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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0년 05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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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14쪽 | 153*224*20mm |
ISBN13 | 9788931001143 |
ISBN10 | 893100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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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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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현대인은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때론 관계 속에서 고독함을 느낀다. 이런 우리에게 가장 큰 결핍이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닐까?
경제적 능력과 외모와 같이 보여지는 이미지가 중요한 매력의 조건이 되는 요즘,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순수하고 낭만적인 생각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외모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등 자기개발에 열과 성을 다하는데 왜 사랑은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는가.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 서두에서,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언급한다.
우리가 사랑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사랑을 시작할 경우 결국은 실패로 가는 길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기술을 습득하는 것처럼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기술이란 실용적인 연애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라 할 수 있는 전반적인 사랑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 다룬다.
먼저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까지 사랑의 다양한 대상을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특히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프롬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을 빌려 요약한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88~89p
또한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이 붕괴되는 원인으로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문제 삼는다. 기업에서 조직화된 노동력으로 개인은 개성을 잃고 기계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며 자신과 동료, 가족들에게서 소외된다.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은 소비함으로서 만족감을 느낀다. 삶을 즐긴다는 명목 하에 사랑도 소비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프롬은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론을 분석하고 현대 서구사회에서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변화들을 추적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는 사랑의 실천에 관해 다루며 사랑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전체적인 인격을 발달시키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생산적인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라고 말한다.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인 경험’에만 인간의 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이와 같이 경험되는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거기에 조화, 갈등, 기쁨, 슬픔 중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에센스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요.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 되는 것이다.”138~139p
사실 사랑의 기술에는 놀랍고 새로운 사실은 없다.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그저 내면 깊이 잠들어 깨어나지 못한 내용들을 다시 일깨워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타인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거다.
누군가와 성숙하고 깊이 있는 관계를 맺고 싶다면 먼저 나 자신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만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혼자가 되었을 때 부단히도 홀로서기 위한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고3 수능이 끝나고 논술 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우리반을 담당하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들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 있잖아. 이름만 보고 속으면 안돼. 사랑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사랑의 의미에 대해 쓰고 있는 책이니까 말야. 너희도 대학에 들어가면 꼭 읽어봐라."
나는 선생님의 말을 반만 들었다. 대학교에 들어간 직후 나는 책 제목에 속아 '사랑의 기술'을 사는 우를 범하지 않고 정말로 사랑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연애 서적들을 샀다. 이성과 첫 만남에서 해야하는 대화, 자리를 정하는 방법, 번호는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문자는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등등등,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애의 고수들에게서 연애의 스킬을 들었다.
그 책들은 예상대로 유익했다. 나는 다른 동기들이 열심히 미팅, 소개팅에 나갈 무렵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우린 제법 알콩달콩한 모습으로 예쁘장한 사랑을 나누었다. 제법 즐거웠고 제법 행복했다. 눈부신 대학의 캠퍼스, 그리고 그 안에서의 핑크빛 사랑 이야기. 정말 딱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리던 모습이었다.
대학도 내가 원하는 대학으로 왔고, 내가 원했던 대로 자취생의 로망도 한껏 누릴 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다양한 활동에 참가할 수 있었고 내가 원했던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대로 술집에서 당당하게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원했던 대로 서울 곳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그토록이나 바랬던 대로 나는 연애를 하게 되었지 않은가!
아주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원했던 그 모습이 되었는데도, 어렴풋이 내 마음 속에 남아있던 허무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대학에 가면 해결되겠지. 예쁜 사랑을 하면 해결될거야.'라고 허무를 유예해왔던터라 내가 원했던 행복한 상황이 만들어지자 허무는 더욱 커져버렸다.
사람을, 사랑을, 나를 믿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항상 상처투성이었고 내 주위에는 항상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젊음은 상처조차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주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다.
에리히 프롬은 책의 서두에서 사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우리가 훈련을 통해 길러나가는 기술임을 강조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울 뿐 사랑이 어려운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기술인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나는 에리히 프롬의 처음 두 문장 ㅡ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ㅡ 만 읽고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응, 맞아요, 맞아.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되어요. 그러니까 알려주세요. 어떻게하면 사랑할 수 있을지, 아니 무엇이 사랑인지.
에리히 프롬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그 중심에는 언제나 '불안'과 '사랑'이 있다. 인간은 이성을 갖춤으로써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인류 전체적으로 보든, 개인적으로 보든 말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미래는 '죽음'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없고 모든 불안은 여기에서부터 나온다. 권력, 종교, 사치, 금욕, 예술, 사랑도 결국은 이 불안에 대한 서로 다른 해법들이라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다.
이 중에서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완전한 해법은 '사랑' 뿐이다. 다른 사람과 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를 알게 되고 그/녀를 알게 된다. 이를 통해 나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인류를 사랑하게 된다. 다른 해법들은 자기 자신이 똑바로 세상과 마주하는 걸 거부한 채 절대적 존재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떠넘겨버린다. (국가주의, 종교적 맹신, 황금만능주의 등등) 이는 마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모습으로 비유될 수 있는데, 그와는 달리 사랑은 개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 해준다.
프롬의 말을 듣다보니 대학에 다니던 시절 내가 왜 허무했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아서였다. 많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지냈지만, 무려 연애도 했었지만 나는 나의 핵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질 못했다. (엄밀히 말해서 무엇이 나의 핵심인지를 알지 못했다.) 연애 서적은 나에게 어떤 것이 사랑의 행동인지를 알려주었지만 사랑의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느끼게 해주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상대에게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에, 상대가 나에게 사랑의 행동을 보이는 것에 도취되어 잠깐의 행복을 느꼈을 뿐,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어 그녀를 사랑하지 못했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에리히 프롬의 책을 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논술학원 선생님의 말대로 입학하자마자 '사랑의 기술'을 읽었더라면? 프롬은 "실존의 문제는 각자에 의해 스스로의 힘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고 남이 대신 해결해줄 수 없"다고 말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책을 일찍 접했다면 조금 덜 아픈 상태에서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가장 큰 상처를 줬던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 곳곳에 적어두었던 메모와 함께 그녀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어야지.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어야겠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해. 이제는, 너를 사랑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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