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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9년 03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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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44쪽 | 212g | 128*188*12mm |
ISBN13 | 9788972979333 |
ISBN10 | 8972979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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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너머로 나아가는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상상
-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스티브 잡이나, 빌 게이츠 같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기업을 세우면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갖게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런 특별한 사람들이 없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직장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로 이 생각을 바꿔서 표현해도 좋다. ‘낙수 효과’라는 경제 이론에 나와 있는바 그대로, 상류층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돈을 써야 하류층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다는 이 사회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2008~2009년에 닥친 미국의 금융 위기에서 정작 돈을 번 사람들은 경제를 파탄 직전으로 내몬 엘리트들이라고 이야기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융 위기에 내몰려 하나뿐인 집을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돈이 많은 상류층은 돈을 잃기는커녕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낙수 효과의 반대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사회에서 점점 심화되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예로 들며 부자들은 이제 어떻게든 가난한 사람들과 더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는 사회를 희망한다고 선언한다.
미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자본주의를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한국의 자본주의 역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20대 80 사회는 저 너머로 가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0.1퍼센트의 상류층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나머지 99.9퍼센트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0.1퍼센트가 만든 성채로 들어갈 수 없다. 지은이는 상류와 하류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우리 삶의 궤적을 일으키는 요소로 다음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운명’이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면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낼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품성’이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보다 나은 품성을 기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부자 집안에 태어났다고 품성이 좋은 게 아니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품성이 나쁜 게 아니다. 품성은 운명보다 선택의 여지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품성은 정말로 우리가 선택하는 바에 따라 길러질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운명’이 정해놓은 ‘실제적’ 선택지의 범위는 그 현실성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대개는 그 대조가 아주 뚜렷하다. 어떤 선택지는 다른 선택지에 비해 사실상 더 안전하고 덜 위험하면서 매력적이거나 혹은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실제로 선택하고 따르기에도 더 쉽거나 최소한 쉬워 보인다. 따라서 그런 선택지들은 오늘날 인기가 없고 권유하기 곤란한 것으로 치부되는 다른 선택지들에 비해 선택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인기 없는 선택지들은 시간과 노력과 희생을 더 많이 요구하거나 사람들의 비난을 사거나 체면을 잃는 위험을 초래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혹을 산다(대부분의 경우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선택지들이 선택될 확률 분포 또한 ‘운명’의 영역에 속하는 셈이다. 어쨌든 우리는 ‘구조화된’ 사회 환경에서 살아가는바, ‘구조화’는 바로 확률의 조작으로 이루어진다. (43쪽)
지은이는 ‘구조화된’ 사회 환경을 말하고 있다. 아무리 곧은 품성을 지니고 태어나도 우리는 사회구조라는 환경을 벗어날 수 없다. 스스로 사회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지 않는 한(이를테면 종교세계), 우리는 사회구조가 만든 규범을 내면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돌려 말하면, 우리는 어떤 집안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이미 미래가 결정된 선택을 하는지도 모른다. 삼성그룹에 태어난 사람들은 삼성가 고유의 교육을 받으며 사업가로 성장할 것이다. 그들은 상류층의 예법에 맞는 엘리트 교육을 받는다. 상류층의 예법은 일반 사람들과는 완연히 다르다. 돈을 쓰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는 상류층 특유의 생활 태도가 묻어 있다. 수십 억, 수백억을 예사로 다루는 사람들이 아닌가. 뱁새가 황새를 쫓다가는 정말로 가랑이가 찢어지는 상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늘 벌어진다. 사람들은 상류층을 꿈꾸지만, 상류층은 언제나 일반 사람들이 다가올 수 없는 하늘나라에 자기들만의 굳건한 성채를 세우고 있다. 일반인들은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운명’ 속에서 무언가를 선택당하는 상황에 빠져 있는 셈이다.
책 제목에 나타나는 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불평등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살고 있다. 불평등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상류층으로 올라서야 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그리로 올라가는 길은 예전에 막혀버린 지 오래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상류층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에 맞는 선택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우리는 대개 일반적인 교육을 받고 대학을 졸업한 후 ‘무한 경쟁’을 거쳐 좋은/별로인 회사에 취직한다. 무한 경쟁을 이긴 사람들만이 수십 년이 흘러 ‘이사’와 같은 고위직에 앉을 수 있다. 하지만 재벌가 아들딸로 태어난 사람들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기업 고위직에 올라 권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이 겪는 무한 경쟁의 바깥 지대에 있다. 상류층의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 이 상황을 그러나 우리는 그저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재벌의 아들딸로 태어나지 못한 제 운명을 한탄하며, 우리는 어떻게든 남아 있는 파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몸을 소진시키며 열심히 일을 한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사회구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전제들을 다음 네 가지로 제시한다. “① 경제성장은 공동생활에서 생기기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② 영구적으로 증가하는 소비,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품목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③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④ 경쟁(가치 있는 사람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질서 재생산과 사회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54~55쪽) 네 가지 전제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경제성장은 영구적인 소비에 바탕을 둔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자본주의 사회를 이끄는 두 동력이다.
영구적인 소비를 하려면 자본이 풍부해야 한다. ‘소비자’라고 해도 같은 소비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자본은 더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을 찬양한다. 더 많이 소비하려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행 자본주의는 부자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논리로 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보다 부자들을 선호하는 사상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나아간다. 자본의 논리는 정확히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한 길을 따른다. 생산된 물건이 자본으로 순환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자본가만 망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소멸될 것이다. 생산된 물건은 어떻게든 팔려야 한다. 그러려면 물건을 사는 소비자가 끊임없이 생산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꽃은 광고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광고는 상품이라는 얼굴을 짙은 화장으로 도배한다. 물건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소비자’로서 대접을 받는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에 나타나듯, 오로지 쇼핑하는 사람만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가 자본주의이다.
영구적인 소비는 영구적인 생산을 전제한다. 소비를 하려면 일단 물건이 생산되어야 한다. 영구적인 생산과 소비가 반복될수록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들은 쇼핑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구조가 쇼핑이 곧 행복이라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킨다. 돈이 없는 사람은 불쌍하고, 돈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는 논리를 마음 깊이 새긴 사람들은 ‘돈’을 언제나 삶의 중심에 놓는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한다. 그들은 한정된 돈=물질을 놓고 무한 경쟁을 한다. 자신이 가진 돈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가진 돈과 비교된다. 비교에서 상대적으로 밀리면 그들은 더욱 더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된다. 상류층이라고 다르지 않고, 하류층이라고 다르지 않다. 다만 돈의 액수가 다를 뿐이다. 돈을 놓고 돈을 먹는 금융 자본주의는 그러한 무한 경쟁이 이른 지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금융 자본주의(자)는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돈의 위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컴퓨터 모니터에 비치는 숫자를 헤아리며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돈을 번다. 자본이 가는 길에는 이제 인간이 머물 장소가 없다.
간단히 말해, 주체와 객체 혹은 생각하는 인간과 사물 간의 간극은 주체의 의도와 목적 때문에 좁혀질 수 없다. 이때 ‘좁혀질 수 없다’는 생각, 다시 말해 지위들 간의 대립은 돌이킬 수 없으며 지위들의 관계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칭적이라는 생각은, 작동 중인 권력에 대한 일반적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즉 우월함과 종속, 명령과 복종, 행동의 자유와 필연적인 순종의 경험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체-객체 관계에 대한 서술은 ‘권력’ ‘통치’ 혹은 ‘지배’에 대한 서술과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사물들이 정의되고 분류되고 평가되고 취급되는 방식은 주체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고 주체의 편의에 따라 조정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곤 한다. 본래 수동적이고 감각이 없고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물들은 본래 능동적이고 지각과 판단을 주체들에 봉사하기 위해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언제든, 어디서든,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사물들은 바로 그런 조건에서만 ‘사물’이다. 그것들은 고유의 ‘물적thingy’ 성질들 때문이 아니라 주체에게 선택되는 관계 때문에 ‘사물들’인 것이고,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주체다. 대상에 ‘사물’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사물들이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잡아놓는 것도 주체다. 이렇듯 사물의 지위는 대상들의 결정권과 선택권, 결정 능력과 선택 능력을 부정함으로써, 즉 선호를 표현하고 그에 대한 인정을 요구할 대상들의 권리와 능력을 부정함으로써, 또는 그런 권리 그리고/혹은 능력을 박탈해버림으로써 부여된다. (114~115쪽)
자본은 오래 전에 ‘생각하는 인간’이 되었다. 자본이 인간이 되면 ‘인간’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사물이 된다. 사물은 주체성이 없다. 사물은 언제나 생각하는 인간의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근대 인식론이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인간이 들어섰던 주체의 자리에 이제는 자본이 들어섰다. 그리고 인간은 제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했던 자리에서 의미를 강요당하는 사물 자리로 쫓겨났다. 사물화된 인간을 자본은 유용성으로 판단한다. 쓸모가 있으면 살아남고, 쓸모가 없으면 폐기된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사랑(에로스)’가 사라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언제나 사물화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무한 경쟁의 도구인 인간들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에로스는 ‘나와 너’라는 관계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너’는 주체성이 없는 사물이 아니라 주체성을 지닌 또 다른 ‘나’이다. ‘나’가 선택할 수 있는 걸 ‘너’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은이 말대로라면 ‘공생(共生)’ 관계를 통해 펼쳐지는 게 에로스라는 감정인 셈이다.
‘소비자’라는 말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소비자는 소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소비하는 사람만이 소비자라는 말이겠다. 소비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러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소비를 한다고 해도 더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 더 적게 소비하는 사람보다 찬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본은 더 많이 소비하는 사람을 우대한다. 소비는 언제나 돈과 연결된다. 돈이 있어야 소비를 더 많이 할 수 있다. 결국 ‘소비자’라는 말에는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의 통념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소비자라는 말에는 주체성을 지닌 인간의 모습이 없다. 자본은 사람들을 소비자로 호명함으로써 자본에 길들여지는 ‘사물’로 만들려고 한다. 소비자가 주체성을 지니면 이런저런 ‘트집(?)’을 잡을 테니 자본만 괴롭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로 자본은 소비자를 우대하는 척하지만, 실상 왕인 소비자들은 자본의 논리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청맹과니일 뿐이다.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사랑을 소비자와 물건의 관계에 비유하고 있다. 소비자는 돈만 있으면 어떤 물건이든 구입할 수 있다. 그들은 처음 구입했을 때는 애지중지하며 물건을 다루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다른 물건을 탐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은 끊임없이 물건을 바꾸기 위해 쇼핑을 한다.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이 펼치는 사랑은 이러한 물건 바꾸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를 물건으로 생각하면 폐기하기가 쉽다. 지은이는 이러한 사랑의 반대편에 공생으로서 사랑=에로스를 배치한다. 공생으로서 사랑에서는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된다. 여기서 ‘너’는 함부로 폐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나’의 생각이 중요하면 ‘너’의 생각도 중요하다. 두 명의 자율적인 주체가 만나야 공생하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넘어서는 대안으로 지은이가 공생=사랑을 제시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랑’은 자본이 가는 길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을 선택할 때만 에로스가 넘치는 사회가 구현될 수 있다. 지극히 어려운 이 사회 실험에 우리도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해보면 어떨까?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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