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2월 황장엽비서가 망명하던 때, 나는 대검찰청에서 기자들을 취재하고 있었다. 한보사건으로 인한 정치인 소환 보도에서 조선일보의 독주로 인해 피를 말리는 기자들을 취재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기자들과 대검 중수부장의 브리핑까지 들으며, 기자냄새를 맡아갈 때, 정부가 중대발표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자들은 또 여론 돌리기식 발표겠지하며 애써 무시했다.(사실 대검 출입기자와 대북사건을 업무적으로 무관하기도 하지만) 그때 인덕좋고, 운동권 출신으로는 손가락안에 드는 한 선배가 농담처럼 읊조렸다. '뭐 별거겠어. 혹시나 황장엽이 망명했으면 몰라'
그리고 얼마후 정부의 발표는 정말로 황장엽비서가 망명했다는 것이었다. 운동권이었던 그 선배가 그 말을 한 것은 기자특유의 센스도 있었지만, 그가 신뢰했던 주체사상의 모태인 황장엽의 망명에 버금가는 사건이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센스를 가진 그 선배도 결국은 정권과 권력에 기생하며, 특종을 뽑아내는 조선일보의 힘 앞에서는 데스크 앞에서 피를 말리며, 다음날을 기다리는 비극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문제의 황장엽비서가 쓴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한울 간)를 읽었다. 회고록이라면 처칠이나 루즈벨트 등 서양의 유명인이나 김형욱같이 남들 모를 것을 많이 아는 이가 쓰는 비밀서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몇가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사람의 일생을 담은 이 책의 읽기를 위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식 층위를 통해 책을 읽어가겠다.
우선 '수신(修身)'의 부분을 보자. 황장엽비서는 자신의 몸을 닦는데, 선비적인 기질을 바탕으로 철저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시간인 일본 유학시절이나 소련 유학시절에 자신을 통제하며 자신을 가꾸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그는 인텔리 계층이 가지고 있는 근성들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이끌어가는 힘은 철저한 고백식의 문체지만 결론적으로 자기방어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도 이런 근성중에 하나일 것이다.
다음은 '제가(齊家)'다. 회고록의 서두는 자신을 평생 이해하고 사랑해준 아내에게 보내는 유서로 시작된다. 아내에게까지 알리지 못하고 온 것에 대한 자책과 자식과 손자, 손녀에 대한 염려와 애정도 책의 전반에 내포되어 있다. 책을 통해서 만난 그는 제가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에게는 남녀평등의 관점에서 안온하게 행동하게, 자신들에게도 올바른 심성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흔적이 다분하다.
'치국(治國)'의 부분은 황장엽의 최대 약점이다. 아무리 그가 부인하려해도 벗어나지 못할 부분이다. 다름 아니라 이미 물은 엎질러졌기 때문이다. 엎질러진 물이란 현재 북한의 상황을 만든 배경에는 방어논리를 펴기는 했으나 황장엽의 책임을 결코 회피할 수 없다. 특히 50년대 이후 북한의 권력다툼에서 김정일의 부정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황장엽은 김정일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났다. 김영주가 '김정일을 망친 것은 황장엽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는데, 난 책을 읽으며 전반적인 맥락에서 생각컨데, 김영주의 생각은 어느 부분 타당하다. 그리고 황장엽은 90년대 들어 사실상의 권력이 김정일에게 넘어가고, 수없이 아사하는 주민들의 실상을 무시하는 김정일을 볼 수 없고, 이 과정에서 가능성이 커지는 전쟁을 막기 위해 내려왔다는 논리를 폈다. 일견 타당하지만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
황장엽에게 있어 '평천하(平天下)'는 '주체사상'을 근거로 한 각 국가의 건전한 성숙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물질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와 미래를 예측하는 막시즘의 문제를 분석하고, '주체사상'이라는 가치를 내세운다. 막스철학에는 인생관의 문제, 특히 인간의 삶의 목적과 행복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소홀히 취급된다는 것에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이 주체사상은 책에서 나오듯이 북한 내부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황장엽 자신이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내가 다른 책을 읽어본 적도 없어 지식이 짧지만 그리 고등한 가치체계라는 인식이 들지 않는다. 가장 큰 원인은 이 가치가 막스레닌주의의 서양적인 문체를 부딪히면서 해결을 위한 과정에서 태어났다는데, 태생적 한계가 있다. 이 주체사상을 요즘 한국에서 일고 있는 '율려운동'이나 '생태운동' 등과 철학적인 가치의 부분에서 비교하면 적지 않은 흥미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마지막에 자신이 초대를 세운 주체사상이 김일성부자의 세습으로 이어지는 봉건주의로 빠진 것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실었다. 내가 보기에 이 글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이 김일성부자에게 받아들여지면서 독재를 절대화하려는 조류와 자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방향으로 나누어졌다한다. 자신의 조류란 사회운동의 주체를 인간으로 보고 인간중심의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보편적인 길을 밝히려는 흐름이라 설명한다. 황장엽이 주창하는 주체사상을 봤을 때, 내가 보기로는 부박하기 그지 없다. 동물들은 스스로의 자기변화 능력이 떨어져 멸종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황은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생명운동'이나 '율려운동'에 비해 철학적으로도 성숙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가 아니다. 유사이래 인간은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 내가 봤을 때, 우주나 자연에 대한 사고는 물론이고, 예술 역시 원시시대보다 못하다. 현대인의 사악한 그림은 얄타미라동굴의 벽화보다 못하다. 최첨단 미국의 의학은 기원전 5천년전에 씌여진 중국의 '황제내경'이 담고 있는 인체와 우주의 신비에 턱없이 부족하다.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은 신라-백제 기와의 아름다움 보다 못하다. 그런데도 인간은 스스로를 발전시키면서 보전할 수 있는가. 인간은 다른 동반자들을 작악하게 죽이면서 스스로도 죽어가고 있는 역사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고로 난 황장엽이 말하는 사고들에 동의할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나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 장쩌민 같은 중국의 지도자와 호치민 등에 관한 인상이다. 이전에 내가 판단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특히 내가 가장 사숙한 이 중에 하나인 호치민의 소탈한 모습에 관한 것은 즐거움이었다.
또한 황장엽비서가 망명하는 과정에서 우리 언론사가 물불 안 가리고,(사실은 그 정도의 판단 능력도 없을 것이다) 기사를 쓰는 바람에 곤란에 처할 뻔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 점이었다. 또한 송두율교수나 황석영씨에 대한 황장엽씨의 생각, 김학준총장과의 대담 말미에 나온 한국에 대한 인상은 독특한 읽을 거리다.
어찌보면 어린 망령이 잔혹하게 비판을 가한 것처럼 되버렸다.(물론 그분이야 이 잡문을 볼 리도 없고, 봐도 무시하시겠지만) 하지만 황장엽비서는 자신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굶어죽는 인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사선을 넘었다. 그러니 무슨 말로도 우리가 침범할 수 없는 선(線)이 있다. 그것을 존중한다. 그리고 황장엽씨가 그리도 염려하고 그리워하는 손녀 지현이를 무사히 안아보기를 바랄 뿐이다.
--- 99/6/19 조창완(chogaci@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