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시각으로 이해하는 지휘 황제의 면모
이성일
주위를 통해 본 황제의 인간적 면모
본 영상물은 지휘의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다각도에서 조명한 것이다. 주로 그와 알고 지냈던 친구와 유명 음악인들, 그리고 가족의 증언들을 통해 카라얀의 인간적, 음악적인 여러 면모를 이해시켜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아이템인데, 카라얀에 대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속속 파헤쳐진다. 감독의 시각은 상당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카라얀에 대해 기본적으로 따스한 온정으로 대하고 있지만, 거침없이 비판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여과 없이 담아 균형을 잡고 있는데, 무작정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양면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익히 알고 있는 바, 카라얀은 냉정하면서도 따스한 사람이었다. 크리스타 루트비히의 말처럼 카라얀은 '사랑의 신'이기도 했지만, 여러 사람들, 특히 단원들에게 그는 '전제 군주', '폭군', 혹은 '악당'같은 면모를 띠기도 했다. 하지만, 영상이 건강과 스캔들로 불운했던 노년의 얘기로 흐르면, 마치 호랑이 같던 아버지가 노쇠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을 볼 때 느껴지는 것 같은 묘한 측은지심이 환기된다. 카라얀 전기를 쓴 리처드 오스본은 세계 지휘의 제왕으로 군림한 카라얀의 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카라얀의 친구이며 프로듀서인 미헬 글로츠는 카라얀을 '산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시골을 좋아하고 도시를 싫어하는 사람,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가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늘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 그러나 대중들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수줍음을 타는 사람처럼 보임을 뜻하는 말이었다.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고, 되다 만 배우의 어떤 면을 지니고 있으며, 천부적인 모방자였다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되어야 하겠지만, 카라얀이 그렇게 인간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생 모리츠(그곳에서 그는 스키를 탔다)와 생 트로페(그곳에서 그는 항해를 즐겼다)에 있는 카라얀의 집들, 그의 제트 비행기와 요트들은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트-세트'를 소유한 지휘자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카라얀은 실제로 가장 좋은 제트 세트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그런 일을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간소한 삶을 살았고 가장 예의바른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훈련을 충분히 받은 조종사였음에도 그는 제트기를 테스트 표준 간에 놓고 날아다녔다. 카라얀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황제'라는 칭호에 걸맞게 연상되는 단어는 부와 권력이다. 카라얀은 80여 년간의 삶에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얻었고,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다 해본 사람이었다. 그는 잘츠부르크 부근 아니프의 호화로운 저택 외에도 많은 산장, 별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요트로 바다를 횡단했고, 오토바이와 스포츠카, 호화 승용차로 육지를 달렸으며 자가용 비행기로는 하늘을 날아다녔다. 스스로도 "나의 인생을 누구의 그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카라얀을 아는 사람들은 세계 지휘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카라얀이 의외로 사치나 허영을 싫어하고 수줍음을 타는 고독한 황제였다고 말한다.
본 영상물에서 카라얀은 부와 권력을 가진 황제의 화려한 모습보다는 주로 고독한 천재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내가 경험했던 사람 가운데 가장 고독한 사람이었다'는 군둘라 야노비치의 한마디는 특별히 심금을 울린다. 가끔 사람들은 카라얀이 누린 부에 초점을 맞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풍족하게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심오하고 고통스런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하는데, 그가 실제로 젊은 시절에 겪었던 고통을 알고, 평생 느꼈던 고독감을 이해한다면 그런 의심은 금세 빛깔을 잃는다.
카라얀 사운드의 비밀
말할 것도 없이 카라얀이 세계 최고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던 실질적이고 내적인 비결은 놀라운 능력으로 다져진 오케스트라의 '소리' 자체였다. 카라얀의 오케스트라 조련작업은 상당히 신속하게 처리되었고, 거의 완벽했다. 사람들은 악곡의 세세한 부분들에까지도 엄청나게 꼼꼼한 주의를 기울이는 그의 인내심에는 끝이 없었다고 말한다. 빈의 음악 동호인 협회의 징페라인을 처음 맡았을 때 카라얀은 이 합창단에서 자신이 요구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실로 오랜 시간 훈련시켜 단원들이 녹초가 되도록 진땀을 뺐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새로운 오페라 제작을 하면서는 240시간의 리허설 시간을 썼으며, 1970년 베를린 필하모닉과 연주여행을 가기 위해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준비할 때는 무려 100시간 이상의 리허설을 했었다.
이렇게 세심한 주의를 쏟고 엄청난 리허설 시간을 들여 이끌어내는 소위 '카라얀 사운드'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얘기를 했다. 카라얀은 우선 이어받은 조건이 좋았다. 푸르트뱅글러라는 거장이 이미 완벽하게 다듬은 뛰어난 기능의 베를린 필은 아주 특별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데 수월했다. 거기다 카라얀은 정확하고 예민한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는 아주 특이한 자기만의 방식을 쓰기도 했다. 그는 바흐의 음악이 우리들의 심장박동과 거의 일치한다고 말하고, 그런 점은 자신이 오랫동안 해왔던 요가를 통해 터득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해, 자신의 독특한 음악 정공법을 자랑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템포와 관련한 박자 비율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고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있었던 음악가였다. 오스본은 카라얀이 언젠가 자신에게 '일곱 번째 파도가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라고 묻고, 바다의 요동을 느끼고, 그 일곱 번째 파도의 힘과 외형을 판단해가면서 키를 조정하는 일은 '정말 리듬에 대한 진기한 경험'이라고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이치를 깨닫는데 천재였고, 자신의 몸에 언제나 정확한 계측기를 장착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음악에 원용하는 등 카라얀은 독특한 창조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영상물에서 당대 카라얀과 쌍벽을 이룬 존재였던 번스타인과 비교하며 크리스타 루트비히가 이런 말을 한다. '번스타인이 스스로 음악이었다면, 카라얀은 음악을 창조했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통찰이다. 카라얀은 단원들과 맞춰가며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만들 음악은 이미 그의 머리 속에 있었기 때문에, 연주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야 했다. 따라서 영상물이 말하듯이 '그는 기관차였고, 단원들은 객차'였던 것이다. 카라얀은 군대와 음악에는 꼭 독재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음악가인 카라얀이 표방하는 독재란 자신이 이미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음악과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행동양식이었던 것이다.
카라얀과 대중 레퍼토리, 그 오해와 진실
카라얀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중적인 레퍼토리의 명수라고 말한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유명 레퍼토리들에 대해서 카라얀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사람은 없었다. 그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음반이 팬들을 많이 빼앗아가기 전까지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명반에 속했다. 또 그가 만든 서곡, 전주곡, 간주곡들에 대해 음악 대중들은 늘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우리는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베르디의 '트라비아타 전주곡', 오펜바흐의 '저승의 오르페우스 서곡', 주페의 '경기병 서곡', 오펜바흐의 '뱃노래',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등 그가 정말 아름답게 연주한 주옥같은 레퍼토리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어느 누가 그렇게 아름답게 연주해주었던가!
그는 확실히 클래식 대중 레퍼토리에 관한 한 아무도 넘보지 못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부분에 대해서도 오해는 금물이다. 여기서 '대중적인 레퍼토리'라고 말할 때 필자는 보다 저급한 음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명곡'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최고의 걸작을 일컫는 용어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카라얀이 왜 대중 레퍼토리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졌을까 생각해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카라얀의 대중 레퍼토리에 대한 부단한 관심은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 레퍼토리에 대한 카라얀의 애착은 나치 시대에 오랜 시간 예술적 억압에 의해 강요받았던 데에 이유가 있기도 하다. 즉 카라얀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 취향을 의도적으로 바꾸거나 창조적으로 개선하려고 하지 않고 나치 시대부터 이미 조성된 대중들의 취향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이런 시각은 그의 대중 레퍼토리 선택이 문제에 중요한 오해를 불식시킨다. 그리고 대중 레퍼토리의 명수라는 인식과 연관되어 카라얀의 음악을 '통속적'이라는 시각에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카라얀의 음악은 결코 통속적이거나 저급한 음악이 아니다. 늘 정교함을 주무기로 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이 때때로 너무 세련되었던 것이지, 카라얀은 실제로 대중적 취미에 영합해 싸구려 음악을 만든 사람이 아니었다. 이 영상물은 그가 근본적으로 싸구려 음악을 만들 수 없는 성향을 가진 인물임을 확인시키는데도 중요한 기여를 한다.
세상을 떠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카라얀은 아직도 찬반양론에 휩싸여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느 한 그룹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 그를 반대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더 큰 문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영상물을 보는 일은, 악계에서의 권력이나 스캔들, 나치 협력 문제, 그리고 부귀영화의 측면에 집중해 그동안 잘 못 갖고 있게 던 '카라얀 상'을 조금 더 수정하는 기회도 되는 것 같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이 언젠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치 협력 부분이나 만년의 악단들과의 마찰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그의 편이 되어 주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품이나 인격에 대한 문제, 음악적 품격의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재인식해야 할 부분이 많다. 어떤 비판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20세기 음악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음악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하던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위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