 불빛>을 작품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21세기의 색깔로 자유스럽게 표현해내기를 바랬던 김민기와 최종적으로 조우한 사람은 만 22세의 정재일 이었고, <공장의 불빛>이 녹음되던 1978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정재일에 의해 2004년 <공장의 불빛>은 음악 자체로 온전히 부활하게 된다.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접하면서 클래식의 기초를 다진 정재일은 10세 때 기타라는 악기에 매료되어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밴드생활에 접어들었고 여러 가요 음반 및 공연, 영화 OST앨범 활동을 통해 만만치 않은 이력을 쌓아왔다. 2004년 첫 앨범 <눈물꽃>을 선보인 바 있는 그는 3-4분 단위의 개별 곡들로 이루어지는 기존 음반들과는 달리 각 노래가 40여분 동안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작품전체의 호흡을 놓치지 않고 끌어가야 하는 쉽지 않은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 작업을 나이답지 않은 긴 호흡을 선보이며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정재일과 <공장의 불빛> : 첫 만남
"아름답고 단순한 기타선율에 읊조리는 목소리 그 안의 깊은 노랫말"로 인해 김민기의 음악을 긱스 활동시절부터 흠모해왔던 정재일에게도 <공장의 불빛>을 처음 듣고 난 이후의 느낌은 또 다른 충격, 그 자체로 그때까지 그가 알던 김민기의 작품들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공장의 불빛'이나 '이 세상 어딘가에'에서는 원래 그가 알던 음악의 느낌을 받기도 하였지만.)
"굉장히 불안하고 분노에 가득찬 듯한 음들... 당시로서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들었을 때도 전위적이고 과격한 음들... 가장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김민기의 멘트, 그 뒤를 이어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음들, 또 뒤를 따르는 아주아주 불길한 목소리로 쓰여지는 '편지'... 마치 영화<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음악 같기도 하고 <노스탤지어>의 노교수가 분신할 때의 장면도 떠올리게 하는.. '교대'에서는 핑크 플로이드를 떠올리게도 하는.." 이것이 정재일이 처음으로 만난 <공장의 불빛>의 느낌이었다.
정재일과 <공장의 불빛> : 새로운 호흡과의 만남
이렇듯 복잡한 첫 인상 속에서 듣고 듣고 듣고 또 들어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 도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정재일이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잘하려는 욕심, 훌륭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려는 욕심을 모두 버린 후 였다. 이후 그는 생각이 나는 데로 두서없이 좋든 나쁘든 여러 아이디어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고 한번의 정리과정을 거쳐 2004년 <공장의 불빛>의 색깔을 만들어갔다.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장르, 스타일,다룰 수 있는 모든 악기들을 동원하고, 감성과 이성을 총동원,그동안 너무나 시도해 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어 시도하지 못했던 조합과 실험을 시도했고 결국 작품의 중심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의 색깔을 입힌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Remake <공장의 불빛> by 정재일
정재일은 억압 받고 멸시당하는 노동자들의 마음이 집시음악과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공장의 불빛> 모티브를 발칸반도의 영화들-<집시의 시간>이나 <영원과 하루> 같은 영화들에서 찾았다. 한편으론 익살스럽고 또 한편으론 너무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처절하고 또 신비로운 그런 느낌이 그가 입히고자 한 <공장의 불빛>의 색깔이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에서 차례로 소시지 기계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교대'는 쓸쓸하게 교차하는 극한의 분노와 좌절감을 이지영과 이승렬의 목소리로 표현해냈다. 온갖 아프리카 타악기와 장고들, 전자음, 그리고 찢어질듯한 기타소리의 배치와 정재일, 남상일의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사악한 느낌이 인상적인 '돈만 벌어라'는 익살스러움과 과격함의 균형이 돋보인다.
수재천의 정갈하고 느린 호흡에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얹힌 '두어라 가자'는 구사대에 의해 유린당한 후 남겨진 폐허에서의 극도의 허탈함과 모든 감정을 초월하여 홀로 있는 듯한 아련한 느낌이 배어 있다.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곡들 중 하나인 '이 세상 어딘가에 2'는 전반부의 웅장하고 희망찬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슬픈 바이올린 선율이 fade out되면서 마치 긴 꿈을 꾼 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의 마무리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