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과 폐단이 표출되는 속에서 귀족 사회 내부의 족벌과 지역의 대립, 이념의 대립, 외교 정책의 대립, 고구려 계승 의식에 대한 대립 속에서 개경파와 서경파와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자겸의 난 이후, '개경의 지덕은 쇠하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다'라는 풍수지리설을 배경으로 서경에 대화궁을 건설하며 서경 천도에 나서는데, 이는 중흥 공신으로 권세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천도가 세력의 근거지를 잃는 것이었기에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서경 천도에 반대하게 되고, 천도의 좌절 속에 묘청은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로 삼아 봉기하나 김부식에 의해 1년 만에 진압당하고 만다. 이로써 서경파는 몰락하고 분사 제도 폐지로 서경의 지위는 격하되고, 금에 대한 굴복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고려의 북진 정책은 좌절되고 만다.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 서경 천도 운동 ―신채호《조선사연구초》 중에서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김부식)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약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망이·망소이의 난: 무신의 난은 문벌 중심의 고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들면서 귀족 사회를 무너뜨렸다. 특히 정치 체제와 신분 질서가 바뀌어 정치 질서는 무신들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정권을 잡은 무신들의 부패와 횡포가 심해져 농민과 천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또한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로는 천민 출신의 무신이 크게 세력을 쥐는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민중을 자극하여, 사회적인 부당한 대우와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저항 운동으로 번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무신 정권의 수립 직후부터 최충헌의 집권까지 약 30년 간 계속된 이 운동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으며, 특히 남부 지역이 심하였다.
특히 천민의 저항 운동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명종(1176년) 충청도 공주의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이었다. 명학소는 천민 수공업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그곳의 천민들이 망이·망소이를 앞세워 신분 해방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공주를 점령하고 개경을 향하여 북진, 청주와 아산 일대를 점령한 후 1년 반 동안 충청남북도 일대와 경기도 남부까지 휩쓸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천민이나 농민들의 주장을 정치에 반영시키기 위한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향·소·부곡 등 천민들의 집단 거주 지역도 차차 양민들의 군현으로 승격되기 시작하였다.
천불천탑이 세워진 운주사: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전체가 배(舟)의 형상으로 운주사는 배를 젓는 노의 위치에 해당된다. 송광사의 말사이기도 한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하며,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 좌우의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1천 개가 더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운주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4년 유적발굴 조사가 실시되면서부터다. 이 절의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신라 말 도선 국사가 풍수지리에 근거,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에 비유, 배를 진압할 물(物)이 없으면 침몰하기 쉽기 때문에 그 중심 부분에 해당하는 운주곡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워 내실을 기했다는 것이다.
운주사의 많은 불탑, 불상 중 최고의 압권은 와불이다. 이 와불은 천불천탑의 마지막 천불인데 이 불상으로 일으켜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와불을 막 일으켜세우려는 순간 첫닭이 우는 바람에 일으켜세우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와불의 아랫 부분에는 이 탑을 일으켜세려고 노력한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 있다. 아마도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이 땅의 민초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운주사 석불석탑의 특징은 다른 여느 사찰의 그것과는 달리 불상들이 매우 투박하며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불상의 얼굴이 권위적이거나 근엄하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필부의 모습 그대로다. 아마도 소외받던 민초들의 염원이 이러한 형상의 불상을 빚어내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은 어쩌면 이 와불이 벌떡 일어나 새세상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염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묘청은 인종에게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서경 천도를 주창한다. 대화세(大和勢)가 있는 서경으로 천도하여 북진정책을 펼침으로써 사대외교의 비굴함을 일소하고 옛 고구려 영토를 찾아 국력을 만천하에 널리 떨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김부식을 필두로 한 개경파는 칭제건원에 대한 반기를 든다. 한편 노역으로 서경의 신궐 공사장에 끌려나온 백정농민 순보는 살판쇠로 귀족들 앞에서 기예를 선보인다. 이때 기생 월향은 그의 기예를 보며 흠모하기에 이른다. 순보의 동료 만덕이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태형으로 죽게 되는데, 이때 만덕이는 순보에게 자신의 아들 망이를 부탁한다.
자식이 없던 노마의 손에서 자라나 기생이 된 월향의 본명은 입분이. 노마는 그녀에게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버들잎 잎을 기녀가 되기 전에 문신을 새겨준다. 신궐 공사장에서는 천불동의 천불천탑이 있는 그곳이 용화정토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순보는 미륵세상을 꿈꾸며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이때 순보는 입분이와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오래전 그녀과의 인연을 기억하게 되나, 만남은 잠시 먼길을 떠나는 순보는 입분이와도 다음을 기약하며 천불동을 향해 떠나고 만다.
순보와 삼정이 일행은 미륵세상을 찾아 떠나는 백정농민들은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과 맞서 싸우면서도 고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입분이는 순보의 아들을 미르를 낳게 되고, 훗날 온갖 역경 끝에 그 세 사람은 해후하게 되나 토벌군들에게 쫓겨 헤어진 입분이는 밀교도들에 의해 교주로 떠받들어지게 되며, 세 사람은 다시 이별을 하게 된다. 한편 순보는 나라를 잃었을 때 망국의 한을 잊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제작되었던 유엽도를 이용,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으려 한 이자호의 권유로 천불동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