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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3년 07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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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76쪽 | 279g | 145*210*20mm |
ISBN13 | 9788954622035 |
ISBN10 | 8954622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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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문학동네, 2013.
웬만하면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읽은 국내 소설이다. 김영하라는 이름은 2000년대 중반, KBS 1라디오 프로그램 <김영하의 문화 포커스>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매일 저녁 10시 10분이면 공연 예술을 포함해서 문화계 전반의 소식을 들려주었는데, 나는 그의 차분한 목소리와 문학에 관한 내용을 좋아했다. 이후에는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에서 그가 소개하는 책을 만났고, 최근에는 TV 오락(?)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의 작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는데, 국내 문학에 관한 반감 때문이었으리라...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영화(원신연 감독, 2017.) 개봉을 이유로 이제야 읽게 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p.7)
어느 문학평론가의 해설과 함께 작가의 말을 포함해서 173페이지 분량을 출, 퇴근 지하철에서 이틀에 나누어 보았다. 첫인상은 유려하고 유연하면서 담백함이 물씬 느껴진다. 너무 힘을 가하지 않으면서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문장은 절제미가 돋보이고... 나는 시끄럽고 복잡한 환경에서도 술술 읽을 수 있었지만, 작가는 책상 위의 원고 노동자로 얼마나 많은 글을 썼다가 지웠을까? 고생의 흔적이 여백마다 묻어난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아니 남이 아직 오르지 않은 산을 먼저 선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는 먼저 산에 올랐고, 땅을 선점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연쇄살인범을 소재로 해서...
반야심경이 손에 잡힌다. 펼쳐 읽는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의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p.11-12)
여기에는 작가의 독서, 종교, 사상, 철학, 음악, 예술, 역사, 의학... 등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마치 고전에 등장하는 현자의 목소리처럼, 그의 글은 머릿속을 오랫동안 울리게 한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 이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을 보면서였다.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경계... 그 경계를 가르는 기준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퇴행성 치매로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인간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몽테뉴의 [수상록]. 누렇게 바랜 문고판을 다시 읽는다. 이런 구절, 늙어서 읽으니 새삼 좋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p.14)
나의 이름은 김병수, 올해 일흔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25~26년 전이다. 살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 살인을 멈췄다. 희생자의 딸 은희를 입양해서 키웠다. 다른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나와 비슷한 놈이 나타났다. 박주태,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은희의 남자친구가 되어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 생의 업, 내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은희가 살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먼저 그를 죽여야 한다. 선수를 쳐야 한다... 치매 노인의 시각으로 서술하는 소설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죽기 전에 바보가 될 테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될 테니까.(p.52)
공(空),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 심오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마음속의 모든 것을 비우면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행복조차 비워야 하나? 하지만 주인공은 비움으로, 잊어버림으로 또 다른 고통을 맞이한다. 비웠으면 새로운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고통 없이 바보로 죽는 걸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사는 게 아닌가...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 가지 :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p.57)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p.94)
책장에서 괜찮은 시를 발견했다. 감탄하여 읽고 또 읽으며 외우려 애썼는데, 알고 보니 내가 쓴 시였다.(p.96)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p.98)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엔 별들이 찬란하다. 다음 생에는 천문학자나 등대지기로 태어나고 싶다. 돌이켜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p.119)
오늘은 정신이 너무 또렷하다. 내가 알츠하이머라는 것은 정말 사실일까.(p.123)
미지근한 물속을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p.148-149)
시간과 기억의 싸움은 이미 정해진 승부이다... 약을 쓰고, 메모하고, 녹음해도 시간은 막을 수 없다. 나이 들어감이 서글프다.
김영하의 소설을 더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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