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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2년 06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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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01쪽 | 480g | 153*224*30mm |
ISBN13 | 9788936436667 |
ISBN10 | 893643666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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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01일 ~ 2024년 09월 30일
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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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왜 책에 집착하는지를.
[서평]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비. 2002) / 성석제 소설집 중 “책”
“책을 좀 읽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한 지인이 인사처럼 늘 하는 말이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바쁜 와중에도 국내 방송은 물론 해외 드라마까지 챙겨보고 일부러 맛집도 찾아다닌다. 진짜 고민인지, 아니면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는 말인지 궁금하다. 지인 이야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요즘 무슨 책 읽어?”이다. 내가 사회학 중 한 권을 읽고 있다고 했더니, 며칠 뒤 같은 책을 샀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책을 끝까지 읽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지인을 다음에 만나면 같은 푸념을 되풀이할 것이고,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또 물어볼 것이라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내 경험이지만, 우리는 끝까지 읽지도 않으면서 책을 계속 사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정말로 바빠서 못 읽는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개인적으로 변명으로 들린다.) 대부분은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활자를 읽는 것 자체를 지루해한다. 그런데도 ‘책’에 집착을 하는 이유는, ‘남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라는 쓸데없는 강박관념과 초조함 때문이다. 혹은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고 있는 낭만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는 무의미한 허세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석제의 <황만길은 이렇게 말했다>에 수록된 네 번째 단편 ‘책’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나’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글의 화자인 ‘나’의 당숙은 책에 미쳐있다. 삼만 권이 넘는 책은 이사 업체에 보관을 위탁하고, 아파트 지하 창고에 쌓아도 넘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보다 못한 ‘내’가 자신의 작업실을 내어주며 그 책을 보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삿짐센터 여직원의 불성실한 대응으로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책은 오지 않는다. ‘나’는 열불이 나고 팔짝팔짝 뛰기 직전인데 정작 책 주인은 태평하기만 하다.
이 글은 책 세계에 빠져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당숙을 일방적인 ‘내’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당숙이 아니라 화자인 ‘나’를 비판하고 있다.
‘나’의 모습은 실속 없는 ‘보여주기’식 허영심에 물든 사람들을 대변한다. 허영심은 ‘나’의 태도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나’는 작업실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남들이 제 멋대로 작업실이라고 부르니 은근슬쩍 ‘작업실’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정작 그 ‘작업실’에서 하는 작업은 없다. 책을 보관하기 위해 작업실 보수공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 대부분이 읽지 못하는 외국 서적인데, 그중에 우리말 책만 추려도 대단한 장서가 될 것이라며 화자는 물론 마을 사람도 들떠한다. 게다가 옮기는 도중 터진 책 상자를 추려보니 대부분 외국 서적인 것을 보고 책을 팽개치고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은 한 술 더 뜬다.
몇몇 사람에게서 서음(書淫)이라고 불리기는 해도 그는 나름대로 극한까지 가본 사람이다. - p 121
…… 재앙, 짐, 한 사람의 생의 자취, 모험, 여행, 유적이며 폐허 아니면 그저 책, 돈으로 삼억원, 종이로 팔면 몇십만원, 권수로 삼만 권, 이게 다인가.
아무도 모른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형광등처럼 껌뻑껌뻑 명멸하더니 얇고 네모진 심연 앞에 쭈그리고 앉은 나를 환하게 밝혀왔다. - p 138
당숙과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방으로 들어오는 길에 이곳저곳에 책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 책을 ‘만나’와 비유한다. ‘만나’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때, 아라비아의 광야에서 여호와로부터 받았다는 음식물이다. 글의 전체적인 흐름은 ‘내’가 솔선수범해서 당숙을 도와주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발췌를 보면 그것은 당숙을 향한 ‘나’의 열등감과 존경심을 표현한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책이 늦어질 때마다 초조해 하는 ‘내’모습은 ‘홍수처럼 넘쳐나는 책의 지식을 조급하고 분별없이 쫓는 우리의 모습’과 겹쳐져 보인다.
성석제의 단편 ‘책’은 페이지에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문장이 길지만, 경주용 차를 탄 것처럼 단숨에 읽어 내려간다. 글의 흐름이 굉장히 빨라 시원시원하고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등장인물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특히 그런 인물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숨겨 놓은 의미를 찾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 단편은 적어도 세 번 이상 읽어 보길 바란다. 처음엔 ‘이게 끝?’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무하다. 두 번째 읽을 때에는 숨겨진 ‘나’의 허영심과 열등감이 보일 것이고, ‘나’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세 번째에는 직접적인 표현 없이 등장인물과 작은 사건만으로 이 모든 것을 어우러지게 쓴 작가에게 감탄하고 왜 ‘이야기꾼’이라고 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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