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 성형 수술한 여자 - 로스트 프라임리브스」
나는 한 달에 한 번 대학에서 [영화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가 끝나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모르는 여자였다. 그 여자가 이름을 말하면서, 내가 두번째 감독한 작품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다고 했다. 그러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성형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성형 수술한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술이라도 한잔하자는 여자를 따라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전부, 얼굴을 전부, 열한 번, 수술했어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성형 수술을 하자 부모님이 울었다는 것, 결혼을 두 번이나 했지만 아이는 없다는 것, 지금은 한 남자의 세컨드로 살고 있다는 것, 내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는 것 등을. 술을 마신 후,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나와 그 여자는 저녁을 같이 먹었다. 나는 로스트 프라임리브스를 먹었다. 웨이터가 잘라준 짙은 핑크색 살코기를 입 안으로 넣었다. 입 저 안쪽의 점막을 아기의 혀가 애무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배어나온 육즙이 목을 자극하여 바르르 떨렸다. 그때 그 여자의 얼굴이 드디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여자와 했던 섹스도 생각이 났다.
호텔방에서 만진 그 여자의 엉덩이는 부드러웠다. 마치 아까 먹은 프라임리브스 같았다. 키스해달라는 여자의 말에 그녀의 두 볼을 손으로 감쌌을 때 피부 아래쪽 살이 움직였다. 마치 달걀을 찌부러뜨리는 감촉이었다. 여자는 볼에 넣은 실리콘이 때로 비틀어진다며 볼을 이리저리 만졌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의 볼에 들어 있는 실리콘을 움직여보았다. 아마도 그 실리콘은 프라임리브스의 내용물처럼, 이미 육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아름다워졌다고 여자는 믿고 있다. 짙은 핑크색 살코기가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낡은 트렁크에 얽힌 로맨티시즘 - 바닷가재 요리」
비행기 시간을 착각하여 출발 다섯 시간 전에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고 말았다. 파리에서 영화관계자들의 심포지엄이 있어서 나는 파리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이른 아침시간, 사람도 거의 없는 공항 로비에서 투덜대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둥근 얼굴의 여자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어디 가세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파리에 간다는 내 대답에 그녀는 왠지 반가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는 의자 곁에 둔 가죽 트렁크를 가리키며, 잠시만 봐달라고 하고는 화장실과 레스토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녀는 한 시간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나는 그 트렁크를 내 옆으로 당겼다. 트렁크는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고, 트렁크 밑에는 작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 트렁크를 센 강에 버려주세요. 트렁크에는 위험한 물건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비었습니다. 가능하다면 퐁네프라는 다리 위에서 버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힘을 발휘한 것인지, 나는 그 기묘한 부탁을 무시해버리지 못했다. 샤를 드골 공항에 마중나온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고, 지금 파리는 테러소동으로 경비가 삼엄하다며, 센 강에 그걸 버리다가 들키면 당장에 체포될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도 무시해버리고, 호텔로 가지고 갔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나는 그 친구와 그의 걸 프렌드 스웨덴 아가씨와 셋이서 바닷가재를 먹으러 갔다. 우리는 삶은 가재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처음 한 입에 흥분하였고, 아름다운 껍질을 깨는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친구는 바닷가재를 모르는 것은 세계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까지 말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호텔로 돌아오자 어두컴컴한 조명 속에서 낡은 트렁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치 테러리스트처럼 긴장하면서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센 강으로 가, 트렁크를 던져 넣었다.
일주일 후, 공항에 전송 나온 친구에게 트렁크를 버렸다고 말했다. 아마도 트렁크는, 얼굴이 동그란 그 여자의 아버지 아니면 할아버지의 것이고, 최근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나는 제멋대로 상상해보았다. 그는 화가 지망생이었고, 퐁네프를 주로 그렸지만, 화가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등등. 친구는 나의 이런 상상을 듣고, 그런 로맨티시즘을 빨리 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없어, 하고 웃었지만, 트렁크의 주인이 겨울 가재를 먹어보지 못했을 거라는 내 의견에 대해서만은 동의해주었다.
「어머니의 수프 - 수프」
스페인의 리조트지에 산재한 많은 별장을 비디오 테이프에 담은 다음, 나와 디자이너 둘만 오스트리아 빈에 들렀다. 빈에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바와 나이트클럽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능숙하게 일본어를 하는 가이드와 함께였다. 그녀는 중년의 헝가리 여성이었다. 차가운 돌이 깔린, 빈의 포도를 걸어 우리는 이 가게 저 가게를 구경하고 다녔다. 취재하기 전에 저녁을 먹으면서 술이 들어가자, 여자 가이드는 말이 많아졌다. 헝가리 동란, 소비에트, 망명, 미국인과 한 번 결혼한 경력, 도쿄에서 조지 대학에 다닌 일, 현재는 빈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 등.
다날 바덴에서 온천을 즐기고 빈의 숲을 산책하기로 했다. 바덴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요리 얘기가 나왔고,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 뭐였는지 한 사람씩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나는 교토의 자라라고 주장했지만, 디자이너도 여자 가이드도 자라를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뒤이어 디자이너가 말했다. 학생시절, 친구와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캘리포니아 사막을 달린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레스토랑에서 생굴을 먹었다가 배탈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친구가 사과를 사주었고 디자이너가 갈아달라고 하자, 친구가 거칠거칠한 콘크리트 조각을 깨끗이 씻어서 거기에다 사과를 갈아주었는데 너무 맛있었다고 했다. 그때의 사과가 디자이너에게는 최고의 요리였다고.
마지막으로 여자 가이드가 역시 수프예요, 라고 말했다. 따뜻한 수프, 마음까지 녹여버리는 수프. 하지만 맛있는 수프는 좀 두렵다고 했다. 옛날에 부다페스트에 돌아갔을 때 옛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망명하고 싶어했는데 못했고, 자신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심경이 복잡해졌다고.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수프를 먹고, 너무 따뜻하고 맛있어서, 그만 친구의 일을, 그 친구의 고민, 고뇌를 모두 잊어버렸다고. 그래서 맛있는 수프가 두렵다고 했다. 우리는 빈의 숲속에 있는 호텔에서 헝가리 요리를 먹었다. 허브와 마늘과 달걀로 만든 수프를 먹으면서 내가, 이 수프도 좀 무서워, 라고 중얼거리자 세 사람이 동시에 웃었고, 다음 순간, 웃음을 멈추었다.
친구, 가족, 애인, 수프가 누구의 고뇌를 잊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