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에르 라비는 누구인가?
인간과 대지의 조화를 실현하며 살아온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를 수식하는 말은 여럿이다.
‘생명 농업의 선구자,
농업과 생태학을 연결한 농부,
땅을 지키는 철학자,
현실적인 신비주의자,
미래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
모든 권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하는 환경 운동가.’
1938년 알제리 남부의 케낫사 오아시스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대장장이 아버지와 할머니, 새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돌투성이의 황량한 풍경 속에서 인간이 대대손손 정성을 쏟아 녹지를 일궈 낸 문명은 그곳 말고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전 생애는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혹독한 풍경 한가운데 조화로운 공동체를 창조한 농부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다섯 형제와 함께 살다가 프랑스 인 부부에게 입양된 피에르 라비는 알제리 사막의 문화를 간직한 채 프랑스 문화의 교육을 받았다. 청년 시절 파리로 건너가 기업의 단순 기능공으로 생활하던 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없는 부를 생산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삶의 부조리함을 발견하고 도시 생활에 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진보란 몇몇 사람들의 부를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부과하는 규율들을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빈곤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은 두 가지 원칙, 즉 무한한 성장과 무한한 이익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이었으며, 그 파괴적인 결과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1960년 미셸을 만나 결혼한 피에르 라비는 마침내 도시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 아르데슈로 내려갔다. 당시에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을 귀농을 과감하게 행동에 옮긴 것이다. 시골에서 살게 되면, 누리지도 못할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 내자고 외치는 생산 제일주의의 사상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도시화와 산업화의 방식은 이미 시골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아르데슈에서의 처음 3년 동안 피에르는 생산성 증대라는 개념에 근거를 둔 농사 방식의 해롭고 부정적인 결과를 경험했다. 화학 비료를 생산하는 회사는 농민들에게 농약을 사용하도록 권장했고, 농업 기술자들 역시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서라며 농민들에게 화학 비료를 이용한 농법을 계몽했다.
농부로서 그는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인류에 피해를 입히는 생산 제일주의의 논리에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대지, 물, 식물, 동물 같은 지속적이며 재생할 수 있는 자원의 자율적인 운영 원칙으로써 ‘생명 농업’에 의지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의 여러 원주민들이 가르쳐 준 것처럼 대지가 우리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의식적이고 영적인 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막의 남자가 되기를 꿈꾸던 어린 시절에 보았던, 척박한 대지를 일구며 조화롭게 살았던 사막의 농부들의 모습은 그의 일생에 걸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 피에르 라비와 미셸은 자연 친화적인 농법들을 연구하고 시험하며 자신들의 땅을 일구기 시작한다. 그것은 살충제나 비료, 전략적인 물 관리 같은 현대적인 방법이 아니라 전통적인 방법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토양 구조와 비옥한 잠재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기물과 부식토를 이용했다. 말하자면 거름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그것들로 돌투성이의 땅을 비옥하게 가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농사가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은 가족이 먹을 만큼만 일하고 거두었을 뿐, 자연을 바라보며 음악을 연주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렇게 하여 그는 생태계를 전복시키지 않고도 충분히 한 가정을 부양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피에르의 전통적 농법은 단지 한 가정을 부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들처럼 농촌으로 살러 오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피에르는 자신의 경험을 나눠 그들의 정착을 도왔으며, 그렇게 시작된 수업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자신이 성공시킨 농업 방법을 적용할 수 있었다. 사막에서 태어난 그가 다시 사막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피에르 라비의 수업은 이제 농부들을 교육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들의 농촌에 그들을 보내고, 사라져 가는 재래종 씨앗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으로 확장되었다. 2001년부터 그는 과소비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안하기 위해 유럽 강연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그가 처음 정착했던 그곳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햇볕에 그을리며 밭을 일구는 일과 함께 진행된다.
** 피에르 라비 연보
1938년_알제리 남부 케낫사 오아시스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대장장이 아버지와 할머니, 새어머니 슬하에서 다섯 형제와 함께 살다가 프랑스 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알제리의 문화를 간직한 채 프랑스 문화의 교육을 받는다.
1960년_알제리 전쟁은 양부모와의 대립을 자극한다. 파리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현대화의 부정적 부산물로 얼룩진 도회지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그 무렵 아내 미셸을 만나고, 자연에 가까이 머무는 삶을 살기 위해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 아르데슈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도시를 떠난다. 하지만 그는 농촌에서조차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인류에 피해를 입히는 생산 제일주의의 결과들을 폭넓게 경험하고 그 논리에 강하게 반발한다.
1972년_생태학을 근간으로 하는 친환경 농법으로 자갈투성이였던 메마른 대지를 비옥하게 일구어낸다. 이후 그 땅에서 그의 다섯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난다.
1978년_CEFRA(농촌 응용교육 연구센터)에서 실시되는 생명 농업에 대한 교육을 책임진다.
1981년_수년간의 시행착오로 얻은 자신의 친환경 농법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아프리카의 농부들에게 전하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부르키나파소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처음으로 국제적인 생명 농업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가뭄과 비싼 비료, 살충제로 인해 침체된 부르키나파소의 농민들에게 생명 농업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르 뿌앙-뮐루즈 협회’의 도움으로 아프리카에 ‘아프리카 최초의 생명 농업 교육 센터’를 설립한다.
1985년_‘르 뿌앙-뮐루즈 협회’의 후원으로 부르키나파소 북부의 고롱 고롱 지역에 생명 농업을 위한 교육 센터를 설립한다.
1988년_안전한 먹을거리 확보와 사막화 반대 운동의 국제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그는 생명체와 인류를 파괴하는 일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며, 국제 연합이 후원하는 프로그램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실시되는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1989년_에로 지방자치단체의 후원으로 CIEPAD(교육과 실천을 위한 국제 모임)을 창설하고, 이 단체 내에 농업 시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농민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한 조직을 만든다. 모로코, 팔레스타인, 알제리, 튀니지, 세네갈, 토고, 모리타니, 우크라이나 등에서 수많은 활동을 벌여 나간다.
1992년_튀니지의 한 오아시스 재건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1997~1998년_국제연합의 요청으로 황무지화에 맞서는 투쟁에 관한 협약을 만드는 데 참여한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시행할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을 표명한다.
1999~2000년_친환경 농업과 친환경적인 윤리를 전파하기 위한 ‘대지와 휴머니즘 협회’를 창설한다. 활동 기지를 아르데슈의 마 드 보리외에 설치해 친환경 농법과 친환경적인 윤리를 실험하고, 적용하고, 교육하는 장소로 활용한다. 니제르, 말리 공화국, 모로코에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다.
2002년_환경에 관한 작금의 시급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합할 인물이라는 평과 함께 ‘자주적 환경 운동’의 일원인 알렝 르퀴예로부터 대선에 출마할 것을 제의 받는다. 그는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과 자연을 둘 것을 제안하고, ‘의식이여 깨어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선거 운동을 펼쳐 4개월 만에 국회의원 184명의 지지 성명을 받아낸다.
2004년_드롬 지방의 로슈-쉬르-그란에 ‘농업 생태학 센터’를 설립할 계획을 세운다. 이 센터는 생태학뿐만 아니라 ‘대지와 인류애를 위한 운동’의 가치를 그 정신에서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해하는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2006년_‘대지와 인류애를 위한 운동’(www.mouvement-th.org)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