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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작년에 교과부에서 주관하는 ‘사제동행독서토론동아리’ 활동을 시작했을 때 주저없이 선택했던 첫 책은 앨런 차머스의 『현대의 과학철학』이었다. 이 책은 귀납론부터 시작하여 포퍼와 쿤, 라카토스, 파이어벤트 등 대표적인 영미 과학철학자들의 물고 물리는 논쟁의 연대기를 담고 있다.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원본의 짧고 간결한 문체가 과학철학자들의 핵심 사상과 문제점들을 명료히 정리하고 있어 과학철학 개론서의 고전으로 손색이 없다. 이 책을 절판된 80년대 판본으로 처음 접했던 건 대학원 시절 중고 서점에서였다.(그런데 현재 재발간되어 판매되고 있는 이 책은 놀랍게도 80년대 활자 인쇄본 그대로다!)
이전에 있던 학교의 독서토론동아리에서 이 책을 함께 읽고 토론했던 적이 있었다. 과학도 어렵고 철학도 어려운데 과학철학이라니, 그야말로 학생들은 사경을 헤매는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대부분이 인문계열이었던 구성원들에게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은’ 테마였던 것 같다. 학생들이 이 테마에 어려움을 느낀 것은 낯섦 탓도 컸을 것이다. 인문계열에서 메타적으로 다뤄지는 과학은 종종 기술과 동일시되어 물질문명의 주범으로 비판받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비판받는 과학기술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지식이 어떻게 생성되고 유통되고 받아들여지며 사용되는가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과 조망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처음부터 과학기술의 명암만을 가지고 싸우다 보면 이념 갈등으로 끝나기 쉽고 별로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p.43
그러니까 고등학교 인문 교과가 다루고 있는 과학기술은 본질이라기보다 과학기술의 명암뿐이다. ‘과학지상주의자’라는 힐난 속의 대상은 대개 만화영화 속 미치광이 과학자로 수렴된다. 그러니 귀납이니 반증이니 공약불가능성이니 따위의 개념이 단순 명료해 보이는 과학 체계와 역사에 얽혀 있다는 사실에 당황할 수밖에.
사정은 과학고 학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대개 학생들은 집요하게 물고 이어지는 논리적 문구들을 분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단순 명료한 결론의 수리 체계에 익숙해져 있는 습관에 기대 지난한 말싸움의 ‘쓸모’에 대해 회의했다.
그러나 문과 학생이든 이과 학생이든 가장 큰 문제는 교과를 통해 이렇게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분석하며 비판하는 훈련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과에서는 철학을 윤리 과목에 가두면서 문과적 성향을 낭만주의적 감성에 국한시키고 이과에서는 수학과 과학을 세상과 분리시키면서 단순 명료한 가상 세계 속으로 학습자를 인도한다.
과학고 학생들은 과학도로서의 정체성에 명민함을 더해 이전 학교에서보다는 훨씬 분명한 독해 능력을 보여주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생각해 보니 그들은 아직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었다.
다행히 이 책은 『현대의 과학철학』에 비해 훨씬 쉽다. 동아리의 한 학생이 이 책을 읽고서야 『현대의 과학철학』이 이해가 되었다고 할 만큼 저자는 후에 『다윈의 식탁』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명료한 정리 요약’의 특장을 이 책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책이 『현대의 과학철학』을 대체할만한 지에 대해서는 유보하고 싶다. 말끔하게 잘 요약하여 그 장단점을 명료하게 전달해 주고는 있지만 과학철학자들의 사상과 논쟁에 포함된 치열한 논증의 과정은 다소 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시 한 번 학생들과 과학철학을 함께 읽을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이 책을 『현대의 과학철학』 앞에 놓을 것이다.
이 책은 쿤과 포퍼 외에 라카토스나 파이어벤트, 라투어 등이 소개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쿤과 포퍼의 의 이야기이다. 쿤의 반증주의와 포퍼의 패러다임은 과학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과학지식이 대담한 추측과 반박 속에서 누적적으로 ‘발전되어’왔다고 보는 반면 쿤은 개념적으로 서로 다른 지식 체계가 교체되며 ‘변화되어’왔다고 본다.
대학은 물론이고 고등학교 물리 교재들은 대체로 포퍼의 관점에서 기술된다. 상대론이나 양자 역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고전 역학이 상대론이나 양자 역학의 특수한 경우임을 보임으로써 두 체계의 차이보다 연속성에 전적으로 주목하는 것이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조롱에 가까울 만큼 터무니없는 이론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쿤은 바로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으로부터 패러다임의 개념을 구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운동은 물체의 이동만이 아닌 물체의 변화 일반을 의미하는 개념이어서 갈릴레오나 뉴턴이 생각한 근대적 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 그는 거기서 과학 고전들을 재발견하면서 과학 지식이 누적적으로 성장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과학의 역사는 개념적으로 서로 다른 지식 체계가 교체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p.104
가장 투철한 과학자는 ‘비판에 직면하라’, 혹은 ‘반증을 시도하라’는 명제를 실현하는 포퍼주의자들일 것이다. 이 명제는 당위의 명제이다. 과학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우선 이 당위를 학습하고 그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과학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과학 교과서가 절대로 다루지 않는 쿤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차이’를 읽는 것이며 그 상이한 존재론과 인식론을 배경으로 광범위하게 얽힌 논리적 체계를 둘러본다는 것이다.
작년에 장대익 교수가 특강을 하면서 질문을 맞힌 학생에게 보내온 책이 바로 『쿤&포퍼,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였다. 모르긴 몰라도 과학고 출신의 장대익 교수가 하필 자신의 저서중 이 책을 과학고 학생에게 보내온 이유는 내가 동아리 아이들과 함께 『현대의 과학철학』을 함께 (강제로) 읽은 이유와 같을 것이다.
나는 미력하나마 이네들이 과학자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기꺼이 논쟁에 동참하면서 실천적 지혜를 얻는 이로 살기를 바란다. 그 출발점은 우선 과학이 과연 무엇인가 질문하는 것부터이리라.
과학은 특별한가? 유독 다른 여러 지식 체계와 달리 과학이 이토록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이 다른 지식과는 달리 자연을 직접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이 자연은 말랑말랑한 고무 찰흙이라기보다는 엄청나게 큰 코끼리인지 모른다. 코끼리의 존재야말로 과학을 뭔가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는 차라리 장남이리라. p.216
과학은 분명 다른 지식 체계와 다르다. 그 다름은 상대적 다름이 아니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특별함이다. 그러니 과학자의 겸손함은 장님으로서의 겸손함이다. 장님으로서의 겸손함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과학자가 과학철학을 통해 얻어야 하는 윤리적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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