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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발행일 | 2013년 07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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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84쪽 | 560g | 150*225*30mm |
ISBN13 | 9788956372556 |
ISBN10 | 8956372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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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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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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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만으로도 책을 펼치게 하는 작가도 있고, 때로는 번역가가 그만큼의 믿음을 주기도 한다. 이 작가라면 이때까지의 작품에서 그랬듯이, 적어도 독자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이 번역가라면 의미 있는 책을 높은 수준의 번역으로 선보여왔으니, 적어도 무의미한 내용이나 완성도 낮은 번역 때문에 읽다가 진저리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던가, 대강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명예의 조각들>은 이와 비슷한 패턴이면서도, 드물게 출판사와 출간포부를 보고 펼치게 된 책이었다. 난 이 책의 첫장을 넘기기 전까지만 해도, 보르코시건 시리즈가 열 권이 넘는 장대한 대서사시라는 것도, 그 중 몇 권은 국내에 출간된 적 있으나 전권이 본격적으로 번역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도, 심지어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것도 몰랐다. 그저 <반지의 제왕>을 비롯한 톨킨의 작품에 애정을 퍼붓다시피 쏟아부어온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그만큼 완성도 높은 번역본을 내놓았던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사의 신간이라는 것과, 야심찬 출간포부만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이 책을 펼쳤다. 다른 곳도 아닌 그 출판사가 그렇게 작심하고 내놓는 시리즈라면, 그만큼의 의미와 완성도는 담보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만으로. 그리고 그 막연한 믿음은 독자를 저버리지 않았다.
<명예의 조각들>은 아주 단순히 설명하자면, 우주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두 남녀가 여차저차 만나 한바탕 싸우다시피 하고 이래저래 갈등도 빚다가 인연을 맺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주가 배경이라고 해서 장대하고 정교한 SF 설정을 기대한다면, 좀 실망할 수도 있을 듯하다. <명예의 조각들>에 나오는 우주는 단순히 스케일 큰 배경을 제공할 뿐, 우주에서만 가능한 에피소드 등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설정을 약간만 손보면, 지구를 배경으로 얼마든지 전개될 수 있는 스토리인 것이다. 대신 우주를 배경으로 하면서, 생경한 배경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더라는 일종의 친근함이 서로 섞여 묘한 감상을 느끼게 해 준다. 우주에서 사람이 살게 된 시절에도, 갈등도 오해도 싸움도 너무나도 친근한 패턴으로 진행되고, 그러면서 우주라는 배경이 어우러져 상투적이라기보다 이채로운 분위기가 피어난다.
아랄과 코델리아의 첫만남은 살벌했다. 코델리아는 그나마 군인은 아니었다지만, 적대세력의 군인과 군대와 관련있다고 간주할 수도 있을 탐사작업 대원이 만났는데 달달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단순한 적대세력 수준도 아니라, 상대방이 괴물이라고 세뇌교육을 받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래왔기 때문에 말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이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자마자, "내가 알아온 것이 정말 진실일까?"라는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상대방을 괴물의 일원으로 막연히 혐오하거나 증오하며 살았을 것이다.
<명예의 조각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완전히 다른 두 문화권이 나오는데 문화 자체의 우열을 가리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 대면에서는 아예 상대방을 괴물 취급하느라 그런 기미를 보일 여지도 없었고, 어느 정도 사이가 가까워진 뒤 서로 대화를 할 때에는 우열논쟁과는 방향성이 다르게 전개된다. 아랄과 코델리아가 각각 자기 문화권이 방식이 진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절대적인 의미의 우열관계를 가리려는 것보다는, 자기네의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쪽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막상 상황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거나 본격적으로 비교하려고는 하지 않고, 일단 자기네들 방식이 더 옳다는 결론을 내린 뒤 주변 정황을 끼워맞추는 티가 팍팍 대목에서는 피식 웃었다. 억지라면 억지지만,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는, 친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어서 말이다. 그래도 처음과 달리 상대방의 문화권에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는 것을 밑바탕에 깔고, 무엇보다 찬찬히 대화하는 모습을 통해, 편견과 고정관념을 걷어내고 서로를 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표현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겉으로는 논쟁이지만, 속으로는 서로 가깝게 이해하려는 대화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논쟁이 될 만한 부분은 하나하나 짚어가며, 논리적으로 주장해서, 이 대목은 논쟁 자체로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 준다. 이런 발상이 가능하다니, 그리고 이렇게 매끄럽게 표현해내다니,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코델리아는 아랄과 일단 헤어지지만, 결국 재회한다. 어떻게? 본국에서 누명을 뒤집어쓰고, 쫓겨나다시피 탈출하는 바람에. 이 대목을 보고 혀를 차고야 말았다. 코델리아가 본국 사람에게 아랄과 만난 경험에 대해 한 이야기라고는, 기껏해야 "그들도 사람이긴 사람이었어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호감을 가진 것도 아니고 적의가 덜해진 정도밖에 되지 않았건만, 그것만으로 스파이 취급을 해버리며 멀쩡한 인재를 축출해버린 것이다. 코델리아는 그나마 운이 좋아서 탈출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아예 유폐되거나 처벌받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을는지. 광기 수준으로 극단적인 주장을 맹신하지 않으면, 곧바로 적으로 간주되어 핍박받는 일은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더욱 씁쓸했다.
장대한 스케일로 박진감넘치고 치밀한 전개를 시종일관 선사하는 <명예의 조각들>은 그야말로 독자를 빠져들게 한다. 번역도 괜찮다. 우주를 배경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실재하는 천체물리학 용어라든가, 작가가 만든 용어가 꽤 나오는 편인데, 전자는 딱히 오역이 없고 후자는 자연스럽게 번역해냈다. 특히 작가가 만들어낸 용어를, 마치 한국인이 상상해 표현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번역해낸 데 감탄했다. 이런 부류의 용어를 번역할 때, 외국어 발음 그대로 적어 놓고 직역한 뜻만 덧붙이거나, 직역 수준으로 단어 대 단어를 번역하여 어색하게 만든 경우가 정말 많아서, 비교가 되어 더욱 그랬다. 특히 등장인물의 말투에 따라 등장인물의 신분 및 계급, 처지, 성격 등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낸 데에는 그야말로 감탄했다.
1권 자체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두 명이 어쩌다 보니 한 문화권에 자리잡게 되었더라는, 나름대로 소소한 스케일이다. 하지만 작다면 작은 이야기 속에서도, 장대한 설정과 수많은 이야기보따리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와, 시시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시리즈 소개 등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다음 시리즈부터는 작게는 나라 단위, 크게는 우주 단위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모양인데, 과연 어떤 전개를 선보일지 정말 기대된다. 소소하다면 소소한 두 명의 이야기에서도 이렇게 방대하고 치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낸 작가라면, 보다 커진 스케일과 무르익은 글솜씨로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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