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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문장들

방정환, 김소월, 나도향, 최서해, 민태원 저 외 4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우시모북스 | 2022년 11월 22일 리뷰 총점8.4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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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년 11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432쪽 | 560g | 145*210*30mm
ISBN13 9791197132926
ISBN10 119713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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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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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소개 (49명)

서울시 종로구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미곡상과 어물전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식민치하 사람 대접을 못 받던 불쌍하고 학대받던 조선 어린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선구적 사업을 몸소 개척하며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1922년 처음 어린이날을 선포한 데 이어, 이듬 해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을 전국 규모로 개최... 서울시 종로구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미곡상과 어물전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식민치하 사람 대접을 못 받던 불쌍하고 학대받던 조선 어린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선구적 사업을 몸소 개척하며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1922년 처음 어린이날을 선포한 데 이어, 이듬 해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을 전국 규모로 개최함으로써 ‘어린이날’을 확대 정착시켰다. 1923년 3월 순문예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같은 해 5월 1일 일본 동경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문제 연구 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어린이 문제의 연구와 사명을 진지하게 각성하고 동요, 동화, 동화극, 아동자유화, 세계아동예술전람회 등 우리나라 어린이 문학과 예술 방면의 성장과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방정환의 어린이운동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공훈으로 방정환은 2017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국가 보훈처)로 선정되었다. 생전에 남긴 유일한 책은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1922, 개벽사)이며, 그밖에 동요 「귀뚜라미 소리」, 「눈」, 동화 「호랑이 형님」, 「사월 그믐날밤」, 소년소설 「만년샤쓰」, 소년탐정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 어린이를 위해 뛰어난 문학을 많이 남겼다.
저 : 김소월 (金素月, 김정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저 : 나도향 (羅稻香, 본명:나경손, 필명:빈(彬))
애상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은 물론 주관적인 애상과 감상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 주는 작품까지, 폭넓은 작가세계를 보여주는 완숙한 경지의 작가이다. 190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명 경손(慶孫), 호 도향(稻香), 필명 빈(彬)을 사용했다.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경성의전(京城醫專)에 다니다가 도일한 후 학비가 없어 귀국하였다. 1921년 단편 「추억」을 「시민공론」에 발표하여 ... 애상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은 물론 주관적인 애상과 감상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 주는 작품까지, 폭넓은 작가세계를 보여주는 완숙한 경지의 작가이다.

190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명 경손(慶孫), 호 도향(稻香), 필명 빈(彬)을 사용했다.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경성의전(京城醫專)에 다니다가 도일한 후 학비가 없어 귀국하였다. 1921년 단편 「추억」을 「시민공론」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이듬해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하여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홍사용, 박종화 등과 문예 동인지「백조」를 창간하고『젊은이의 시절』등 애상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3년에 『17원 50전』 『행랑자식』을 『개벽(開闢)』에, 『여이발사(女理髮師)』를 『백조』에 발표하면서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고, 1925년에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주관적인 애상과 감상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사실주의적 경향과 날카로운 필치를 바탕으로 하여 민중들의 슬프고 비참한 삶에 촛점을 맞춘 작품을 주로 선보이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에 대하여 김동인(金東仁)은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하였다. "젊어서 죽은 도향은 가장 촉망되는 소설가였다. 그는 사상도 미성품(未成品), 필치도 미성품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열이 있었다. 예각적으로 파악된 인생이 지면 위에 약동하였다. 미숙한 기교 아래는 그래도 인생의 일면을 붙드는 긍지가 있었다. 아직 소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도향이었으며 그의 작품에서 다분의 센티멘털리즘을 발견하는 것은 아까운 가운데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 센티멘털리즘에 지배되지 않을 만한 침착도 그에게는 있었다."
저 : 최서해 (曙海, 학송(鶴松))
1901년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송(鶴松)으로 어려서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1918년 간도로 들어가 유랑 생활을 시작해서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을 전전했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하여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했으며 이때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춘원의 『무정』을 읽고 크게 감명받고 동경에 있는 춘원과 여... 1901년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송(鶴松)으로 어려서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1918년 간도로 들어가 유랑 생활을 시작해서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을 전전했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하여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했으며 이때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춘원의 『무정』을 읽고 크게 감명받고 동경에 있는 춘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24년 「토혈」 「고국」으로 등단했다. 1925년에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여 중견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 1927년에는 조선문예가협회의 간사직을 맡았으며 전해에 휴간한 조선문단을 남진우가 인수하여 1월에 다시 입사하지만 4월에 또 실직했다. 위문 협착증을 앓던 그는 대수술 중에 과다 출혈로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학은 '체험문학', '빈궁문학', '저항문학'으로 규정된다. 몇 명의 엘리트의 눈으로 바라본 일부의 삶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한 대다수의 극빈층의 생활상을 날카롭게 표현해 그들의 울분과 서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 : 민태원 (閔泰瑗)
1894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보다. 1914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매일신보사에 입사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이직하는 한편 일본에 유학하여 1924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신문 편집에서도 탁월한 감각과 재능을 보여 귀국 후 〈동아일보〉의 사회면을 개혁했다. 1924년 5월 〈조선일보〉로 옮겨 제5대 편집국장을 맡았고, 1926년 12월 〈중외일보〉 편집국장으... 1894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보다. 1914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매일신보사에 입사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이직하는 한편 일본에 유학하여 1924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신문 편집에서도 탁월한 감각과 재능을 보여 귀국 후 〈동아일보〉의 사회면을 개혁했다. 1924년 5월 〈조선일보〉로 옮겨 제5대 편집국장을 맡았고, 1926년 12월 〈중외일보〉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0년 〈중외일보〉가 자진 휴간하자 퇴사했다. 1934년 서울 궁정동 자택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18년〈매일신보〉에 연재된 번안 소설 〈애사〉를 통해 〈매일신보〉 연재 번안 소설의 위상을 확고히 다졌으며, 〈동아일보〉 창간호를 장식한 「부평초」와 「무쇠탈」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순 한글의 한국어 문장'으로 된 신문 연재소설의 정통성을 계승했다. 1920년 《폐허》 동인이 되어 「어린 소녀」, 「음악회」를 발표했으며 『오호 고균거사―김옥균 실기』 등의 저서가 있다. 1930년대에는 『천아성』,『새 생명』 등 역사소설을 발표했다. 이외 다수의 수필과 논설이 있다. 수필가로서 명성을 안겨준 『청춘예찬』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으며, 현재는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저 : 심훈 (본명 : 심대섭(沈大燮), 호 : 海風)
1901년 9월 12일, 노량진 현 수도국 자리에서 조상 숭배 관념이 철저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서 3남 1년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조선조 말 중류 가정 출신으로 온후한 성품과 뛰어난 재질을 지닌 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심훈의 본명은 대섭이고 소년 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는 백랑, 1920년 이후에는 훈이라고 썼다. 1915년 심훈은 경성 제일고보에 입학하였으며, 1... 1901년 9월 12일, 노량진 현 수도국 자리에서 조상 숭배 관념이 철저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서 3남 1년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조선조 말 중류 가정 출신으로 온후한 성품과 뛰어난 재질을 지닌 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심훈의 본명은 대섭이고 소년 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는 백랑, 1920년 이후에는 훈이라고 썼다.

1915년 심훈은 경성 제일고보에 입학하였으며, 1917년 3월 왕족인 전주 이씨와 혼인하였다. 제일고보 4학년 재학중(19세)에 3·1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3월 5일 피검되어 7월에 집행유예로 풀려 나왔다. 이어 중국 망명길에 올라 남경과 상해를 거쳐 향주에 이르러 지강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안석주와 교유하여 후일 '극문회'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942년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아내 이해영과 이별하였다. 1930년, 심훈은 19세의 무희인 안정옥과 결혼하여, 『독백』『그날이 오면』등의 시를 발표했다. 그 후 장남 재건과 같이 충남 당진에 내려가 창작에 전념하였다.

1933년 심훈은 장편 『영원의 미소』를 탈고하여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이해영에 대한 회고적 작품 『직녀성』을 발표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자택을 짓고 '필경사'라고 불렀다. 이 필경사에서 심훈은 『상록수』를 쓰고 또 그것이 [동아일보]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 모집에 당선되어 상금 500원을 탄 작품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일으킨 큰조카 심재영과 최용신을 모델로 쓰여졌다.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들은 대개 애향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몽주의 문학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저 : 노자영 (盧子泳, 춘성春城)
시인 ·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평남(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으며, 19... 시인 · 수필가. 호는 춘성(春城). 1898년 평남(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으며, 1934년 문예지 [신인문학(新人文學)]을 발간하였으나 자본 부족으로 중단, 1935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하여 [조광(朝光)]지의 편집을 맡았고, 1938년 기자 생활 청산 후 '청조사(靑鳥社)'를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1919년 8월 [매일신보]에 「월하(月下)의 몽(夢)」이, 그 해 11월에 「파몽(破夢)」·「낙목(落木)」 등이 시부분에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장미촌], 1922년 [백조] 창간 동인으로 가담하여 [백조] 창간호에 시 「객(客)」·「하늘의 향연(饗宴)」·「이별한 후에」를 발표했고, [백조] 2호에 「우연애형(牛涎愛兄)에게」라는 수필을, 1923년 소설 「반항(反抗)」을 발표했다. 1924년 첫 시집 『처녀(處女)의 화환(花環)』, 1928년 제2시집 『내 혼(魂)이 불탈 때』, 1938년 제3시집 『백공작(白孔雀)』 등을 간행하였다. 1940년 10월 6일 41세 나이에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했다.
1903년 8월 24일 목포시 남교동 135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청천聽川. 감리서 관리인인 아버지를 따라 제주에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1916년 상경하여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나왔다. 1921년 도쿄로 건너가 호세이대학 전문부 법과에 들어갔다가 1년 뒤 예과로 전과하였고, 1924년에 독문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이때 유학생들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해외문학》을 발행하였다. 대학 졸업 후 1928년부터 서... 1903년 8월 24일 목포시 남교동 135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청천聽川. 감리서 관리인인 아버지를 따라 제주에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1916년 상경하여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나왔다. 1921년 도쿄로 건너가 호세이대학 전문부 법과에 들어갔다가 1년 뒤 예과로 전과하였고, 1924년에 독문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이때 유학생들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해외문학》을 발행하였다. 대학 졸업 후 1928년부터 서울대 도서관 촉탁으로 근무했다. 1931년에 윤백남, 홍해성, 유치진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외국근대극을 번역·상영하였다. 1940년 경성중앙방송국에 입사했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및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교수, 서울신문사 출판국장을 역임했다. 수필집으로 『인생예찬』,『생활인의 철학』,『교양의 문학』이 있다. 한국전쟁 초기에 납북된 후 생사불명이다. 1958년 박종화 주관으로 40여 편의 유고를 모은『청천 수필 평론집』이 발간되었다.
저 : 이상 (李箱, 김해경金海卿)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1930년 [조선]에 첫 소설 『12월 12일』 연재를 시작하며 등단했다. 이후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했는데, 난해하고 파괴적인 형식에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오감도 작가의 말」은 연재 중단 후 쓰여 해당 잡지에는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날개」는 이상의 대표 소설이다. 이듬해는 1937년 2월 사상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되었고, 같은 해 4월 17일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현대시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며, 1930년대에 있었던 20년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반발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건축가로 일하다가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겉으로는 서울 중인 계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였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20세부터 죽을 때까지 폐병으로 인한 각혈과 지속적인 자살충동 등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기이한 작가였다. 한국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시와 소설을 창작한 바탕에는 이런 공포가 늘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10년에 태어나 1912년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 장손으로 입양되었고,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마쳤다. 손가락이 잘리고 빈궁하게 살았던 친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신을 입양한 백부에 대한 증오심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영민하여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질이 있어 학창시절, 직장시절 내내 그림에 꿈을 품고 열중하였다. 또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있었고, 예술적 이상향으로 동경(도쿄)을 꼽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선각자이며, 천재,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전위예술의 선구자라고 자처했는데, 식민지 시대임에도 민족적인 자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범세계적이고 현대적인 문명에 심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한국 고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이나 일본 문학계에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생활은 나태하고 난잡, 무기력했다고 전해지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잡지 [조선(朝鮮)]의 1930년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기도 한 『12월12일(十二月十二日)』을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였고,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였다. 이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수정하여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소설 『지팡이 역사』 수필 『혈서삼태』와 『산책의 가을』 등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재되는 동안 삽화를 맡아 그리기도 하는 등 창작 활동은 계속하였다. 친구인 구본웅(具本雄)과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일때부터 각별히 친했으며, 대학입학시 그가 선물한 스케치박스(사구상)에서 필명인 이상이 나왔다는 설이 전해진다. 화가 구본웅이 인쇄소 창문사에 이상의 일자리를 주선하여 근무하면서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 소설]을 창간하고 편집해 발간하지만 1집만을 발간하고 그만둔다. 이후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나,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그의 연인인 금홍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 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그는 금홍과의 만남 이후에도 여러 여급들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다만 이들과의 관계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어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러던 그는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복동생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금홍과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탓인지, 가족과 아내를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 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고, 『봉별기』를 [여성]에 발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여자인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1937년 불량선인(사상불온) 혐의로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20세기 한국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집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함경남도 함흥 출생. 교육자. 종교인. 1919년 3월 3일 함흥 만세 시위에 참여해 체포됨. 같은 해 도일하여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 기독교에 입교한 후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감.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지리·박물과로 졸업. 1927년 새로운 기독교를 통한 민족구원의 소망으로 《성서조선》을 발간. 1942년 3월 권두언 <조와弔蛙>가 민족을 찬양했다는 ‘성서조선 사건’... 함경남도 함흥 출생. 교육자. 종교인. 1919년 3월 3일 함흥 만세 시위에 참여해 체포됨. 같은 해 도일하여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 기독교에 입교한 후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감.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지리·박물과로 졸업. 1927년 새로운 기독교를 통한 민족구원의 소망으로 《성서조선》을 발간. 1942년 3월 권두언 <조와弔蛙>가 민족을 찬양했다는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잡지는 폐간당함. 1945년 4월 해방을 앞두고 과로가 겹쳐 44세의 나이로 요절함.
사후에 제자이며 무교회 신앙의 3세대 지도자였던 노평구(출판인, 독립유공자) 선생이 편집한 『김교신전집(전6권)』(1975), 『김교신전집(전7권)』(2001) 이 있음. ⓒusimobooks
191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성장기 대부분을 원산에서 보냈다. 십 대 후반에 서울로 상경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서 3년 동안 수학했다. 잡지 『개벽』 『신여성』 『신세기』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조선일보』 학예사 기자로도 활동했다. 1934년 『개벽』사에서 기자로 1년간 근무하면서 쓴 단편 「불야여인-가등」을 『중앙』 12월호에 발표하며 등단한 뒤, 1936년 『신가정』 6월호에 「오후 11시」를 발표... 191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성장기 대부분을 원산에서 보냈다. 십 대 후반에 서울로 상경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서 3년 동안 수학했다. 잡지 『개벽』 『신여성』 『신세기』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조선일보』 학예사 기자로도 활동했다. 1934년 『개벽』사에서 기자로 1년간 근무하면서 쓴 단편 「불야여인-가등」을 『중앙』 12월호에 발표하며 등단한 뒤, 1936년 『신가정』 6월호에 「오후 11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생활을 시작하였다. 단편 「계산서」, 중편 「처의 설계」, 장편 「여인 명령」 등 열네 편의 소설과 두 편의 콩트, 사십여 편의 수필과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해방 이후 1946년 극작가인 남편 박영호를 따라 월북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전쟁으로 인해 폭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6년 일본 유학중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9인회를 결성하고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을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1935년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1939년 [문장]의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뒤에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 생생하고 선명한 대상 묘사에 특유의 빛을 발하는 시인 정지용. 한국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상을 비롯하여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한 시인이었다.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구읍의 청석교 바로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영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동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탄생한 그는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2살 때(1913) 동갑의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이 부인 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차남과 3남은 6.25사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현재 장남 구관과 장녀 구원만 생존해 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느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다.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고, 구인회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며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서는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일하고,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1918년 5월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해주 오씨 오학근(吳學根)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한학수(韓學洙)는 오학근의 첩실로 들어왔으나 본처인 이민석(李敏奭)이 사망함에 따라 적실(嫡室)로 재혼 신고되었고, 오장환 또한 적출로 재신고되어 4남 4녀 중 3남이 되었다. 그는 안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해 1933년 11월 오장환... 1918년 5월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해주 오씨 오학근(吳學根)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한학수(韓學洙)는 오학근의 첩실로 들어왔으나 본처인 이민석(李敏奭)이 사망함에 따라 적실(嫡室)로 재혼 신고되었고, 오장환 또한 적출로 재신고되어 4남 4녀 중 3남이 되었다. 그는 안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해 1933년 11월 오장환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문학]에 시「목욕간」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후 오장환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에 있는 지산(智山)중학교에 입학·수료했으며, 1937년 일본 메이지(明治)대 전문부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며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다. 그의 첫 시집인『성벽』은 1937년 8월 풍림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이 시집의 발행으로 오장환은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세 천재’로 화려한 주목을 받는다. 그 뒤 그는 자신이 경영하던 남만서방(南蠻書房)에서 두 번째 시집인 『헌사』를 1939년 7월에 발간했으며, [삼천리], [문장], [춘추] 등에 이따금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제 말기까지 문단 활동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해방 이후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던 열망이 국토 분단에 의해 좌절되면서, 그는 월북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월북 이후 오장환은 북한에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고, 소련 기행 체험을 담은 제5시집 『붉은 기』를 발간했다. 그다음 해인 1951년 신장결핵으로 사망했으며, 1988년 납·월북 작가의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기까지 남한에서 잊힌 시인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처음으로 『오장환 전집』(창작과 비평사, 1989)이 간행되고 그의 미발표 유고인 장시 「전쟁」과 「황무지」가 발굴·공개됨으로써, 오장환의 문학에 대한 평가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저 : 현덕 (玄敬允, 현경윤)
1909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현동철과 전주 이씨의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현경윤이고 본관은 연주다. 그는 192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정식 등단했으며, 「경칩」(1938),「층」(1938),「두꺼비가 먹은 돈」(1938)을 연이어 발표했다. 1946년에는 조선문... 1909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현동철과 전주 이씨의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현경윤이고 본관은 연주다. 그는 192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정식 등단했으며, 「경칩」(1938),「층」(1938),「두꺼비가 먹은 돈」(1938)을 연이어 발표했다.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아동문학부, 대중화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소설집 『집을 나간 소년』(아문각), 동화집 『포도와 구슬』(정음사) 등을 간행했다. 1947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의 편집 겸 발행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서울지부소설부 위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소설집 『남생이』, 동화집『토끼 삼형제』를 출판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단편 소설집 「수확의 날」을 출간하였다.
본명 하태용河泰鏞. 1904년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향리의 삼봉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순흥 안씨 안정옥과 혼인하였다. 졸업 후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하여야만 하였다.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에서 수학... 본명 하태용河泰鏞. 1904년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향리의 삼봉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순흥 안씨 안정옥과 혼인하였다. 졸업 후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하여야만 하였다.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나 가산이 파산돼 1931년 귀국하였으며, 그 뒤 조선일보 등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 「글방이 깨어져」가 2등으로 당선되었으며, 1925년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가 [생장]의 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1927년 [조선문단]에 소설 「최서방」이 당선된 이후, [조선지광]에 「인두지주」를, [조선문단]에 「백치아다다」를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 정비석과 함께 [조선]을 창간하였으며, 「병풍에 그린 닭이」,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등과 수상집 「상아탑」 등을 남겼다. 그의 초기 작품경향은 현실주의적, 경향파적인 작품세계를 보이기도 했으나, 1935년 「백치 아다다」를 발표한 이후, 예술의 미적 창조 및 자율성을 강조하는 예술지상주의적 작품을 썼다.
1913~?. 인천 출생. 문예비평가. 인천상업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에서 수학.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여 매슈 아널드와 셰익스피어를 연구함. 중앙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를 거쳐서 광복될 때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1944년에는 연극협회 상무이사를 역임. 광복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비평가로 활동하고, 주간 『상아탑象牙塔』을 간행함. 1946년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을 역임. 1950년에 ... 1913~?. 인천 출생. 문예비평가. 인천상업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에서 수학.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여 매슈 아널드와 셰익스피어를 연구함. 중앙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를 거쳐서 광복될 때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1944년에는 연극협회 상무이사를 역임. 광복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비평가로 활동하고, 주간 『상아탑象牙塔』을 간행함. 1946년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을 역임. 1950년에 가족과 함께 월북함. 평론집으로 『예술과 생활』(1947), 『부르조아의 인간상』(1949), 시집으로 『길』(1946), 『해변의 시』(1946)가 있음.
근대 국학자,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시조시인, 언론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동래, 호는 담원(?園), 위당(爲堂). 189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한학 수학 후 1910년 조선 강화학파의 거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제자가 되었다. 1910~1914년 중국 안동, 봉천, 서간도, 상해 등을 수시로 다니며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문일평, 홍명희 등과 교유. 독립운동 비밀결사조직인 동제사(同濟... 근대 국학자,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시조시인, 언론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동래, 호는 담원(?園), 위당(爲堂). 189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한학 수학 후 1910년 조선 강화학파의 거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제자가 되었다. 1910~1914년 중국 안동, 봉천, 서간도, 상해 등을 수시로 다니며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문일평, 홍명희 등과 교유. 독립운동 비밀결사조직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20년대 연희전문 교수와 동아일보,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저술활동 벌였다. 1930년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역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우리고대사 왜곡과 말살에 분노, 1935년~1936년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 제목으로 우리역사를 집필, 연재하였다. 위당은 고조선의 전역사를 우리민족사로 체계화하였으며, 단재(신채호)사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해방 후 국학대학 초대학장, 대한민국 초대감찰위원장을 지냈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제헌절 등 주요 국경절의 노래말을 지어주신 분이다. 1950년 6.25동란으로 납북.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는《조선고서해제》(1931), 《양명학연론》(1933), 《조선사연구상하권》(1946-1947), 《담원시조집》(1948), 《담원국학산고》(1955), 《담원문록》(1967), 《담원정인보전집》(1983), 《담원문록(번역본)》(2006)이 있다.
1850~1927. 충남 서천 출생. 본명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YMCA 전국연합회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1881년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안종수, 고영희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다녀옴. 1887년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됨. 1894년 갑오개혁 후 학무아문참의를 지냈고, 그 뒤 내각총서 및 중추원 1등의관 등을 지냄. 1896년 ... 1850~1927. 충남 서천 출생. 본명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YMCA 전국연합회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1881년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안종수, 고영희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다녀옴. 1887년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됨.
1894년 갑오개혁 후 학무아문참의를 지냈고, 그 뒤 내각총서 및 중추원 1등의관 등을 지냄. 1896년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었고, 1898년 만민공동회를 개최함. 1902년에는 개혁당 사건으로 아들과 3년 동안 복역함. 1923년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3월 29일 병으로 별세함. 1927년 4월 7일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됨.
저술 활동으로 논문집 『청년이여』(1926)를 비롯하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1905)과 <상정부서上政府書1>(1898),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1898), <상정부서上政府書2>(1904) 등 다수가 있음. 최근 『월남 이상재 민족운동자료집』(2021)이 나옴.
1891~1950. 경기도 김포 출생. 국어학자. 역사가. 호는 애류崖溜. 1913년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모교와 중앙학교, 중동학교에서 국어 및 국사를 가르침. 주시경의 뒤를 잇는 몇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13~1916년 조선광문회의 《말모이》 편찬에 협력하고,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 창립에 참여함. 그 뒤 조선어학회의 역사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여 1... 1891~1950. 경기도 김포 출생. 국어학자. 역사가. 호는 애류崖溜. 1913년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모교와 중앙학교, 중동학교에서 국어 및 국사를 가르침. 주시경의 뒤를 잇는 몇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13~1916년 조선광문회의 《말모이》 편찬에 협력하고,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 창립에 참여함.
그 뒤 조선어학회의 역사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여 1932년 12월 「한글마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함. 또한 《한글》지에 「정음正音 이전의 조선글」을 비롯하여 신문·잡지 등에 수많은 논문·논술·수상 등을 발표하며, 한글 순회 강습 등에 온 힘을 기울임.
1944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 대상이었으나 3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이후 신병 사유로 불구속 입건되고 이듬해 4월에 기소중지 됨.
권덕규는 호주가로도 유명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으며 항상 일제에 대한 비판으로 폭음이 잦아 만년에 몸이 많이 상했고, 해방 뒤 1949년 여름 서울 흑석동 자택에서 나간 뒤 실종되어 그 이후 행적은 미상으로 1950년 10월 24일 사망신고 됨.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됨.
저서로는 『조선어문경위』(1923), 『조선유기상,중』(1924~1926), 『조선어강좌』(1933), 『조선사』(1945) 및 『을지문덕』(1946) 등이 있음.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한다. 1907년 신채호는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1908년 신채호는 여성 계몽 잡지 『가정잡지』의 발행인이 됐고, 같은 해 『대한매일신보』에 5월부터 8월까지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한다. 5월에는 『을지문덕』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고 다음해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출간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신채호는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사상의 전파를 위해 『해조신문』를 발간한다. 1914년에 『조선사』의 저술을 시작한 신채호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광개토왕 왕릉 등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다음해 북경 도서관에서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위한 연구 자료를 수집한다. 또 박은식(朴殷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1919년 신채호는 임시정부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글을 썼고 대한 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가 된다. 다음해, 보합단(普合團)의 내임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군 자금을 모집한다.

1921년 북경에서 김정묵(金正默), 박봉래(朴鳳來)등과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만들어 『통일책진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한다. 다음해 북경에서 조선 역사를 연구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한다. 그리고 1923년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만들었고,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창조파로 활약한다. 다음해 관음사(觀音寺)에서 역사 연구에 몰두한다. 1925년에는 1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미발표 작품인 『전후 삼한고』를 쓴다. 1928년 대만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신채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한다. 다음해 『조선사연구초』가 동지들에 의해 서울에서 출판된다.

1931년에 그는 『조선일보』에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사』를 연재했고, 10월부터 12월까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한다. 1936년 2월, 신채호의 나이 57세,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 땅에서 옥사한다. 1945년에는 신채호학사가 설립되었고, 다음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의 서문을 『조선사론』으로 표제하여 광한서림에서 출판한다. 1948년 『조선상고사』를 종로서원에서 발행했고, 1955년 단재유고출판회에서 『을지문덕』을 순 한글로 번역 출판한다. 1962년 신채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단재 신채호 전집』이 발행되었다.
(1888년 ~ 1954년)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예술인이다. 배우, 극작가, 소설가, 언론인, 영화감독, 연극 제작자, 영화 제작자 등을 다양한 직업을 겸했다. 본명은 윤교중(尹敎重)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소설인 『대도전(大盜傳)』을 발표하였다. 1922년에는 개량신파극단인 민중극단(民衆劇團)을 조직·주재했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창립동인으로서 신극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1888년 ~ 1954년)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예술인이다. 배우, 극작가, 소설가, 언론인, 영화감독, 연극 제작자, 영화 제작자 등을 다양한 직업을 겸했다. 본명은 윤교중(尹敎重)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소설인 『대도전(大盜傳)』을 발표하였다. 1922년에는 개량신파극단인 민중극단(民衆劇團)을 조직·주재했고, 1931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창립동인으로서 신극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한편 야담사(野談社)를 경영하여 월간지 [野談]을 발간하는 동시에 직업적 야담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는 연극인·언론인·영화인·작가·야담가 등의 다면적인 마스크를 지닌 인물로서 근세에 드문 개화 계몽가였다.
1897~1926. 평양 출생, 여성 성악가. 배우. 호는 수선水仙이며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으며, 강원도 원주와 횡성 춘천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 성악과 졸업. 1921년 동우회 등의 순회극단에 참가하면서 극작가 김우진과 친교를 맺음.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 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년 6월 귀국하자마... 1897~1926. 평양 출생, 여성 성악가. 배우. 호는 수선水仙이며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으며, 강원도 원주와 횡성 춘천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 성악과 졸업. 1921년 동우회 등의 순회극단에 참가하면서 극작가 김우진과 친교를 맺음.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 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년 6월 귀국하자마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어 성악가로 데뷔함. 이때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 프로에는 항상 윤심덕을 넣을 만큼 일약 스타가 됨. 그러나 정통음악을 가지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사 생활과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세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함. 한때 극단 토월회 주역 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하였으나 연기력이 없어서 실패함.
1926년 여동생 윤성덕의 유학길 배웅을 위하여 일본으로 가 닛토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8월 4일 새벽 4시 쓰시마섬을 지나던 중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 바다에 뛰어내려 스스로 이 땅에서 삶을 끝냄. 그녀가 불러서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날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음.
1911~1933. 함경남도 북청 출생, 언론인, 항일운동가, 소설가, 평론가. 1927년 4월 경성여상에 입학하여 재학 중 교장의 친인척 교사 채용, 한국인 교사의 부당 해임?학교 설비 미비라는 학교의 불법행위에 저항해 3차례 동맹휴교를 주도.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두 번이나 구류됨. 또한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후발적 성격을 지닌 1930년 서울여학생 만세운동을 이끎.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 1911~1933. 함경남도 북청 출생, 언론인, 항일운동가, 소설가, 평론가. 1927년 4월 경성여상에 입학하여 재학 중 교장의 친인척 교사 채용, 한국인 교사의 부당 해임?학교 설비 미비라는 학교의 불법행위에 저항해 3차례 동맹휴교를 주도.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두 번이나 구류됨. 또한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후발적 성격을 지닌 1930년 서울여학생 만세운동을 이끎.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어 2개월가량 투옥된 뒤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고 출소함.
1931년 4월 개벽사의 기자 제의를 받고 잡지 《신여성》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혜성》, 《별건곤》, 《어린이》 등의 개벽사 발간 잡지에도 글을 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공명하며 현실의 여성 차별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하는 기사를 씀. 발표한 소설로 <가두 연락의 첫날>, <공장 소식>, <젊은 어머니>, <신창 바닷가> 등이 있음. 여성 차별과 해방에 관한 많은 글을 썼음. 1933년 5월 31일 23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에서 장결핵으로 요절.
사후에 『송계월 전집. (전2권)』(2013)이 출판됨.
저 : 이육사 (李陸史, 이원록, 이활)
본명은 ‘원록’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했으나 독립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에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하였으며, 1937년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 본명은 ‘원록’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했으나 독립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에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하였으며, 1937년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1943년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 : 고유섭 (高裕燮, 우현(又玄))
우현(又玄) 고유섭은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서 미학·미술사를 전공했으며,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근대적인 방법론으로 학문화한 선구적인 학자였다. 그는 1925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1930년 이후 중요한 고대미술품들을 조사 연구하는 데 힘썼으며,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해 국내의 중요한 고대 미술품의 조사와... 우현(又玄) 고유섭은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서 미학·미술사를 전공했으며,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근대적인 방법론으로 학문화한 선구적인 학자였다. 그는 1925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1930년 이후 중요한 고대미술품들을 조사 연구하는 데 힘썼으며,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해 국내의 중요한 고대 미술품의 조사와 연구에 힘썼고 방대한 양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1944년 병으로 사망했다. 우리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준거(準據)를 세우고, 나아가 한국미술에 대한 학문적 궁구(窮究)를 통해 실질적인 한국미술사학 연구의 초석을 마련한 그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국미술의 등불 같은 존재이다. 그가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글들은 죽은 뒤 제자들에 의하여 『조선탑파(韓國塔婆)의 연구』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 『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 『한국미술문화사논총(韓國美術文化史論叢)』, 『송도의 고적』 등으로 간행되었다. 한국 미술사에서의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우현상(又玄賞)’을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저 : 문일평 (文一平, 본관:남평(南平), 호:호암(湖巖))
1888(고종 25)∼1936. 사학자·언론인.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호암(湖巖). 일평은 자(字)이다. 평안북도 의주출신. 천두(天斗)의 아들이다. 1905년 유학을 떠나 일본의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서 이광수(李光洙)와 같이 공부하였다. 1911년 정치학 연구를 목적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주로 상해(上海)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생활하였다. 중국... 1888(고종 25)∼1936. 사학자·언론인.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호암(湖巖). 일평은 자(字)이다. 평안북도 의주출신. 천두(天斗)의 아들이다. 1905년 유학을 떠나 일본의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서 이광수(李光洙)와 같이 공부하였다.

1911년 정치학 연구를 목적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주로 상해(上海)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생활하였다. 중국신문사 대공화보(大共和報)에 근무하면서 논설을 쓰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정인보(鄭寅普)와 함께 생활하면서 교학하였다. 역사 연구는 주로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일제의 우리 나라에 대한 정신적·내면적 침략이 갈수록 심화되어 국학 연구가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1888.5.15~1939.4.3 한국의 사학자 겸 언론인.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집필하였다.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한국의 문화』 등이 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03년 5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005년 6월에는 독립기념관에 그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1908~1950. 평양 출생, 나비 연구가, 생물학자, 곤충학자, 동물학자, 언어학자, 박물학자, 제주도 연구가. 1926년 개성 송도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 1930년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 교사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나비 연구에만 전념하여 나비 박사로 불림. 1943년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생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는 제주도의 곤충 연구... 1908~1950. 평양 출생, 나비 연구가, 생물학자, 곤충학자, 동물학자, 언어학자, 박물학자, 제주도 연구가. 1926년 개성 송도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 1930년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 교사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나비 연구에만 전념하여 나비 박사로 불림.
1943년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생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는 제주도의 곤충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제주도방언집』(1947), 『제주도관계문헌집』(1947),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제주도 인구론』(1949) 등을 출판함. 8·15광복과 더불어 수원농사시험장 병리곤충부장에 취임하였고 1946년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으로 재직하면서도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는데 그간에 제작된 귀중한 표본과 연구업적은 범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음. 100여 편의 나비 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흰배추나비의 변이곡선」은 특출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음. 1950년 10월 6일 술에 취한 군인들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함. 단국대학교에 석주선기념박물관이 있음.
유고로 『제주도곤충상』(1970), 『한국산접류의 연구』(1972), 『한국산접류분포도』(1973) 이외에 수필집 『(제주도 수필집) 제주도의 자연과 인문』(1968)과 『제주도자료집』(2008)을 남김.
저 : 김남천 (金南天, 본명:김효식(金孝植))
1911년 평남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다. 1930년 카프 도쿄 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1931년 호세이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하기도 하였... 1911년 평남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다. 1930년 카프 도쿄 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1931년 호세이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사건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혐의로 기소되어 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며,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 때도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935년 임화·김기진과 협의하여 카프가 경기도 경찰국에 해산계를 낼 때까지 조직에 충실하면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8·15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하여 좌익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중 1947년 말 경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까지 올랐으며, 한국전쟁 때는 조선인민군 종군 작가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대하』외에 연작소설인『경영』, 창작집『소년행』『삼일운동』『맥』등이 있으며, 1953년 휴전 직후 남로당계 박헌영 세력 제거와 관련해 ‘종파분자’로 지목되어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저 : 이태준 (李泰俊,, 상허尙虛)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가 그해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 1912년 모친마저 별세하자 철원의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1924년 퇴학하였다. 1924년 학교 신문 [휘문 2호]에 단편동화 「물고기 이야기」를 처음 발표했다. 1925년 문예지『조선문단』에 「오...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가 그해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 1912년 모친마저 별세하자 철원의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1924년 퇴학하였다.

1924년 학교 신문 [휘문 2호]에 단편동화 「물고기 이야기」를 처음 발표했다. 1925년 문예지『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신문·우유 배달 등을 하며 ‘공기만을 먹고사는’ 궁핍한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개벽』과 『조선중앙일보』의 기자, 『문장』지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박태원·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였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출간을 시작으로 『가마귀』, 『사상의 월야』, 장편소설 『해방전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0년대 전후에 아동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많은 동화들은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해방 후에는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등 조직에 참여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구인회’ 활동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어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저서로 단편소설집 『달밤』 『가마귀』 『복덕방』 『해방 전후』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수필집 『무서록』, 문장론 『문장강화』 『상허 문학독본』 등이 있다.
저 : 김구 (본명 김창수, 金九)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가난과 양반들의 횡포를 경험했기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대적 교육사업과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때 백정, 범부들(평범한 사람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백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가난과 양반들의 횡포를 경험했기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대적 교육사업과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때 백정, 범부들(평범한 사람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백범(白凡)이라는 호를 썼다. 3.1운동 후에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원하였고, 광복군 창설 등 항일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에 돌아온 그는 남북분단을 우려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힘쓰다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경교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지난날을 알리려 쓴 것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있다.
1881~1950. 부산 동래 출생. 정치인, 학자. 종교인. 호는 노은, 아호는 우사尤史. 6세 때 고아가 되어 북장로파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여 미국 로노크대학과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YMCA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 일본의 교회 탄압을 피해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화북과 몽골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함. 1918년 모스크바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 1881~1950. 부산 동래 출생. 정치인, 학자. 종교인. 호는 노은, 아호는 우사尤史. 6세 때 고아가 되어 북장로파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여 미국 로노크대학과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YMCA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 일본의 교회 탄압을 피해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화북과 몽골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함. 1918년 모스크바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함.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 입법의원 의장, 1947년 민족자주연맹 의장 역임. 교육가 활동은 상해 푸탄대학에서 영문학 강의(1923), 모교인 로노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취득(1923), 톈진북양대학의 생활(1927∼1929), 난징중앙정치학원 교수(1933), 쓰촨대학 강의(1936) 등과 같은 강단 생활을 하였으며,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어, 그해 12월 10일 만포진 근처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짐.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됨. 저서로 『엘리자베스시대의 연극입문』(1940), 『실용영문작법』(1944), 『실용영어』(1945), 그리고 시집으로 『양자강의 유혹』(1945) 등이 있음.
저 : 나혜석 (Na Hye-seok ,晶月 羅蕙錫)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와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15년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11월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12월 아버지가 사망하고, 애인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귀국하여 요양을 한다.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뒤 오빠 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를 시작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제2호에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H.S.'라는 필명으로 시 「광(光)」을 발표한다.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9월 [여자계]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한다.

1919년 3월 박인덕 한신준려 한황애 시덕한 김마리아 등과 3한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가서 자금 모금과 만세 운동 확산을 위해 이정자 한박충애와 만나 의논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다.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4월 첫딸을 낳고, 7월 [신가정] 창간호에 「규원」을 발표한다.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1922년 3월 여자 야학 설립을 주도한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한 「봄」, 「농가」가 입선한다.

1923년 1월 첫딸을 임신하여 낳고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육체적 변화를 솔직히 기록한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한다. 이후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한다. 1926년 4월 [조선문단]에 『원한』을 발표한다.

1927년 만주 안동현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동래 시집에서 지내다가, 6월 남편과 함께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스위스한벨기에한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남편이 베를린으로 간 사이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한다. 10월 천도교 도령(道令)으로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29년 귀국하여 9월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다. 1930년 김우영이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이혼한다.

이후 나혜석은 실의를 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여 계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32년 금강산 해금강에서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의의 화재로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충격을 크게 받는다. 1933년 생계와 그림 활동을 위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운영한다. 1934년 김우영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서술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 언론인으로 파격적인 작품과 사회 비판적 주장을 통해 봉건적 제도와 인습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다.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기며 가부장제 타파와 여성 의식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저 : 백신애 (박계화(朴啓華))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집과 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영천공립보통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하고, 경북사범학교 강습과를 나와 2년 동안 교사로 지냈다. 1926년 교사 시절, 북풍파인 ‘경성여자청년동맹’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여성운동을 한 것이 탄로 나 권고사직을 당하고 서울로 올라가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필명 박계화(朴啓華)로 「나의 어머니」를 발표하면서...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집과 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영천공립보통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하고, 경북사범학교 강습과를 나와 2년 동안 교사로 지냈다. 1926년 교사 시절, 북풍파인 ‘경성여자청년동맹’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여성운동을 한 것이 탄로 나 권고사직을 당하고 서울로 올라가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필명 박계화(朴啓華)로 「나의 어머니」를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신춘문예 첫 여성 작가라는 기록을 세웠다. 결혼 후 경산군 반야월의 과수원에 기거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 체험한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이 「복선이」(1934), 「채색교(彩色橋)」(1934), 「악부자(顎富者)」(1935), 「식인(食因)」(1936) 등의 바탕이 되었다. 식민지 조국을 떠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방황하는 실향민들을 그린 「꺼래이」(1934)와 현모양처의 삶을 살았음에도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의 심정을 담아낸 「광인수기」(1938)를 포함해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소설 20여 편과 수필 및 기행문 등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1939년 6월 23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으로는 『꺼래이』, 『채색교』, 『적빈』, 『악부자』, 『소독부』를 비롯해 소설 22편, 수필, 기행문 등 33편을 남겼으며 2008년 고향 영천에 문학비가 세워지고 ‘백신애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저 : 한용운 (韓龍雲, 만해, 한유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저 : 박인환 (Park In-hwan,朴寅煥,)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斷層)을 낭독하고, 이를 예술의 밤 낭독시집인 『순수시선』(1946)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48년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신시론』 발간했다.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했으며, 동인그룹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등과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거리」「남품」「지하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고, 1949년엔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0년 [경향신문] 입사 후 6·25 동란이 일어나자,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부산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1952년 존 스타인벡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 번역해서 간행하였으며, 6월 16일「주간국제」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발표했다. 1954년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규동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하였다. 1955년 시작품 『목마와 숙녀』(시작), 『박인환 시선집』, 『선시집』을 간행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시작품 「세월이 가면」 이진섭 작곡으로 널리 불리다 3월 20일 오후 9시 심장마비로 31세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 타계해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59년 3주기를 맞아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 번역해서 간행되었으며, 그가 사망한지 20년 후인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혼란한 정국과 전쟁 등의 당대 상황에서 적지 않은 총 173편의 작품을 남기고 타계한 박인환 시인은,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다. 전쟁의 충격에 함몰되지 않고 시인다운 세계 인식을 가지려 노력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황폐한 시대를 새로운 시 형식으로 반영한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미학과 역사성이 결합하는 접점을 확인시켜 준다.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 오른 바 있다. 수상식에 참석한 김사량은 조선의 작가로서 민족에 관한 글을 쓰는 데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민족의 현실을 진솔하게 써 나가겠다고 다짐한다.김사량은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본 문단에 등장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빛 속에』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민족의 정체성을 고심하며 민족 해방에 대한 관심과 어두운 식민지 현실...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 오른 바 있다. 수상식에 참석한 김사량은 조선의 작가로서 민족에 관한 글을 쓰는 데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민족의 현실을 진솔하게 써 나가겠다고 다짐한다.김사량은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본 문단에 등장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빛 속에』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민족의 정체성을 고심하며 민족 해방에 대한 관심과 어두운 식민지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일본 제국주의는 답답한 것이었고 마침내 중국 연안으로 망명한다. 『노마만리』를 보면 망명 당시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에게 ‘노마만리’는 시시각각으로 조여드는 신변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여 창작의 자율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항일 투쟁에 동참하는 길이었다.해방 이후, 조선의용군 본부 선발대로 귀국한 그는 북한에 머무르며 창작 활동을 펼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전선에 나섰다. 1950년 10월 원주 부근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김사량은 남북한의 문학사에서 그리고 재일 조선인 문학에서 대단히 문제적인 작가다. 재일 조선인 문학에서는 그가 아쿠타가와상 후보 작가에 오르면서 재일 조선인 작가로서 명망을 얻은 만큼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맥락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남한에서 김사량의 문학은 식민지 말기 이중언어의 글쓰기, 또는 친일 문제와 관련해서 논의되었다. 북한에서 김사량의 문학은 1950년대 초반 연안파의 숙청과 함께 그 이름이 사라졌다가 1987년 복권된 것으로 보인다. 북에서 그는 사회주의 건설기에 활약한 양심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되고 있다.
1876~1914. 황해도 봉산 출생. 국어학자.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백천白泉.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9월 배재학당에 입학. 도중에 탁지부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인천부 관립이운학교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이 됨. 순한글 신문제작에 종사하게 되자, ... 1876~1914. 황해도 봉산 출생. 국어학자.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백천白泉.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9월 배재학당에 입학. 도중에 탁지부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인천부 관립이운학교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이 됨. 순한글 신문제작에 종사하게 되자, 그 표기 통일을 해결하기 위한 국문동식회를 조직하여 그 연구에 진력함. 동시에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영국 선교사 스크랜턴의 한어교사, 상동청년학원 강사를 지내면서 1900년 6월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 신학문에 대한 지식 열정으로 야간에 흥화학교 양지과를 마치고, 정리사에서는 수물학을 3년간 하여 34세가 되도록 공부함. 명신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등의 강사 활동과 배재학당협성회 전적과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 등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함.
국어운동 활동으로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임.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음.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음. 새 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어문혁명을 일으킴.
1914년 7월 27일 별세.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함. 1991년 10월 문화부 주관 이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됨.
저서로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등과,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과 『월남망국사』(1907)가 있음.
1888~1943. 경남 김해 출생, 한글학자, 사학자, 독립운동가, 호는 한뫼, 환산桓山. 대구 계성학교 졸업 및 북경대학 사학과 중퇴.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대구 계성학교에서 고등과정을 배우면서 우리 말과 글 ?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됨. 1913년 마산 창신학교, 마산의신여학교에서 우리말과 국사를 가르침. 이때 주시경 선생의 학문을 스스로 배우며 한글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함. 1919년... 1888~1943. 경남 김해 출생, 한글학자, 사학자, 독립운동가, 호는 한뫼, 환산桓山. 대구 계성학교 졸업 및 북경대학 사학과 중퇴.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대구 계성학교에서 고등과정을 배우면서 우리 말과 글 ?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됨. 1913년 마산 창신학교, 마산의신여학교에서 우리말과 국사를 가르침. 이때 주시경 선생의 학문을 스스로 배우며 한글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함. 1919년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 재직 중 영변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름. 1921년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신채호 선생의 도움으로 북경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역사를 배우고 1924년 귀국함. 귀국 후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협성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음. 1927년 계명구락부에서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참가하고, 민족정신의 보전·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 발행함. 1929년 조선어연구회,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활동. 1931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이때부터 4년간 매년 여름 지방을 순회하며 한글강습회를 개최.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 창립에 참여함. 1935년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편찬전임집필위원으로 활동함.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체포되어 이듬해 8월 15일에 기소되어 1년여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함.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일제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43년 12월 8일 56세의 나이로 순국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함. 1991년 김해도서관 광장에 이윤재 선생을 기리기 위한 흉상과 어록비가 세워짐. 2005년 김해 외동의 나비공원에 기념 조형물이, 2016년 옮긴 묘비 비석이 세워짐. 2021년 11월 9일 이윤재와 허웅을 기리는 김해 한글박물관이 세워짐.
저서로 『문예독본.상하』(1932)이 사후에 『도강록渡江錄』(1946), 『표준조선말사전』(1947), 『표준한글사전』(1953)이 있음.
호는 청람(靑嵐).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을 비롯해 『중등조선어사전』,『표준가나다사전』, 『최신판 표준국어사전』,『순전한 우리말사전』 등을 펴낸 사전 편찬인.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학회 표준말 수정위원을 지냈다. 1917년 동양대학 윤리교육과에 입학했다. 재학 당시 사전도 없는 민족이라는 수치심에 우리말 어휘를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동경 유학생으로 조직된 문원사(文園社)... 호는 청람(靑嵐).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을 비롯해 『중등조선어사전』,『표준가나다사전』, 『최신판 표준국어사전』,『순전한 우리말사전』 등을 펴낸 사전 편찬인.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학회 표준말 수정위원을 지냈다. 1917년 동양대학 윤리교육과에 입학했다. 재학 당시 사전도 없는 민족이라는 수치심에 우리말 어휘를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동경 유학생으로 조직된 문원사(文園社)에서 방정환 등과 민족 각성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졸업 후 배재고등보통학교, 근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어휘 수집을 계속했다. 1928년에 학교를 사직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 문세영은 1938년 7월 10일, 사전 편찬을 결심한 지 22년 만에 8만 7천여 어휘의 『조선어사전』을 발행한다.
1903~1952. 경기도 파주 출생.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호는 석인石人.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같은 해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됨. 192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우스터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함. 1931년 귀국하여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에 복직했고 1941년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위원에 임명됨.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을 선... 1903~1952. 경기도 파주 출생.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호는 석인石人.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같은 해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됨. 192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우스터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함. 1931년 귀국하여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에 복직했고 1941년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위원에 임명됨.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함.
광복 이후 《큰사전》 편찬을 재개하면서 연희대학교, 중앙대학교 등에서 국어학 강의를 담당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했으며 1949년에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 2일에 파주에서 식량을 구하러 가던 도중에 군용 트럭 전복 사고로 별세함. 사후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됨.
‘정태진 묘’는 2001년 12월 21일 파주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고, 1997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8년 10월에 이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고, 고향인 파주시 금촌동에 정태진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정태진 기념사업회도 운영 중임.
저서로 『한자 안쓰기 문제』(1946), 『중등국어독본』(공저, 1946), 시가집 『아름다운 강산』(1946), 『고어독본』(1947), 『조선고어방언사전』(공저, 1948) 등이 있음.
189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호는 초성(焦星), 수산(水山)이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선구적 연극인이자 실험적인 극작가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극문학을 전공했다. 1920년대에 조명희, 홍해성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했고 1921년에는 동우회의 요청에 따라 극예술협회가 중심이 된 순회연극단을 주도, 던세이니의 「찬란한 문」을 번안·연출하며 국내 순회공연을 했다. 1926년, 자살로 생을 마감... 189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호는 초성(焦星), 수산(水山)이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선구적 연극인이자 실험적인 극작가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극문학을 전공했다. 1920년대에 조명희, 홍해성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했고 1921년에는 동우회의 요청에 따라 극예술협회가 중심이 된 순회연극단을 주도, 던세이니의 「찬란한 문」을 번안·연출하며 국내 순회공연을 했다. 1926년,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시 48편과 희곡 5편, 평론 20여 편을 썼다.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 「아관 계급문학과 비평가」 등의 글에서 서구 연극 운동을 소개하고 이를 우리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을 모색했다. 대표작으로는 「難破」, 「이영녀」, 「山돼지」 등이 있다. 1926년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 : 현진건 (玄鎭健, 빙허(憑虛))
호는 빙허(憑虛). 일제 당시 현실을 아이러니적 수법으로 고발하고 역사소설로 민족혼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소설가. 1900년 8월 8일 대구에서 대구 우체국장이었던 경운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호는 빙허(憑虛)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1912년 일본 세이조중학에 입학, 1915년 이순득과 혼인했다. 1918년에는 상하이에 있는 둘째 형을 찾아갔고, 그곳의 호강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귀국한다. 일본 도쿄... 호는 빙허(憑虛). 일제 당시 현실을 아이러니적 수법으로 고발하고 역사소설로 민족혼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소설가. 1900년 8월 8일 대구에서 대구 우체국장이었던 경운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호는 빙허(憑虛)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1912년 일본 세이조중학에 입학, 1915년 이순득과 혼인했다. 1918년에는 상하이에 있는 둘째 형을 찾아갔고, 그곳의 호강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귀국한다. 일본 도쿄[東京] 독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上海] 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개벽]에 단편소설 「희생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들어섰다. 이 작품은 신교육을 받은 두 남녀의 사랑이 봉건적인 관습 앞에 가로막히는 사연을 그렸다. 문단으로부터 그다지 긍정적인 평을 받지 못했으나 1921년 「빈처」를 발표하면서부터 작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현진건이 활동한 시대는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이자 일제 강점기였다. 그는 식민 지배 아래 핍박받는 우리 민족의 수난상과 사회 하층민의 빈곤의 참상을 폭로하고 고발했다. 현진건은 일제에 대한 끈질긴 저항과 강렬한 민족의식을 작품으로 표현한 작가로서, 서양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시대의 모순에 비판적인 의식을 유지했다.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일할 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보도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간 복역했다. 신문사를 떠나 양계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불우한 시기를 보낸다. 그 뒤 동아일보에 『무영탑』을 시작으로 장편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흑치상지』의 연재가 중단되고, 『조선의 얼골』 또한 금서처분을 받는 수난을 당했으며, 1943년 4월 25일 연재 중이던 마지막 작품 『선화공주』를 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술을 아니 마실 수 없게 만들었던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표작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과 장편 『적도』, 『무영탑』 등이 있다. 현진건은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적 한국단편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로,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된다.
1916~1950. 함경남도 원산 출생. 언론인. 부유한 한의사 집 맏아들로 태어났고 성품이 매우 신중하고 과묵했다고 함.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23세 때인 1938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합격하여 문과 별과에 합격한 송몽규와 동급생이 됨. 그때부터 세 사람은 기숙사 핀슨홀의 3층 지붕 밑 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음.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문과 동기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면서... 1916~1950. 함경남도 원산 출생. 언론인. 부유한 한의사 집 맏아들로 태어났고 성품이 매우 신중하고 과묵했다고 함.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23세 때인 1938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합격하여 문과 별과에 합격한 송몽규와 동급생이 됨. 그때부터 세 사람은 기숙사 핀슨홀의 3층 지붕 밑 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음.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문과 동기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면서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함. 문과 학생이었던 강처중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문학에 심취했는데 3학년 때인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부문에 지원했다가 낙방함. 연희전문 문과 학생회 ‘문우회’ 회장으로 활동함.
1932년 17세 때인 송도고보 시절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한글 보급과 문맹 타파에 헌신했음이 1932년 동아일보 기사[1932.7.8.]로 확인할 수 있음. 이듬해도 함경북도 덕원군의 책임 대원으로서 남녀 70여 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는데 당시 그의 보고 내용이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음[1933.8.12.].
1946년 10월 창간된 경향신문에 주간 정지용, 편집국장 염상섭 등이 포진한 가운데 조사 주임으로 창간작업에 참여함. 1947년 2월 윤동주 추모시집 출판작업 실무자로 참여하여 편집을 담당하고 1948년 1월 총 31편의 작품이 담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정음사에서 출판함. 이 시집에 발문跋文을 게재함. 언론인으로 살아서 많은 글을 남겼지만, 남로당원 사회주의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6·25 때 행방불명 되었기에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1947년 4월 27일 자 기사로 충무공 탄생 402주년을 기념하여 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기사만 찾아볼 수 있음.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친구로 나옴.
저 : 안창호 (安昌浩)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애국 계몽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호는 도산이다.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한학을 배웠으며,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구문물과 기독교 정신을 습득했다. 20살 때인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이듬해에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민권운동을 주도했으며, 1900년대 초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며 교포들의 계몽활동에도 힘썼...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애국 계몽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호는 도산이다.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한학을 배웠으며,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구문물과 기독교 정신을 습득했다. 20살 때인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이듬해에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민권운동을 주도했으며, 1900년대 초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며 교포들의 계몽활동에도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해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으로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했으며, 1937년에는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듬해인 1938년 3월 간경화증으로 생을 마감하며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다. 시신은 서울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에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 : 백석 (BAEK SEOK,白石,白奭,백기행)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저 : 임화 (林和, 임인식林仁植)
임화는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월북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필명으로 성아(星兒), 청로(靑爐), 김철우(金鐵友), 쌍수대인(雙樹臺人), 임다다(林DADA), 다임다(DA林DA) 등이 있다. 1908년 10월 13일 서울 낙산에서 태어나 1953년 8월 6일 북한에서 처형당했다. 십대 시절 보성고등보통학교 중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경성거리를 방랑했던 문학청년 임화는 스무 살 ... 임화는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월북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필명으로 성아(星兒), 청로(靑爐), 김철우(金鐵友), 쌍수대인(雙樹臺人), 임다다(林DADA), 다임다(DA林DA) 등이 있다. 1908년 10월 13일 서울 낙산에서 태어나 1953년 8월 6일 북한에서 처형당했다. 십대 시절 보성고등보통학교 중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경성거리를 방랑했던 문학청년 임화는 스무 살 때 영화 [유랑]과 [혼가]의 주연 배우로 활약했다. 수려한 외모로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리며 1929년 연기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난다. 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1932년 조선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통칭 카프의 지도자가 되어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 운동에 매진했다. 1938년 [해협의 로맨티시즘]이 포함된 첫 시집 《현해탄》을 출간하고, 2년 뒤 평론집 《문학의 논리》를 낸다. 해방 후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약했고, ‘조선의 레닌’ 박헌영을 열렬히 추종하여 1947년 월북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문화공작대로 남한에 들어오지만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하자 다시 북한으로 간다. 1953년 남로당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임화는 이해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복 음모와 미국의 고용 스파이 등의 죄목으로 처형당해 생을 마감했다.
시인, 영문학자, 대학 교수, 수필가, 번역문학가이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부드럽고 정서적이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대표작... 시인, 영문학자, 대학 교수, 수필가, 번역문학가이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부드럽고 정서적이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대표작으로 「논개」가 있다.
1962년 생. 출판기획자. 충북 청주 출생. 우리 한국현대시(詩)나눔활동가. 문장수집가. 여기저기 이것저것 세상의 온갖 것에 관심과 애정을 그만의 안테나로 수신하면서 발신(發信)하고 살고 있다. 20대에는 음악을 했(?)다가 국어교사로 살면서 방송 · 신문 · 글쓰기 · NIE · R&E 동아리로 특별활동을 인정받아 교육부총리상까지 20여개를 수상하고 덕분에 시드니 · 멜버른도 다녀왔다. 서울시교육청 제1기... 1962년 생. 출판기획자. 충북 청주 출생. 우리 한국현대시(詩)나눔활동가. 문장수집가. 여기저기 이것저것 세상의 온갖 것에 관심과 애정을 그만의 안테나로 수신하면서 발신(發信)하고 살고 있다. 20대에는 음악을 했(?)다가 국어교사로 살면서 방송 · 신문 · 글쓰기 · NIE · R&E 동아리로 특별활동을 인정받아 교육부총리상까지 20여개를 수상하고 덕분에 시드니 · 멜버른도 다녀왔다. 서울시교육청 제1기 진로진학상담교사 자격과 고려대입학사정관과정이수(2012), 성균관대입학사정관과정이수(2013) 등을 받으며 진로지도 및 대입지도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매주 수요일 우리한국현대시 3편 읽기 《우리시사랑모임》을 운영 및 ‘우리시읽기 나눔지’를 발행하여 2021년 1월 현재 2,667개의 한국현대시(詩)를 함께 읽었다. 우리시사랑 시집 11권을 발행했다. 문학전문 팟캐스트 《북적북적톡설》은 현재 ON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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