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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2년 02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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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64쪽 | 226g | 128*188*10mm |
ISBN13 | 9791197717314 |
ISBN10 | 1197717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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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시집 <자판기 우유>의 이은정 작가님의 초상화를 그려보겠습니다.
은정 작가님은 자주, 배워 그린 것이 아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시지요. 그녀의 그림만큼이나 또렷한 선으로 그녀의 표정을 잘 나타낼 수 있을지 근심이 따릅니다.
그녀의 시를 처음 접하고는 우선, 화폭에 한 마리의 고슴도치가 들어왔습니다. 곧이어 자기 혐오증에 걸린 미운 오리가 떠돌았습니다. 아직 우윳빛은 감돌지 않았어요.
한없이 자기를 못나게 바라보고 미워하고 부족하다 질책하는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 또한 그렇거든요.
그러나 그녀는 소월의 ‘진달래꽃’에서처럼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로 가거나,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나무 같은 희생을 자처하지도 않습니다.(그런 나무 이제 고만 할라요.p.38-39) 좀 더 비련을 밀고 나가 처연함을 가장한다면, 많은 이들의 동정을 받고 그로 인한 이익을 챙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순하기에 자기를 속일 줄을 모릅니다. 자기를 피해자로 만들어 동정표를 얻는 대신 도처에서 위선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상형의 조건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 명명합니다. (p.101-102 슬픈 이상형) 눈화장이 얼룩져가다 이내 다 지워질 때까지, 눈물을 흘릴 만큼 다 흘린 다음엔(눈화장 p.52), 닦고서 햇살을 향해 씩씩하게 웃어 보입니다. 그녀 안에는 그런 소녀가 있습니다.
이런 에너지 때문일까요, 처음 그녀의 인스타에 우연히 들렀을 때, 평범한 듯 진솔한 자기소개에 눈길이 머물렀고, 뭔지 모를 포근함과 온당함에 끌려, 피드를 거슬러 올라가며 읽기도 했었어요.
저는 항상 정직함의 냄새를 킁킁거리고 다니거든요. 정직함이란 것은, 포장지로 마음 숨기는 법이 발달한 요즘에는 귀해진 것이지요. 특히 글이란 잘못 쓰면 흉기가 되고, 맑지 않으면 독이 되기도 해요.
그런데 은정 작가님, 그녀의 글에는 상대방을 갖고 놀려는 에너지가 1도 없이 진솔하기만 합니다. 일상 속 난무하는 얄궂은 중의법에 몸서리치며 음흉함을 못 견뎌하는 나는. 이런 마음이 좋습니다. 그녀의 순한 시에서 휴식을 발견합니다!
그녀 자신이 오롯이 표현된 시들 속에서, 여리지만 당당한 소녀는 진정한 것을 추구하며 곧지 않은 것에는 곧장 반응하여 분노합니다. (악마의 재능 p.118-119) 이상한 것을 어른스러움이나 도리 혹은 성숙이라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여자답게 p.124-125)
여자답게 웃어야 예뻐보이냐
여자답게 꾸며야 사랑스럽냐
여자답게 말해야 사랑할 수 있냐
나 사랑안할란다
그냥 너 가라
“괴이한 것들을 현실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것, 저항하려는 것”, 이것이 그녀의 '가시'입니다. 또한 이 '가시'는 詩라는 예술의 본질이자 기본기이기도 할 겁니다.
이제 이 가시들은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티없는 슬픔 자체인 빛나는 가시이기에, 그것으로 절규하듯 자신을 찌르고 시원하게 울 수 있는 것입니다. (가시 p.12)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던 그녀가 왜 자신의 가시는 좋아졌다 하는지, 너무도 알 것 같습니다. 자기 안의 순수함과 만나졌기 때문이겠지요! 그녀는 이미 원망을 넘어 그 순수와 계속 대화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곳곳의 구절들은 이런 그녀의 세계를 비추어냅니다.
낙엽이 지는 현상에 붙여, ‘가슴이 내린다’(p.16) 라고 한 그녀는 심지어 사방에서 온갖 대상들을 꽃으로 보거나 꽃이라 부릅니다. (꽃같네, 꽃꼬마 p.32-35) 끝내 꽃이 되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꽃일 수 없었던 것들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단풍눈물p.56)
시간이 지나 그녀는 삶의 원근법을 터득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청춘의 나날들이 하나의 객체로 의인화되어 내 앞으로 오고 또한 보냅니다. (p.144) 지나고 보면 고통도 모두 행복이었다고 담담히 말합니다.(시간이 지나면 p.102.) 그러면서 동시에 그 시간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엄마를 만납니다. ( 시장에 가면p.104-105, 아홉 살 장발장p.16-117, 자판기 우유p.136-137) 엄마란 존재는 그리움이자 따듯함, 그리고 나의 근원이자 감정의 본원지이기도 합니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은정 작가님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감정의 힘'’입니다. 감정적이기를 애써 피하는 지금의 세태에서, 저는 역으로, 감정이야말로 가장 큰 삶의 무기라 여기고 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 소용 없고 결국은 가슴으로 체험하고 느껴 깨우쳐야 무어든 자기 것이 되지요. 감정을 피하는 사람은 아무리 잘난들 겁쟁이일 뿐입니다. 자기 감정 앞에서 눈을 깜박이거나 돌리지 않고서 똑바로 마주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연둣빛 잎새를 자기 마음이 비추는 대로 '꽃'이라 부르는 그녀는 이미 우윳빛 백조가 되었습니다. 더이상 쫓겨 달아나는 아홉 살 장발장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두루 섭렵한 감정 왕국의 여왕으로서, 자신의 호수에서 눈부신 빛의 목욕을 여유로이 즐기고 있습니다.
이제 신록의 계절이 다가오면, 잎새를 통과하는 햇빛의 송신으로부터 나는 아마도 그녀의 호수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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