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국제금융시스템을 만들어낸 자들이 집이나 고층 건물을 지었더라면, 그들은 엄청난 부실공사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끌려나왔을 것이다. 그들이 지은 건물의 사면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런 경우에 항상 그렇듯이, 떨어져 내리는 벽돌에 깔려 죽는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로서, 이들의 유일한 잘못은 당시 그 밑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부(富)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지고의 가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부라는 것이 먹고사는 일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을 의미하든, 한때 매초마다 100불씩 재산이 늘어났다는 빌 게이츠를 모델로 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또한 부(富)를 축적할 수 있는 게임의 룰이 미국이 밀어붙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담론과 그와 관련된 세계화론에 근거한 무한경쟁 시스템이라는 것 역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지는 듯하다.
신자유주의 논리를 따르자면 순수한 시장원칙을 억압하는 모든 인위적 통제를 제거해야 한다. 자본이나 기업이 원하는(혹은 그것을 요구하는) 곳에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면, 그 결과 효율성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풍족한 재화가 생산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특정 지역에서는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전문화하게 될 것이고, 가난한 나라들조차 자본이 흘러들어 갈 수 있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외국 투자를 끌어들여 경제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자본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해 국가는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해야 하고, 세금이나 관료적 통제 등을 최소화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개인들 역시 그러한 조건하에 경쟁력 있는 시장 구성원이 되기 위해(보다 근본적으로는 생존을 위해) 자기관리나 자기계발에 힘써야 하는 것은 최선의 덕목이 된다.
신자유주의론자들은 이러한 논리가 전세계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기에서 신자유주의가 세계화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스템이 전세계적으로 균일하게 통용되어야만, 단기적으로는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되는 부작용을 거칠지라도, 이 시스템만이 가능케 하는 부의 효율적 생산을 통해서, 흘러넘친 부가 가난한 나라에까지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억압되지 않고 '사유화'된 자본의 이동으로 가능하게 될 '유토피아'의 청사진이다. 이름하여, 프리바토피아(Privatopia).
하지만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구체적으로 실효화되었던 지난 20년간의 경제 지표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프리바토피아에 근접할 수 있게끔 하는 게임의 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지 혹은 프리바토피아 자체가 그 어원처럼 완전한 허구에 근거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게 된다.
부의 생산은 증대되었을지언정, 결코 흘러넘치지 않았고, 대부분의 나라와 그 백성들의 사정은 더욱 열악해졌다. 20/80 사회가 무색하리만치 부의 집중은 보다 극단화되어가고 있다. 전세계 수요량의 110%가 생산되고 있다는 식량은 매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3만여 명의 손과 입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주식시장의 호황으로 개미투자자들은 쌈짓돈을 주식에 투자하지만, 그들의 돈은 막강한 자금력과 정보 수집력을 가진 다국적 금융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비효율적이라고 시장에서 신뢰를 잃고 퇴출된 기업은 있었지만, 기업의 경영진들은 그들의 책상과 의자를 내주었을 뿐, 잃은 것이 없었다(얼마전 파산을 선고받은 미 엔론사의 경우 파산 직전 간부 500명에게 최고 500만 달러의 보너스를 챙겨주었다는 얘기나, 망해가는 은행 살리라고 IMF에서 꿔다 지원해준 공적 자금을 뒷주머니에 챙겨 넣은 한국의 퇴출은행 경영진들을 보라).
이 책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의 월간 자매지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에 실린 글 중에서 `21세기를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발췌해 묶은 특별호의 번역본이다) 속에 일관되게 울리고 있는 것은 "오늘의 지구라는 경기장 안에 존재하는 가슴에 성조기를 단 오직 한 사람의 선수”인 '미국'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세계화 논리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4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전세계를 배회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의 허구성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구조적 폭력성을 폭로하고 있는 부르디외의 글로 시작되어, 전통적 부르주아 계급을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계급, 하이퍼 부르주아지에 대한 고찰, 비민주적인 미국식 힘의 논리에 기반한 맥월드 문화의 폐해에 대한 지적 등으로 이뤄져 있다.
2부의 내용은 신자유주의 논리에서 파생되고 있는 인류의 새로운 위협에 대한 고찰이다. 전구지적 환경보호협약을 둘러싼 자본과 힘의 개입, 숙명적 빈곤에 저항하는 극단적 수단으로서의 바이오 테러리즘, 유전학적 차별의 위험성을 가져오는 게놈 연구의 어두운 이면(결혼당사자들은 머지않아 궁합 대신 자신의 유전학적 성분 보고서를 주고받을 날이 올 수도 있다), 인터넷의 발전이 개인의 정보 접근이나 개인들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용이하게 하는 수단인 반면, 그것을 통제하는 빅 브라더가 존재하며, 빅 브라더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얼마든지 지배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 등이 그것이다.
3, 4부에서는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교정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위협들에 맞설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로서 가능한 저항과 대안 수단은 IMF나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등에 맞설 수 있는 범유럽 또는 범세계 차원의 '시민적' 사회운동조직체를 운영하는 것이라는 것이 필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륙의 저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독자로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시애틀'을 정점으로 지난 수년간 분출되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의 움직임과 그 구체적인 성과물로서 세계경제포럼(WEF)에 맞서 올해로 2회째 운영되고 있는 세계사회포럼(WSF)의 성과가 그들을 고무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최근 한 신용카드 회사에서 TV 광고를 통해 전해준 '덕담'이다. 얼마전 설을 지내보자니, 새해인사의 와중에 심심치않게 서로에게 건네는 기분 좋은 인사말이 되어버렸다. 부자되라는데 기분 나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부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부자되는 길에 놓인 게임의 룰이 과연 적절하며, 공평정대한 것인지 짚어보고, 회의해보는 일이 먼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는지 생각한다면, 이 책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