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
허순용(sellavy@yes24.com)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프로이드와 더불어 무의식의 발견자로 간주된다. 프로이트처럼 그도 인간에겐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정신의 영역이 있으며, 이 무의식이야말로 인간 이해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세기 말 당시에 이와 같은 주장은 대개 황당무계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프로이트와 융은 자신의 관심을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여 마침내 정신사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러나 융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프로이트와 생각이 달랐다. 두 사람 모두 무의식에 관심을 가졌고, 무의식을 분석하는데 꿈이 아주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개념 규정과 분석의 방법에서 차이가 많았고,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상반되기까지 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 형성과 삶에 대한 열정을 성욕에 근거해 이해하고자 하였고, 문화 현상의 해석에서도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 그는 무의식의 부정적 기능을 강조하며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부정하였고, 종교 현상은 한낱 신경증일 뿐이라고 하였다. 반면 융은 개인의 성격이나 문화의 창조는 다양한 동기에 의해 형성되며 성욕은 단지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보았다. 또 정신의 구조는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종교 현상은 인간의 마음에 고유하게 내재해 있는 것이며, 삶은 궁극적으로 '개성화 과정'을 통한 자기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융은 프로이트에 비해 인간과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책은 바로 융과 그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입문서이다. 저자 이부영은 우리 나라 최초로 스위스 융 연구소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국내 융 학파의 태두로서 서울대 의대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융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이 책은 1978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유학에서 돌아온 저자가 융에 대한 일반의 무지와 오해를 깨뜨리고 분석심리학을 정확하게 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집필한 것이다. 그 후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꾸준히 읽히다가 1998년에 약간의 손질을 거쳐 개정판으로 나왔는데, 국내에 나와 있는 융의 입문서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깊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은 제1장에서 융의 생애를 소개하고 「컴플렉스론」, 「마음의 구조와 기능」,「심리학적 유형론」으로 나아간다. 단어 연상 검사를 하던 도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억압된 생각의 덩어리 '컴플렉스', 의식의 표면에 자리잡은 외적인격 '페르조나'와 무의식의 표층에 자리잡은 자아의 열등한 모습인 '그림자'의 개념이 설명된다. 그리고 무의식의 심층으로 들어가면 내적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인격으로 흔히 남성에게는 여성형(아니마)으로 여성에게는 남성형(아니무스)으로 나타난다.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페르조나와 그림자에 비해 의식하기 어렵지만 개인의 성격 분화와 인격 통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융은 평가했다. 명료하게 설명하기 힘든 개인의 성격을 해명하는데 매우 유용한 이론이다.
심리학적 유형론이란 심리적 성향을 크게 내향성과 외향성으로 나누고 정신의 4가지 속성이자 구성 요소인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을 앞의 두 가지와 결부시켜 사람의 성격을 분류한 이론이다. 여기서 사고와 감정, 감각과 직관은 각각 서로 대극의 관계에 있다. 즉 사고 기능이 우월하면 감정 기능은 열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향적 사고형', '내향적 감각형' 같은 유형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심리학적 유형론은 사람을 이론의 틀 속에 끼워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속성과 그 분화의 정도를 파악하는 이념형으로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의 최전선은 역시 '상징'에 대한 관심과 그 해석이다. 인간 정신의 개방성과 창조력을 믿었던 융은 무의식이 이러한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무의식을 끊임없이 의식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러자면 무의식을 잘 관찰하고 무의식의 메시지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상징이 전면에 떠오른 것은 이 지점이었다. 무의식의 표현 형식이 바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상징의 형태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고, 우리는 그 상징을 풀이함으로써 무의식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상징은 '십자가는 예수를 가리킨다'는 것처럼 단순하고 표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랜 관찰과 여러 맥락을 이해해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꿈과 상징의 해석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융은 인간의 정신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상징을 해석함과 동시에 무의식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상징 체계의 근원을 추적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는 개인적인 기억의 차원을 넘어서는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 집단적 기억이 인간의 마음을 자극할 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 가장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인 신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 밖에 융은 연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두 극단적 존재의 질적 변환을 통한 원융과 조화를 추구했던 연금술처럼, 인격의 발달도 대극 합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데 주목했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융의 세계관에서는 모든 존재가 대극 합일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속성의 종합적인 구현의 장이 각 종파이며 특히 '신'이라는 개념이라고 융은 말한다. 종교 현상을 신경증적 심리현상이라고 환원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 융은 종교 현상을 '인간 정신의 특수한 자세'라 보고 이것이 인간의 마음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하나의 원형상이라고 생각했다. 제10장 「분석심리학과 종교」에 종교에 대한 일반론을 비롯하여 기독교 및 동양 종교에 대한 융의 견해가 소개되어 있다.
융은 만년에 볼링겐 호숫가에 돌집을 짓고 마치 히말라야의 성자처럼 살다가 평온하게 죽었다. 그의 사상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뿐만 아니라 신화학, 민속학, 종교, 문학비평과 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자기와의 보다 깊은 만남은 어떻게 가능한지, 심리적인 여러 문제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끝으로 우리나라에는 아직 융 전집이 번역되어 있지 않다. 이부영 선생과 한국융연구원에서 펴낸 책들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되겠고,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은 외국어로 된 전집을 참고해야 하겠다. 독일어 전집을 읽는게 제일 좋겠지만, 독일어를 모르고 영어가 가능한 사람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나온 융전집을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