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서문에서 저자는 아내를 살해했던 16세기 목사 존 켈로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교활함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도구적 합리성이 가진 매력과 혐오, 역할로부터의 이탈과 충실함, 그리고 도덕적 정당화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심지어 이들이 동일한 문제의 서로 다른 측면이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
그는 아내를 독살하려고 했지만 아내는 독극물이 든 음식을 토해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목을 졸랐다. 그런데 이런 경우 늘 발생하는 문제이지만, 아내의 사체를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남았다. 신경과민이었던 이 남자가 했던 행동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마치 한바탕 부부싸움을 한 뒤에 아내를 달래주려는 것처럼 그는 아내를 매우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리고 이별의 선물로 목걸이를 선물했다. 이 목걸이는 너무 굵고 튼튼했다. 사근사근하고 공손한 아내라도 아마 좋아하지 않았을 그 목걸이는 바로 올가미였다. 그는 아내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는 마치 아내가 자살을 한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본문 9~10쪽.
어쩌면 그의 마음속에는 진실한 기도와 살인의 음모가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방화벽 같은 것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한 부류의 행동을 할 때는 다른 부류의 행동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랬다면, 이 두 부류의 행동은 결코 한데 섞이지 않았다. 각자 따로 발생했다는 말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 돼, 빌어먹을! 칼을 사용할 수는 없어! 칼은 보이지 않게 숨길 수가 없잖아!" 이런 음모를 꾸미다가도 신도들 앞에서는 신의 사랑과 의지를 말했을 수도 있다. 물론 진심으로. ―본문 14쪽.
1장. 딜레마
여기에서는 오디세우스의 모험담,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교활함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역사 속의 사례들을 통해 '교활함'이라는 주제에 접근함에 있어서 흔히 범하는 '악당과 바보'의 이분법적 시각을 공격하는 한편, 그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층위의 인식들로 독자들을 이끈다.
어쩌면 그녀는, 긴급하고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느라 오랜 세월 떠돌다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도대체 당신은 여태 어디에서 무얼 하다가 이제야 온단 말입니까?" 이것을 핵심을 찌르는 정확한 표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이다. "도대체 여태까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자빠져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오디세우스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 오디세우스가 아름다운 바다의 요정 칼립소와 7년이라는 세월을 동침하면서 보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 그동안에 그는 페넬로페를 생각하며 울기도 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혹은 그리워한다. 혹은 죄의식을 느낀다. 혹은 애증의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그는 칼립소가 놓아줄 때까지는 길을 떠나지 않는다. ―본문 47~48쪽.
"나도 한때는 젊었다. 그때는 나도 혀가 무뎠고 손이 부지런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결국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덧붙인다. 오디세우스의 충고는 네옵톨레모스를 아연실색케 만들었다. "당신은 그렇게 거짓말을 할 때 스스로를 야비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오디세우스의 대답은 평온하면서도 한층 더 인정사정없다.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본문 52쪽.
모든 사람이 다 오디세우스처럼 책략이 많은 것은 아니다. 나도 그의 이런 면모를 찬양하는 데 조금도 주저할 생각이 없다. 독자라면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겠는가? 아니면, 잘 정돈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는 함정들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의 이 책략 혹은 꾀바름은, 어떤 필요한 수단들을 채택하는 데 있어 반대 의견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와 동일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비도덕성의 미덥지 않은 속임수를 동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꾀바른 책략을 낼 여지가 있다. 우리는 비도덕성과 미덥지 않음이라는 두 개의 요소를 (그리고 이것 외에 다른 요소들도) 교활함이라는 개념으로 한데 섞어버린다. ―본문 55쪽.
마키아벨리는, 조심스럽고 도덕적으로 매력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 따라 좌우됨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그는 다시 한 번 군주는 자기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우리는 군주의 이익과 백성의 복지 사이의 연관성을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겉으로 드러내는 선의를 쉽게 믿고 잘 속는 군주는 자기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희생시킨다.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 관념 따위는 없다고 선언하고 나선 새로운 군주의 먹이가 된다는 것이다. ―본문 106~107쪽.
성과 정치, 정치와 성……. 이 둘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심지어 정반대로 보이기까지 한다. 성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이고, 정치는 공공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미묘하고 어려운 차이를 추론할 수 있다. 사람들이 클린턴을 역겹게 여겼던 것은 단지 그가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거짓말을 했다거나 수습 직원을 우월적인 지위로 이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오럴 섹스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이 어떤 곳인가. '링컨이 포토맥 강 너머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리 장군의 남군 진영을 바라보던' 그런 곳이다. 하지만 성과 정치는 쌍둥이 관계다. 때로는 하나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와 칼리마코는 동일한 덕목을 동원해서 승리를 거둔다. ―본문 118~119쪽.
만일 이 세상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악당과 바보로만 나뉜다면, 독자는 어느 쪽이 되고 싶은가?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바보들을 비웃어주고 싶을 것이다. 바보니까 당연히 비웃음을 받아도 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악당들이 펼치는 사기는 자기들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스스로 악당의 대열에 낄 수 있다고 만족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교활함이 통할 수 있는 조건의 대부분은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과 탐욕이다. 악당은 강하고 단호하고 남자답게 보인다. 이에 비해서 바보는 약하고 줏대 없고 여자처럼 보인다. ―본문 136쪽.
2장. 겉모습
2장에서는 위선과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문제에 관련된 전통적인 관념들을 공박한다. 교활함의 실질적 측면을 전방위로 탐사하는 이 대목에서 저자는 존 홉스, 데이비드 흄 같은 철학자를 등장시켜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게 하고, 고대 그리스부터 20세기 말의 온갖 사건들과 문학 텍스트들을 동원한다.
가면을 쓰고 남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알 때, 사람은 정말 진지해진다. 미국의 한 부랑자는, 자기가 기차에 무임승차를 할 때마다 번번이 형사들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던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옷을 바꾸어 입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 남자는 몇몇 철도 노동자들에게 부탁을 해서 그들의 작업복과 모자를 얻어 입는다. 그리고 나중에 돈이 좀 생기자 새 작업복을 사서 입는다. 이렇게 위장을 하고 나자 마음대로 기차역을 드나들 수 있게 된다. 그러자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스트 오마하에 있는 악질 형사하고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나를 자기 형제처럼 대해주더군요. 철도회사의 소유지에 무단으로 들어온 부랑자들을 잡으려고 두리번거리면서 말이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좋은 옷, 다시 말해서 약간의 속임수는 정말 멋진 것이라고 말이오." ―본문 146~147쪽.
누구에게나 명약관화하게 보일지라도 실제 모습은 겉보기와 다를 수 있다. 수십 년 전에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작품들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들이 이전에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베르메르의 새로운 작품이라는 점이었다. 작품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캔버스나 물감 등이 모두 그가 살던 당시인 17세기 것임을 밝혀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미술적 재능이 요구되었다. 물론, 어떤 작품이 가짜로 판명되고 난 뒤에 그 작품의 흠을 지적하기란 훨씬 쉬울 것이다. 1947년에 위조범 한 반 메헤렌Han van Meegeren에 대한 공판에서 검사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사람들은 누구나 미술품의 진정한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155~156쪽.
런던의 한 여관에서 재미 삼아 시작한 주사위 게임이 어떻게 끝날지는 독자도 잘 알 것이다. 당신은 돈을 모두 털린 채 새벽녘에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후회할 것이다. 빈 지갑을 몇 번이고 들추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여관집 딸이 당신의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친구분들은 조금 전에 모두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들 방값을 선생님이 지불하겠다고 말씀하셨다는데, 맞죠?"
물론 그 사람들은 정직한 친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직한 친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행동한다는 사실이 그들이 정직한 친구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플루타르크의 지독히도 역설적인 지혜가 빛을 발한다. 당신은 겉모습에 속았다. 소위 '봉'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돈을 털린 것과 바보 같이 봉이 되고 말았다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뼈아픈가? ―본문 174~175쪽.
'태도'나 '자세'가 육체적인 자세를 뜻할 수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이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조금만 연습을 하고 또 주의를 기울인다면 악수를 할 때나 인사를 할 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은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손에 힘을 주고, 입을 단정하게 다물고, 상대의 눈을 바라볼 것. 이게 어려운가? 설령 '태도'가 어떤 심리학적인 감정 상태라고 하더라도, 샤워를 하거나 면도를 하거나 옷을 단정하게 입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사이비 영업사원들은 어떻게 하면 진실한 표정이 되는지 너무 잘 알아서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닐까? ―본문 199~200쪽.
어떤 사람이 믿는 사실은 그 사람이 누구를 믿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누구를 믿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사실을 믿느냐에 달려 있다. 믿음, 지식, 경험, 그리고 내가 '인식론적 권위'라고 부르는 것은, 주어진 쟁점과 관련해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자료를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 여기에서 누가 누구보다 낫다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역사가 있을 뿐이다. 만일 당신이 알 샤프턴 목사를 믿는다면, 1987년에 타와나 브롤리가 백인 청년 여섯 명에게 납치되어 강간을 당했다고 믿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백인의 주류 언론을 신뢰한다면 브롤리가 거짓말을 한 것이며 샤프턴 목사는 새빨간 거짓말이나 늘어놓는 고약한 악당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본문 213~214쪽.
3장. 절망?
3장에서는 무지와 자기기만이라는 주제를 전반적으로 살피면서 독자가 당연히 교활해야 하는 경우를 심도 있게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교활함에 대해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상황이 과연 절망적이기만 한지 반문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한다.
테레즈 윔베르Therese Humbert는 수수한 농촌 가정의 맏딸로 태어나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수다와 풍부한 상상력이라는 재능을 발휘해서 미국인 백만장자 딸을 사칭하고, '위대한 테레즈'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파리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차례로 친구로 만들었다. 그녀는 멀지 않은 미래에 상속 재산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명시된 유언장을 금고 안에 놓아둔 것처럼 꾸몄다. 물론 이 서류는 가짜였다. 그래도 금고만은 가짜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녀가 금고를 열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금고 안에는 수백만 달러의 채권 대신 '옛날 신문 한 부, 이탈리아 동전 한 개, 그리고 바지 단추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이 기상천외한 사기 사건은 1903년 파리의 법정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본문 262~263쪽.
윔베르의 경우 자기 기만은 경험이 반복적으로 뒤섞인 데서 나왔을 수 있다. 반복 효과는 가면의 심리학이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거짓말을 화려한 세부 묘사로 가능하면 아름답게 꾸미고, 가능한 거짓말을 자주 그리고 자신 있게 하면 거짓말을 한 사람도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게 된다. 그럴 듯하지 않은가? 보다 소박한 사례를 들어보자. 당신이 좋아하는, 실제 일어났던 어떤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과장을 했다고 치자. 이 경우 나중에는 무엇이 진짜 있었던 일이고 무엇이 당신이 꾸며낸 일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경험 효과는 겉모습과 실체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로서, 아라벨라 효과와 비슷하게 작용한다. ―본문 267~268쪽.
문학 작품 속에서도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존 스켈턴John Skelton이 1515년에 발표한 정치 풍자극 <폐하Magnificence>에서는 '가짜 얼굴', '망토를 덮어쓴 공모자', '표리부동자', '예의바른 사기꾼', '교활한 중개인' 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떤가, 독자는 이들과 우열을 다투어보고 싶은가? 이들과 겨루어서 이길 수 있겠는가? 경우에 따라서 어쩌면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홉스, 흄 그리고 프랭클린은 당신에게, 그들과 겨루어서 이길 수 있으리라고 절대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들과 겨루겠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경솔하고 무분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들과 겨루어서 당신이 얻을 것이라고는 뼈아픈 교훈밖에 없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이 교훈조차 엉터리일 수가 있다. ―본문 321~322쪽.
이 신화들은 신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신으로 아폴로 산을 다스리는 제우스를 묘사하면서, 제우스가 교활함[메티스]을 삼켜서 영원히 그녀의 지혜에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정한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신화들은 교활함이 여자를 강간하거나 성적으로 정복할 수단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강간을 당하고 성적으로 정복당하는 존재라는 의미로도 읽히게 만든다. 신화는 교활함을 지혜의 사악한 딸로 드러내지 않는다. 지혜를 교활함의 사악한 딸로 드러낸다. 그런데 이게 뭘까? ―본문 364~3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