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한 권만 읽을 셈이었다. 그러나 첫 장부터 거세게 몰아붙이는 이 책의 마력에 휩쓸려 도저히 중간에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아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우리' 이야기이다. 30대 후반의 두 여주인공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이 책에는 "사랑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며, 자아가 확장되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랑'을 지금 자신의 일로 바꾸어 보라.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 한비야(오지여행가, 긴급구호활동가)
처음에 나는 밤송이 하나를 받아 들고 그것이 인생이라 여기며 쩔쩔매고 있었던 것 같다. 손바닥뿐 아니라 온몸을 찔러 대는 그것을 버릴 수도, 감싸 쥘 수도 없었다. 겨우겨우 밤송이를 까고 그 안의 것을 꺼내 들었을 때는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산다는 게 밤송이 같을 수가 있는가. 그때는 진갈색으로 빛나는 밤톨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삶이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에 진갈색 껍질을 벗겨 보았을 것이다. 그 안에는 연갈색 융단 같은 보늬가 있었고 그때는 또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밤알을 손바닥에서 굴리며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사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만큼 살면서 내가 터득한 게 하나 있다면 어떤 실수든 어떤 시행착오든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게 낫다는 것뿐이다. 앞으로도 삶은 반복되는 실수와 시행착오로 이어질 것이다. 문제는 그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야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소설과 내가 서로에게 의미 있고, 소설쓰기와 내가 서로 사랑한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것은 깊고 충만했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나는 주변에 있는 많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더 이상 어머니 세대의 가치관으로는 살 수 없고, 그렇지만 새로운 가치관은 정립되어 있지 않고, 따를 만한 삶의 모델도 없고, 그녀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별반 개선되지 않은 세상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가는 내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들, 학력만 높아진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은 서로 비슷한 정서적 장애를 견디며, 비슷한 실수와 시행착오를 범하며, 비슷한 어려움을 감수하며 사는 것 같아 보였다. 이 작품 곳곳에는 그런 친구들의 얼굴이 다양하게 스며 있다. 그 친구들을 포함하여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과 조근조근 속내 이야기를 나누는 심정으로 이 작품을 썼다. 또한 그 여성들을 반쪽으로 삼아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성들도 우리의 이야기 마당에 간곡히 초청하는 심정이었다.
--- 김형경
이 소설은 내내 '이건 너를 위해서 씌어진 글이야'라고 속삭였다. 진실을 말하는 거울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물음이 건너갔고 대답이 무의식 속으로 휘돌아 들어왔다. 그의 주인공들처럼 가끔은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 비명을 질렀다. 알고 보니 김형경의 소설은, 여자로 사느라고 골병이 든 우리들을 위한 원고지 2천6백 매자리 처방전이었다. 덕분에 나는 얼마간 신나게 살 만큼은 치유되었는데,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여성들과 공유하고픈 치유의 경험이기도 했다.
--- 최보은(프리미어 편집장, 문화칼럼니스트)
이 소설에서 나는 한순간의 휴식도 없이 정신의 칼날 위에 몸무게를 온통 지탱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 번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곤 했다. 우리 시대를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 정신분열적 조건을 다루는 그의 내적인 치열함을 누가 흉내낼 수 있을까.
--- 조선희(씨네21 전 편집장)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30대 중후반 전문직 여성들이 함께 모여 '오늘의 여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준말인 '오·여·사'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여성과 출판, 여성과 법률, 여성과 영화, 여성과 건축 식으로 자신의 분야에 대해 그 시간의 주체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여성으로서의 삶에 진지한 문제 의식을 갖자는 것이었다.
인혜는 전화를 받고 간 그 모임에서 오랜 친구인 세진을 만난다. 인혜와 세진은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대학 때도 함께 자취를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점점 말이 없어지고 곁을 주지 않는 세진에게 지쳐 갔던 인혜는 대학교 2학년 때 짐을 챙겨 세진 곁을 떠났다. 그 후 십 몇 년 동안 풍문으로 소식만 듣거나 우연히 만나 안부만 묻고 헤어졌다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겨우 차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독신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해 얘기하는 도중, 세진은 사정이 있다며 먼저 일어난다. 인혜는 세진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읽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말한다. 인혜는 사춘기 시절 세진을 좋아했던 만큼 소외감, 상실감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었다. 대학 시절 세진을 떠난 후 그 상실감을 추스르며 시간을 보내다가 민규호라는 남자를 만났다. 하지만 규호가 성불능이라는 것을 안 것은 결혼 후였고 그는 점차 폭력과 음주를 일삼는 사람으로 변해 갔다. 규호와 이혼한 뒤에야 인혜는 성이 무엇인지 결혼 제도가 무엇인지 이해되었고 그때는 이미 규호도 재혼한 후였다.
인혜는 여러 남자를 만나면서 사랑의 환상을 믿는 대신 육체의 감각을 믿었고, 연애를 삶을 생기 있고 역동적이게 하는 일종의 게임으로 생각했다. 삶이라는 것은 일종의 우연이거나 농담이고, 사랑은 그보다 더 가벼운 무엇이라고. 인혜는 사랑을 믿지 않지만 원고를 부탁 받고 간 출판사 사무실에서 만난 이진웅은 첫 만남에서부터 낯이 익었다. 인혜는 진웅에게 먼저 밥이나 먹자고 말을 걸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인혜는 그가 기혼남이라는 걸 알지만 그를 모텔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성적으로 장애가 있는 진웅에게 연민을 느낀다. 둘의 만남이 지속될수록 아직도 사랑의 순수함과 열정을 믿는 진웅에게 인혜는 휴식 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점점 끌린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감을 주며 정상적인 성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세진은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아보기로 한다. 의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 병원이나 한의원에 가도 소용없고, 몸이 계속 약해지다가 헛것이 보이고 가위눌렸던 점, 심리적인 무기력 상태와 정서적인 공백 상태, 무엇보다 집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공포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또 문제 해결을 위해 스님, 법사, 지관, 풍수학자, 도교 수련자, 만신, 안수 집사 등을 만났지만 가슴에 쌓인 게 많아서, 독신자여서 그렇다는 결론만 얻었을 뿐이라고 했다.
의사의 요청에 따라 지금까지 자라 온 과정도 이야기하면서 세진은 놀랄 정도로 가슴이 아파 오며 힘이 드는 것을 느낀다. 생후 18개월에 외가로 보내져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외할머니 손에 자란 일,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가 이혼한 것, 엄마는 고향으로 가 간호사를 하고, 아버지는 재혼해 네 자녀를 남긴 채 12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 그리고 대학 2학년 때 선배에 의해 당했던 성폭행......
의사와의 상담이 나날이 계속될수록 세진은 점점 자신의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된다. 정면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점, 남에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없는 점, 이성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없는 점 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피해 의식과 항시적인 분노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의사는 유아 때 당연히 생겨야 하는 애착, 집착의 과정이 없는 게 문제이며 그런 문제점이 다양한 방어 의식을 낳았다고 말한다. 의사는 그런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해야 한다고 했다.
세진은 인혜에게 전화해 좀 만나 달라고 말한다. 세진은 그동안 아팠던 일들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극도의 공포와 어지러움으로 제정신이 아니던 다음날 법사를 찾아가 구명 시식 날짜를 오늘로 잡았는데 혼자 가기가 겁이 난다고 했다. 구명 시식 하는 도중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통곡하는 세진의 모습을 지켜보며 인혜는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빈틈없던 세진에게서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다.
세진은 구명 시식 때 고마웠다며 인혜에게 밥을 사준 뒤, 함께 산에 가서 차 한잔 마시자고 했다. 세진과 미리 약속한 듯한 사람 몇 명이 산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함께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야하고 뻔뻔스럽게 변한 세진의 모습에 낯설었던 인혜는, 한적진 폭포물에서 세진이 일행들과 알몸으로 목욕한 후 솔잎차를 마시며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충격을 받는다.
어느 날 인혜가 울먹이는 세진의 전화를 받고 가보니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고 세진의 애인인 경호는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었다. 인혜는 고속도로를 난폭하게 질주하는 세진에게서 공격적이고 조급하며 분노에 찬 기운을 느낀다. 뜻 모를 분노에 휩싸인 세진은 급기야 사고를 내고 만다.
인혜와 세진이 입원한 병원에 진웅이 찾아온다. 둘만의 여행에 다녀온 뒤 인혜는 진웅에게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를 볼수록 점점 더 미련이 생긴다. 세진은 병원으로 찾아온 경호에게 소리를 지르고 소동을 일으킨다. 인혜는 분노에 차고 공격적으로 변한 세진에게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묻는다. 세진은 억압된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나라 여성들은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여러 가지 해악이 따른다고 한다.
정신분석이 계속될수록 세진은 무의식에 억압된 자아의 다양한 파편들을 본다. 또한 자신이 섹스를 싫어하며 성행위 전이나 후에 화를 낼 정도로 성에 대해서 불능 상태인 점, 사랑을 두려워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도 유년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분노의 감정 뒷면에 그만큼의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경멸해 온 모성 부족, 자기중심성, 질투심이 고스란히 내 안에 있는 것들임을, 따라서 그런 추악한 나의 모습도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 안에 상처 입은 채 남아 있는 유년의 아기를 보살피면서 억압해 둔 무의식과 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한 해 동안 계속되어 온 '오여사' 모임이 망년회를 하는 날, 그동안 얘기됐던 다양한 원제들을 부제로 밝혀서 책으로 출간하기로 한다. 세진은 인혜에게 그동안 자신의 내면에 억압된 감정을 인혜나 경호처럼 가까이 있는 엉뚱한 사람에게 드러냈다며 사과했다. 그리고 정신분석을 받으며 기록한 노트들을 주며 자신은 모든 걸 털어 버리고 유럽으로 여행 갈 예정이라고 했다. 풀기가 한풀 꺾여 보이는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는 세진을 보고 인혜는 이제 세진이 어떻다고 규정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인혜는 진웅의 아내를 만난 후 진웅과 이별할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자신을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진웅 곁에서 그가 잠들기를 지켜보다가 그의 곁을 조용히 떠난다. 인혜는 세진의 노트를 읽고 결국 자신과 세진은 같은 콤플렉스를 지녔음을 깨닫는다. 세진이 느끼는 감정을 자신도 고스란히 느꼈음을. 다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런 결핍감을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남은 인생을 위해 회사를 그만둔다. 시간이 흘러 받은 세진의 편지에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자신의 무의식과 소통하고 있는 세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인혜는 미국에 있는 진웅에게 만나러 가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