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꽤 웃기는 포
99/11/23 이희인(heen@ktcf.co.kr)
1.
포 전집 중 첫 두 권 <판타지>와 <풍자>편이 나왔을 때 나는 서점에 가서 두 권의 목록을 주욱 훑어보았다. 포를 제법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그 목록들은 생전 들어보지 못한 제목들의 나열이었다. 그 생경함으로 인해 나는 (포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책을 집어들 수 없었다. 급기야 출판사에 직접 전화를 했다. '재밌나요?' - 어리석은 질문이라니! 이제 막 의욕적으로 출간한 자신들의 책을 나쁘다고 답할 출판사가 어딨겠는가! 그런데, 전화 받은 분의 대답이 조심스럽다. '어쩌면 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두 권이 아닐까요?' 두 권을 읽고 난 지금, 나는 그분의 말에 대체로 동의한다.
네 권으로 기획된 포 전집 중 가장 의아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풍자>편이었다. 호러, 판타지, 추리 등의 장르들은 그런 대로 한 무리를 지을 법한데 풍자라면 어쩐지 그 무리에 동떨어진 느낌이다. 풍자가 불러일으키는 여하한 웃음이나, 풍자가 목표로 하는 사고의 뒤집음, 비판 정신이 포의 비현실적인 공포 기법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의 <풍자>편을 펼쳐든 처음, 공포의 정서가 과연 풍자의 정신과 만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읽기를 시작하였던 것 같다.
2.
책을 펼쳐 <풍자>편에 묶인 소설들을 찬찬히 읽어나가면서 역시 '풍자'보다는 포 특유의 괴기스럽고 음습한 분위기가 압도적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울하고 엽기적인(?) 작가가 어떻게 이러한 작품을 썼을까 싶은 정도로 재치 있고 위트 있는 작품들과 만나는 것은 <풍자>편을 읽는 즐거움이 될 만하다.
<풍자> 편에 묶인 단편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포 특유의 공포 감정을 기본으로 깔고 그 가운데 웃음을 도출하는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다소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만한 것들로 재치가 넘치면서도 괴기스러움은 쏙 빠져있는 작품들이다.
괴기스러움과 웃음의 기묘한 혼합을 꾀하는 그로테스크의 대표적인 작품은 '타르박사와 페더 교수의 광인 치료법'과 '안경', '미라와의 대담' 등이 돋보인다. 책의 표제가 된 '...... 광인 치료법'은 정신병원이라는 공간 자체의 어둡고 퀴퀴한 분위기와 만찬을 함께 한 상류층 사람들이 결국 그 병원의 정신병자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포의 어느 단편 못지 않은 공포감과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미라와의 대담'에서 놀라게 되는 것은 <판타지>편의 많은 작품들에서 보이던 포의 박학다식함이다. 오 천 년 전 이집트 미라를 전기요법으로 깨어나게 하여 미라의 시대와 현재(19세기) 과학문명을 비교하는 가운데, 미라 만드는 법이며 19세기 지식의 단면들이 골고루 재료로 쓰이고 있다. 희망에 들떠 있는 19세기 과학 문명이 몇 천 년 전 미라의 눈에는 한낱 초라한 답습에 불과하다는 조롱 섞인 전언에서 어쩌면 포의 문명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재치 있고 유머가 넘치는 포를 만날 수 있는 작품들로는 '싱겁 밥 귀하의 문학 인생'과 'X투성이의 글', '사기술', '비즈니스맨' 등이 돋보인다. 다분히 포 자신이 위치한 19세기 미국 문단, 출판계의 속물성을 조롱하고 있는 '싱겁 밥 ...... '은 경쾌하고 즐겁다. 사기의 구성요소와 크고 작은 사기의 예들을 나열한 '사기술'은 포의 작품 중 가장 유쾌하고 재기 발랄한 작품이 될 것이다. '비즈니스맨'의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이야기들까지, 그 번득이는 입담은 근래 널리 읽히고 있는 에코의 <세상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 같은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풍자> 편에 묶인 작품들에서 포가 유감없이 발휘하는 기법 중 하나가 발음과 철자를 가지고 즐기는 '말장난'이다. '내 딸의 딸인 브와사르 양은 크르와사르씨와 결혼했고, 내 딸의 손녀인 크르와사르 양은 프르와사르씨와 결혼했어요.' ('안경'중에서) 같은 식인데, <풍자>편의 대다수 작품들이 많건 적건 이러한 말장난을 즐기고 있다. 특히 저 기묘한 단편 'X 투성이의 글'에서는 천재시인 이상의 기하학적 시편이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그 유명한 무의미 대사에 비견되는, 그야말로 알파벳 'o'와 'x' 투성이로 된 전대미문의 문장이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포가 숨겨둔 말장난이나, 수수께끼들이 발굴을 기다리며 작품 도처에 숨어있을지 모르겠다.
3.
<풍자>편을 읽는 가운데 내내 떠오르는 작가는, 그 역시 만성적인 신경증에 시달리다가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이다. 내게 모파상은 <비곗덩어리>같은 작품을 쓴 풍자의 전범으로 기억되는데, 그의 작품에 흐르는 감정이 그러고 보니 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모파상의 괴기 소설집 제목도 하필 <광인?>이다. <광인?>에 나오는 '오를라' 같은 작품은 포의 '미라와의 대담'과 '윌리엄 윌슨'을 섞어놓은 것 같다.
요컨대, 풍자 작가로 인식하고 있던 모파상에게서 수많은 괴기 소설을 발견한 것이나, 공포 작가로 널리 알려진 포가 풍자에도 능했음을 확인하는 지점에서 두 명의 19세기 작가가 만나고 있는 듯하다. 풍자 정신과 공포의 정서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터이다.
<풍자>편은 실로 포의 유머, 재치, 포가 지닌 지식의 방대함, 언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 세계관의 편린 등을 두루두루 맛볼 수 있는 다양하고 풍성한 작품들의 꾸러미다. 더 이상 포는 이상하고 음울한 공포작가만은 아니다. 과학과 시사에 밝고 세상을 재치 있게 바라보고 그릴 줄 알았던 일면 기운찬 지식인으로 보인다.
내 안에, 어느새 포의 얼굴이 바뀌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