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성(城) <br/>이렇게 새롭게 시작되는 것인가 <br/>불행의 흑판 위에 그린 행복 <br/>우울한 전야제 <br/>잠자는 형벌 <br/>흐르지 못하는 강 <br/>마지막 겨울 <br/>소리 없는 예고 <br/>안개 속의 실루엣 <br/>비틀거리는 밤 <br/>어둠이여 불꽃이여 <br/>깃발 없는 깃대 <br/>다시 낯선 밤 <br/>위험한 여로 <br/>찬란한 슬픔 <br/>이르지 못할 길

주인공 여운희는 유복한 가정의 2녀 중 장녀(여동생 운현)로 태어나 평탄하게 성장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의 수재인 첫 남편 정일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운희는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토굴 속같이 컴컴한 광화문 지하다방에서 친구 지연의 뚜쟁이 짓으로 정일을 처음 만났다. 운희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문기자인 정일과 결혼해서 1년쯤 뜻맞게 살고, 2년쯤 회의 속에 살았다. 그러나 남편 정일은 자신도 모르게 지니고 있었던 만성 신장염으로 1년을 병석에 있다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제쳐지면서 그녀는 20대에 과부가 되었다.

운희는 여성지 사진기자로 일하다 만난 제약회사 박병환 사장과 재혼한다. 서로가 피차 재혼이었지만, 박 사장이 그녀보다 18세나 나이가 많았다. 첫 남편 정일이 신경질적이었던 데 비해 박 사장은 너그러웠고, 매사에 옆자리 짝과 경쟁하는 것처럼 빡빡했던 정일에 비해 박 사장은 그녀 자신을 어린애처럼 보살펴 줄 것 같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 사장은 모든 것이 나이보다 훨씬 젊었었다. 감각이 그랬고, 사고가 그랬고, 움직임이 그랬고, 마음이 그랬었다.
그러나 불행한 여자는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박 사장과 재혼하던 날, 박 사장이 쓰러지고 식물인간이 된 채 병원에 눕게 된 것이다. 박 사장과는 입맞춤 한 번 하지 못하고 한 결혼했는데, 그날의 식으로 인해 그녀는 어떤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이게 된 것이다.
운희는 시어머니의 요청이자 강요에 의해 박 사장이 일어날 때까지만 있는 조건으로 시댁에 머물게 된다. 어찌됐던 식을 올린 뒤이기 때문에 정식으로 박 사장의 아내였다.
그녀는 결혼식 이후 매일같이 병원에 들러 박 사장을 간호하고, 그 뒤에는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 똑같은 날들이 수없이 흐른다. 시댁 식구들 모두가 박 사장이 쓰러진 것을 은연중에 운희 탓으로 몰면서도 체면 때문에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질 못한다. 그녀 또한 어쩔 수 없음에 날마다 반복된 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쳐간다. 급기야 그녀는 자살을 꿈꾸고, 그러기 위해 운전을 배운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그녀의 입장을 동정한 유일한 사람은 박 사장의 아들 우섭이다. 운희에게 있어 우섭은 법적으로는 세 살 아래의 아들이지만, 서로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운희는 그동안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3년은 착실히 했고, 불감증도 아니었고, 이제 성숙한 서른셋이며, 6년 동안 밤을 혼자 지냈었다. 운희는 문득 생각해본다.
‘남편과 살 때는 이런 목마름을 몰랐고, 그가 앓았던 1년 동안도 몰랐으며, 20대에 과부가 된 딱한 미망인으로 2년 동안 여성지 사진기자로 뛸 때도 이런 확실한 증상은 없었다. 아니, 그가(우섭) 2년 코스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석 달 전까지도 이러지 않았다.’
우섭과의 ‘그날’ 이후, 그를 거부하면서도 그를 기다려지는 그에 대한 열망에 그녀는 날마다 불면의 날을 지새운다.

하지만, 운희는 자유를 택하기로 결심한다. 시댁에서 뛰쳐나오면서 운희는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되뇌어본다.
‘시어머니는 어떤 얼굴을 할까. 교만한 시누이는, 속을 알 수 없는 시동생은, 고고하신 동서는, 무기력한 시누이 남편은, 그는, ……아,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그의 생각은 하지 말자. 이 반역의 쾌감을 위해 그의 생각은 하지 말자. 그는 내 행위를 이해하고 찬양할 것이다. 그는(우섭) 드디어 그 여자(운희)는 결행했다고 박수를 쳐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쟁취한 자유는 작은 우리에서 큰 우리로 옮겨진 정도의 자유밖에는 안 되었다. 조각배에 포로로 묶여 있다가 무인고도에 풀어져진 자유라고나 할까. 몸의 자유는 얻었으나 마음의 자유는 그녀 것이 아니었다. 반역의 쾌감을 집 동네를 벗어나는 잠깐 동안으로 그만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의 박 사장이 마음에 걸렸다. 시어머니도 걸렸다. 그건 그래도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녀를 견딜 수 없게 고문하는 것은 우섭, 그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었다.
운희는 온통 그에 대한 생각에 휩싸인다.
‘그를 보고 싶다, 그의 음성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 그는 내가 집을 나온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오겠다는 말을 해놓고 나올 걸 잘못한 것 같다, 그는 수염을 제대로 깎고 있는가, 그는 술을 과음하지는 않는가, 그는 잠을 자는가, 그의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가.’
운희가 그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하고 있을 때, 우섭이 그녀의 아파트 문을 노크한다. 사랑하면서도 함께 할 수 없는 두 사람, 갈망의 극점을 향해 위험한 여행길로 나서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