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스키의 첼로에서는 항상 자유로운 감각이 묻어 나온다. 러시아 출신으로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라는 타이틀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볍고 상쾌한 울림이다. 너무나도 빼어났던 두 스승의 중후하고 엄격한 울림과의 차이에 대해 질문을 하면, 그는 스스럼없이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그 분들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신의 느낌을 어떻게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지, 그 분들과 얼마나 똑같이 연주할 수 있는가 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그 분들의 음악이 있고, 제에게는 저 나름의 음악이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들어있는 그의 대답처럼 마이스키가 무대에서 연주하는 음악, 또, 음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에서는 마이스키만의 독특한 견해가 여기저기에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첼로의 구약성서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을 들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 작품 전곡을 거푸 녹음한 바 있는데, 새로운 밀레니엄과 동시에 발매한 두 번째 녹음에서는 바흐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안나 막달레나 필사본에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첨가,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판본을 연주하고 있고, 이 작품 안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모든 반복 부분을 완전히 없애버린 이 새로운 연주를 1981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의 형에게 헌정하고 있다.
경쾌함과 자유로움은 그가 들려주는 독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케스트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협주곡들이나, 평소 그와 친분이 돈독한 연주자들과 함께 하는 실내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이스키가 최근에 연주한 드보르작의 협주곡을 들어보자. 주빈 메타와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최상의 협조자들과 함께 한 이 녹음에서 그의 첼로는 빈틈없고 현란한 오케스트라 부분에 비해 다소 빈약해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간결하고 부드러운 선을 유지하고 있다. 로스트로포비치/카라얀의 연주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런 연약함과 부드러움은 더욱 큰 아쉬움을 남길 수도 있는데, 사실 그것이 바로 마이스키 해석의 매력이기도 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에는 기돈 크레머, 마르타 아르헤리치 등과의 실내악 녹음들도 두드러지는데, 아르헤리치와의 교류는 벌써 20년이 넘은 일로 마이스키가 도이체 그라모폰과 인연을 맺은 것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기돈 크레머와의 연주는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의 마이스키 사중주단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오래 묵은 것이니 그들 사이에 오가는 교감은 전문 실내악단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실재로 이들과의 녹음이나 연주라면, 거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하니, 이들의 브람스 사중주는 그야말로 21세기 드림팀의 연주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재능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면, 성격이 다소 모가 나더라도 용서가 되는 법이다. 하지만, 마이스키에게서 다른 연주자들의 오만함이나 결벽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또 하나의 기쁨이다. 1988년부터 시작된 그의 방한은 그 후 꽤 자주 이어져왔고, 무대에서, 또 사인회에서 만날 수 있었던 마이스키는 청중들에게 상당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속 깊은 인물이었다. 1995년에는 한복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마이스키를 볼 수도 있었지 않는가. 물론, 그것을 얄팍한 상술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에까지 와서 그런 제스츄어를 취해야할 정도로 마이스키의 이름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닥쳐온 험한 역경을 당당히 극복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자신 있게 표현해낼 줄 아는 첼리스트, 청중이 자신을 아끼는 만큼 그 또한 청중을 배려할 줄 아는 음악인으로서 마이스키의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다.
정신 병동으로의 1년의 도피 생활 이후, 마이스키는 모스크바와 페쩨르부르크 음악원에 다시 다니기를 원했지만, 당국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이에 마이스키는 천신만고 끝에 출국 허가증을 교부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1972년 겨울의 일이다. 영어를 한 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마이스키에게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는 강제 수용소와 정신병원에서의 그것과 진배없는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만족했다.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라는 또 한 사람의 첼로 명인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소개로 이루어진 그리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절박한 시절의 마이스키에게는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러시아의 로스트로포비치와 미국의 피아티고르스키를 동시에 사사한 유일한 첼리스트가 되었는데, 젊은 시절, 너무나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던 마이스키가 오히려 자신을 지상 최고의 행운아라고 자부하는 것도 이렇게 좋은 스승들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 다음에는 찬스라는 야구에서의 격언과 마찬가지로 이 때부터 그에게는 행운이 줄을 잇는다. 1973년 겨울, 뉴욕의 카네기 홀에 서게 된 마이스키는 너무나도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고, 이 공연에 참가했던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1720년산 도미니크 몬타냐라는 최고의 악기를 선물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첼로는 지금까지도 그가 애지중지하는 것으로 수 차례에 걸친 내한 공연에서도 줄곧 이 첼로의 맑고 아름다운 울림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첼리스트 가운데 가장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고 있는 미샤 마이스키는 1948년 당시에는 소련 연방에 속해 있었던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인 리가 출신이다. 유태계 혈통을 이어받은 마이스키 집안은 경제적으로 꽤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미샤 마이스키가 처음으로 첼로의 활을 잡았던 여덟 살 때, 그의 누나는 이미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고, 형 또한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샤가 자신의 몸집보다도 더 큰 첼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과 실내악을 함께 연주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밖에 나가서 공 차는 것을 최고의 놀이로 여기고 있던 장난꾸러기가 첼로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은 식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고 함께 자란 형과 누나로부터의 영향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마이스키에게 있어서는 좀 더 충격적인 사건들로 채워지게 되고, 이 사건들은 그의 음악 인생에 전환점을 제공하는 중요한 단초들로 작용하게 된다.
여덟 살에 처음 익히기 시작한 첼로에 큰 매력을 느낀 미샤는 고향인 리가 음악원을 거쳐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소련 연방의 음악 수도라 할 수 있는 페쩨르부르크 음악원 부속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1965년에는 러시아 전국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타고난 재능을 널리 과시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음악을 인정해주는 팬들이 생긴 것도 반가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말 위대한 스승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66년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했던 마이스키는 역시 우승컵을 손에 쥐었고, 당시 심사위원으로 초대되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그의 재능에 감탄, 마이스키를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끌어들였고, 20세기 최고 첼리스트라 칭송받고 있던 로스트로포비치의 수제자라는 타이틀은 그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주는 등대의 불빛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소련 연방 곳곳을 누비면서 경력을 쌓아가던 마이스키의 미래는 누구도 의심할 바 없는 탄탄대로였지만, 1969년에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피아노를 쳤던 그의 누나가 갑자기 이스라엘로 망명을 하고 만 것이다. 소련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그의 가족 모두를 체포했고, 강제 수용소로 격리하고 말았는데, 냉전 시대의 차가운 정치 논리 앞에서는 미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고 하는 음악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순간의 2년 동안 강제 노동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던 마이스키의 손에는 길고 멋진 활 대신 삽과 곡괭이가 들려졌고, 전도 양양했던 첼리스트의 꿈은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할 형편이었다. 2년의 복역기간을 마치고 출소한 후에는 또 군복무라는 무거운 족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첼로 연주자로서의 복귀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그를 아끼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 막사 대신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자진해서 미쳐버렸던 셈인데, 정말 이런 상황이 닥쳐온다면 실재로 미쳐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