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흘렀다.
‘미선이’를 처음 만난 날.
그때 난 ‘음악도시’라는 프로의 디제이였고 늘 그렇듯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몇 장의 새 앨범을 받았다.
이건 뭘까.
촌스럽기도 정겹기도 한 전혀 밴드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미선이' 라는 이름과 낯선 앨범 디자인.
집에 돌아와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불친절해 보이는 가사집을 먼저 집어 들었다.
‘나는 화장실에 앉아있어요.’
- 아니 이게 뭐야. 이 놈 변태 아니야.
‘아무리 급해도 닦지 않겠어’
- 허허. 무슨 노래 가사가… 아니 그보다 곡 제목이 '치질'이라고. 허허.
아 개그 밴드구나. 그래 미선이라. 작명센스 좋은데..
한번 웃어보리라 하는 심정으로 플레이어에 씨디를 넣고 볼륨을 높였다.
그 순간 미선이는 이자벨 앙뚜와네트(왠지 똑똑해 보이는 이름)보다 더 지적이었고
카산드라 바바렐라(왠지 풍만해 보이는 이름)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미선이’에서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스웨덴으로, 스웨덴에서 스위스로.
낯선 얼굴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동생으로.
개그 감각은 사실이었고 미선이처럼 좋아보이는 웃음을 가졌고 루시드 폴처럼 진지했고
그리고 늘 외로워보였다.
언젠가 윤석이가 TV에 출연했을 때 어색한 얼굴로 몸을 고치는 약을 만드는 자신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음악을 하는 자기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난 진심으로 내가 부끄러워졌다.
노랫말을 쓰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유일한 행복이라는
술자리에서의 나지막한 신세한탄에 고작 어깨를 두드려 주는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난 음악을 듣지 않고 가만히 가사들만 바라보고 있다.
외로운 국경의 밤, 눈물로 물든 방에서, 웃음의 실로 애써 기워낸 시를 읽고 있다.
네가 틔운 싹을 보렴.
윤석이가 보고 싶어졌다.
유희열 (Toy)
오전 3시. 늦은 밤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새벽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루시드 폴의 음악을 틀어놓은 채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작고 차가운 구석방에서 낡은 손난로 하나 앞에 놓고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는 어느 예민한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만 같다. 루시드 폴의 음악은 늦은 밤과 새벽 사이 어디쯤인가에서 서성인다. 이제 다가올 새벽은 일찍 잠든 자가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아니라, 밤을 새운 자가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가 쓴 노랫말만을 따로 모은 이 책을 천천히 읽다보니, 운(韻)을 잘 맞춘 가사들이 저절로 리듬을 타며 귓전을 울린다. 그러고 보니, 그의 노래들은 말하지 않고 읊조린다. 외치지 않고 속삭인다. 내뱉지 않고 삼킨다.
그의 언어 속에서 ‘보다’에 선행하는 동사는 ‘보이다’이다. 그리고 ‘가다’나 ‘오다’보다 더 중요한 동사는 ‘머물다’이다. (“그대 내 귓가에 머무네/ 지금은 멀리 있다 해도/ 그렇게 스쳐간 그대 옷깃/ 지금 내 옷깃에 머무네// … // 잠시 그대를 잊고 있어도/ 멍하니 벽을 바라보면/ 문득 들리네/ 여기 내 귓가에 머무네” ― 머물다 中)
루시드 폴에게 시간은 균질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물처럼 고여 있는 것으로, 그속에서 언젠가의 시간은 끊임없이 되불려나오면서 영겁회귀한다.(“내 위로 떨어져내린 촛농 같은 시간들/ 멀리서 나를 부르네 날아가야 한다고” ― 시간)
그 시간들은 때론 붙박인 채 멈춰서고(“찰나의 시간/ 멈춰버린 시계의 추” ― 빛), 때론 고인 채 썩을지언정(“종이배처럼 흔들리며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 ― 나의 하류를 지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지난 시간의 토막들아/단 하나도 가지 않고 남아 있었구나” ― 그건 사랑이었지)
그리고 모든 것은 문득 돌이켰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한다.(“몸집만한 선물보다/더욱 컸던 네 마음/ 그건 사랑이었지/ 그건 사랑이었지” ― 그건 사랑이었지) “이건 사랑이야”가 아니라, 이제 와서 그때를 돌이켜 보니 “그건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사랑조차 불현듯 과거로부터 호출되어 와서야 몸을 얻는다. 그리고 유학생활을 하는 머나먼 이국을 포함한 공간들에 대한 느낌은 늘 시간에 대한 감각으로 치환된다.
그의 노랫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기억’이다. 자주 쓰이는 바람과 비 역시 기억을 불러오기 위한 일종의 문고리 같은 것들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모두가 부르짖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흐르고 흘러 지금 이곳에까지 닿게 된 멀고 먼 연원이야말로 소중하다. 그게 애틋한 사랑이든 가혹한 노동의 결과이든.
물론 그는 스스로 밟아온 길을 회고한다. 서울 삼청동의 골목길에서 고향 앞바다의 파도까지, 자전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돌아본다. 심지어 그 속엔 힘들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도 있다.(“바라보는 것만큼 어쩔 수 없던 우리/ 다같이 무기력했던 우리 고3의 바다” ― 국경의 밤)
하지만 그의 노랫말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울린 것은 사람이었네라는 노래의 가사였다. (“문득, 어제 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어느 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 // 난 심장이었네/ 탄광 속에서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 사람이었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은 그냥 외투가 아니다. 과거에 그 외투를 만든 어느 어린것의 고된 노동의 집적물이다. 그렇게 그는 지금 이곳의 모든 것들에서 언제나 그 속에 내재한 고단한 역사를 만난다. 그 스스로의 모습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가장 단출하게 편성된 연주에 얹혀서 부서질 듯 여리게 읊조려지는 그의 노래는 봄을 바라본다. (“해마다 봄이 오면 나는 꿈을 꾸네/ 눈물 없는 이 세상을/ 하지만 언젠가 나는 노래하네/ 눈물 없는 진달래 피는 봄에” ― 진달래 타이머) 그를 이끄는 계절은 봄이다.(“난 대단한 게 별로 없어/ 봄을 따라 왔을 뿐” ― 들꽃을 보라) 그러나 봄을 앙망하는 그의 노래가 불리는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거나(“고요하게 어둠이 찾아오는/ 이 가을 끝에/ 봄의 첫 날을 꿈꾸네” ― 오, 사랑), 혹은 겨울이다.(“냉각된 가을/ 혼자 남은 타향의/ 읊조리는 겨울 노래” ― 마음은 노을이 되어)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라는 노래에서 언급되는 사계의 순서는 여름-가을-겨울-봄이다.(“생각해보면 언제나/ 여름 가을 겨울 봄/ 기억 속에서만 변하지”) 그에게 계절이 흘러가 닿는 종착점이 봄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계속해서 그는 봄을 노래한다. 그의 계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봄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그의 노래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봄은 여전히 떵착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씨디를 갈아 끼우며 연이어 그의 음반들을 듣고 있자니, 모든 곡이 단 하나의 노래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들인 것처럼 들린다. 그는 말한다. 그가 부르는 것은 그의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노래라고.(“아주 멋진 노래 하나/ 그리며 살아가네/ 평생을 건 숙명처럼/ 당신이 허락한다면/ 당신의 목소리 되어/ 내가 이렇게 노래하려 해//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 우리 시린 마음에 꽃이 필까/ 낮고 외롭지만 따뜻한 노래/ 다시 환한 저 불빛이 될까” ― 물고기 마음) 그리고 오래도록 그 노래를 부를 거라고.(“듬직한 산처럼 넓은 네 등/ 못난 친구들/ 너는 이제 내 목으로 노래하네// … // 노래할게/ 계속 노래할게/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노래할게)
루시드 폴의 길고 긴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귓가의 이명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