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fascism)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조직한 파시스트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적 이념, 20세기에 등장한 독재, 전체주의 체제나 운동을 총칭함"으로 정의한다. 전체주의나 독재의 특징은 정치경제와 사회문화적으로 '획일성'과 '일체성'을 강조하고 구현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즉 존재의 다름이나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파시즘은 경제체제와는 관련이 없다. 자본주의도 파시즘으로 구현할 수 있고 사회주의도 파시즘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의 반대는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파시즘은 20세기 내내 지구 상에 수 없이 등장했다. 이탈리아나 독일(히틀러) 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도 천황제를 덧씌운 파시즘이었고 2차 세계대전 후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도 파시즘 체제였다.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 중동의 왕국, 아프리카와 남미의 쿠테타 국가, 북한의 김일성 체제와 남한의 박정희, 전두환 체제도 파시즘이었다. 메카시즘이 불던 1950년대 당시의 미국도 파시즘 체제였다고 할 수 있고...
이 책은 지난 20세기 전세계에 불어닥쳤던 '물리적, 폭력적 파시즘'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나라의 경우도 폭력적, 물리적 파시즘은 외형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헌법과 제도가 파시즘을 제어하는 (불안정하기는 하지만)기능을 유지하고 있고 형식적,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는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들은 '파시즘'을 체제나 운동, 이념에 국한하지 않고 문화와 이데올로기까지 확장하려는 것이고 '파시즘'이 가능한 일종의 하부구조를 분석해 내려는 것이다. 과거 독일이나 이탈리아, 북한이나 남한을 생각해 보면, 파시즘 체제는 모든 것을 무력으로만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 이탈리아에서도 수백 만명이 나치즘과 파시즘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한반도 남북의 민중들도 마찬가지였다.
파시즘이 무서운 것은 그 폭력적인 내용이 상층에서 외형적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피지배 계층에서도 다양하게 의식, 무의식 속에 뿌리내리게 되는 현상이다. 파시즘이 개인 속에, 가족 속에, 각종 집단 속에, 문화 속에 자리잡으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바이러스처럼' 우리를 지속적으로 내면화되고 규정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한국의 경우에도 봉건왕조에서부터 20세기 후반 군사독재체제까지 수백, 수천 년간 이어져온 파시즘 체제가 지배층 뿐 아니라 피지배층의 머리와 몸 속의 유전자 속에 박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민중들이 파시즘 체제에서 살아온 것은 굴복하고 체념하는 양태가 크지만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편승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파시즘 체제가 유지되는 구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배층이나 소위 수구우익집단들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대안세력이라 할 수 있는 운동권이나 좌파세력들 중 많은 이들이 역시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지향적 말과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공공적 논의를 아예 사유화하려는 조짐까지 엿보인다(p.10)" 2000년 임지현씨의 이런 지적이 무려 12년이나 지난 2012년 5월에도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국의 파시즘은 안보와 국익과 효율과 편리와 시간을 내세운 획일화와 단순화와 전체주의를 의미한다. 주사파니 당권파니 반민주주의니 종북세력이니 하는 것은 이름만 바뀐 것 뿐이지 않을까? 구체적인 사실이나 근거, 사람과 행위를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00빠'니 '00주의'나 '00파'를 제시하는 것은 편리와 효율을 가장한 집단적인 낙인찍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틀린 말인가?
물론 저자가 지적하는 현상이 12년 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2000년 이후 활성화된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사이머 공간의 의사소통 역시 쌍방향적 민주적 의사소통의 방식보다는 언어와 논리의 폭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현실 정치공간의 논리를 그대로 재현해왔다. 즉 파시즘적 현상을 비판하는 논리 자체가 파시즘의 인식 지평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사회구조와 경제체제, 법과 제도, 정치제도와 사회운동 등 다양한 현상들의 물밑에서 우리의 일상과 의식을 옭아매고 있는 한국사회의 파시즘적 결이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변화는 어렵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라고 말한다. 나 역사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책은 그런 모습과 현실을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 규정한다. 임지현을 비롯한 권혁버! 김기중, 박노자, 김은실, 권인숙, 김근, 김진호, 전진삼, 문부식은 사회 구조 속에 도사리고 있는 반공주의 회로와 권력을, 전체저의적 법 질서의 토대로서 주민등록제도를,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를,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문화 논리와 가부장성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우리들의 언어 안의 파시즘을, 한국 교회의 승리주의 파시즘을, 파시즘의 증식로로서 한국 건축을 통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파시즘을 진단한다.
임지현은 일상적 파시즘의 재상산구조이 학교교육이 있다고 분석한다. 학교교육은 지배 권력의 요구에 따라 권력의 사회문화적 통제 원리를 담고 있을 뿐아니라 교실 내의 일상적 생활 속애서 은영중에 특정한 사회적 규범을 배우도록 한다. 그 규범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문제어, 지진으의 아름으로 타자화된다. 그는 체벌 금지를 전후해 나타난 '왕따' 현상을, '명령적 복종 단계를 벗어나 근대화돤 규율 권력이 학생들에게 강제하는 자발적 복종의 극단적 결과'라고 주장한다. 전교조에 대한 역대 정권의 과잉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1997년 서울대학교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타교생이나 졸엄생들의 도서관 출입을 막기위해 학생생증 바코드를 만들었던 것도 공공성 대산 생산성이 대학과 대학생을 지배하고 있는 특권의식일 것이다.
또한 그는 가족이기주의와 가부장주의, 부계 혈통주의, 민족지상주의는 서로 아어지면서 획일을 강요하는 강압적 동질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개인의 권리는 민족과 국가의 이르으로 무시되고 민족은 같은 혈통이라는 보호막 아래 추상적인 일반의지를 표명하는 획일적 실재로 파악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혼연일체의 민족이라는 신비적 모델로 대변되며, 그것은 독재권력을 정당화한다."
민주진보세력의 끝없는 내분과 분열상, 가족과 조직 내의 불협화음은 외부 이데올로기의 공세 뿐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생과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끝없는 성찰과 혁신'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결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꼭 일을 것을 권한다...
* 인상 깊은 문장 :
"파시즘의 유산은 우리 안에 넓고 깊숙이 잔존해 있다. 권력자만이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자들까지도 매료시키고 사로잡는 권력의 위력.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산해야 직성이 풀리는 물신주의. 살아 남기 위한 나날의 각박한 생존 경쟁. 승리자가 되지 않고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초조함과, 승리하면 모든 것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이 모든 것 속에 파시즘은 오늘도 살아 있다.(p.255)"
"이제 문제는 신체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저개발된 권력으로서의 군부 파시즘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더 이상 재발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 재발한다 해도 새삼 그 폐해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투명할 정도로 가시적이며, 따라서 타격지점도 명백하다. 문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 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규율, 교묘하게 일상과 정신을 조작하는 고도화되고 숨겨진 권력 장치로서의 파시즘이다. 나는 그것을 '일상적 파시즘'이라 부르겠다. 일상적 파시즘은 전체주의 체제로서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는 존재 양식을 달리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체제의 배후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전통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타성들, 설명하기 힘든 본능과 충돌들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테러'인 것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그러므로 잡식성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정이든 전제정이든 무엇과도 손쉽게 짝을 이룬다. 그것은 남과 북의 동질성을 확보해주는 연결고리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한반도의 속살이다."(p.30)
"후쿠야마의 비유이 의하면, 한국 사회는 말 안장 형의 사회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비대한 국가 기구와 혈연정 배타성에 사람들의 의식을 묶어두는 가족이 각각 큰 비중으로 사회의 위와 아래를 장악하는, 그렇기 때문에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시민 사회가 발전하지 못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국가 기구와 가족은 각각 위와 아래로 분절되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닿아 있다. 연고주의가 최소한의 관료적 합리성마저 밀어 내고 국가 기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민간 저우가 들어서면서, '소통령'이라는 독특한 용어가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 년 전에 폴란드의 한 외교관이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왜 한국의 신문들은 선거 관련 보도를 하면서, 각 당의 정강 정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허구한 날 몇몇 보스들의 이름만 거론하고 사람들의 계보만 그리냐고. 중앙의 정치가 그러하다면, 지방 정치에서는 종친회, 동문회, 향후회의 등장이 라장 중요한 예측 지표가 된다. 전통의 위력 앞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은 곧 힘을 잃는다.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사상 운동이나 시민 사회 운동을 억압해 왔던 한반도의 20세기가 낳은 기형아이다. 아념적 지향이나 공적 이해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집단 행위는 가문이나 동창회 또는 향후회의 형식을 빌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도하게 성장한 국가의 권력 기구가 위로부터 파시즘을 강제하는 정치적 기제라면, 확대된 가족주의 혹은 연고주의는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담보하는 견고한 문화적 기제이다. 가족이나 지역의 특수 이해를 넘어서 공적 이해를 추구하는 시민 운동의 부재는 결국 국가 권력에게 공공적 이해에 대한 해석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충'의 덕목을 강조하는 국가 권력은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보편적 이해라고 강변했다.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 또한 조국과 민족이라는 코드를 공유암으로써,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문제삼았을 뿐 국가 권력이라는 존재 자체가 정당한가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못했다. 조국과 민족이라는 추상의 헤게모니를 둘러 싼 국가 권력과 저항 운동의 투쟁 속에서,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은 관심의 뒷전으로 물러났고 규율 권력은 조용히 일상 생활 속에 침투했다. 그리고 끝내는 저항 운동 자체가 권력의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의 이 같은 특징은 '근대'를 보는 독특한 시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다양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으로 압축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동도서기론이라면,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사회주의 동도서기론이다. 양자의 공통점음 기술로서의 근대는 수용하지만, 해방으로서의 근대는 부정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의 성과들을 서구적인 것이라고 건너뛰었다면, 주체사상은 노동해방의 의미를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했다. 한국적 민주주의와 주체사상은 결국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동원하는 동원 이데올로기라는 특징을 공유했다. 동원 체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호응을 필요로 하였는데, 해방의 논리보다는 전통의 논리가 그러한 필요를 만족시켰다. 남과 북이 공히 학교 교육에서 '충'과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 것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영역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가부장주의 또는 부계 혈통두의와 결합함으로써 파시즘의 아비투스를 강화시킨다. 위로부터의 파시즘과 밑으로부터의 파시즘이 변증법적 자기발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가부장주의나 부계 형통주의는 자연스럽게 혈통적 민족관으로 이어진다. 사회 전체가 가족주의적 연계에 의지하는 한,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혈통적 민족관은 인간의 정체성이 자율적 의지가 아니라 출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출생에 의한 선험적 정체성은 사유하는 자아를 부정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민족에 속해 있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역사적 경험은 이 명제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라는 당일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파생된 이 명제는 이제 획일을 강요하는 강압적 동일성을 의미한다. 그 결과 개인의 권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무시되고, 민족은 같은 혈통이라는 보호막 아래 추상적인 일반 의지를 표명하는 획일적 실재로 파악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혼연 일체의 민족이라는 신비적 모델로 대변되며, 그것은 독재 권력을 정당화한다. 문제는 그것이 권력의 의지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가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집단 정서라는 점에 있다. 남과 북의 권력이 사용하는 담론 구조가 같은 것은 물론, 남한 운동의 담론도 같은 구조 속에 있다. 그 결과 남한의 운동은 남과 북의 정치권력 앞에서 이론적으로 무장해제 당했다."(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