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라난 곳, 그린빌
나는 1946년에 테네시 주 채터누가에서 태어나 생후 6개월 되던 때부터 줄곧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자랐다. 인종과 관련한 나의 무거운 짐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보낸 성장기에
싹텄다.
1860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인구는 약 7십만 명이었다. 그중 60퍼센트(42만 명)가 흑인이었고, 그중 9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노예였다. 아버지가 태어나기 59년 전밖에 되지 않는 불과 150년 전의 일이다. 그로부터 90년 후인 내가 아홉 살 때에도 그린빌에 인종 분리가 거의 절대적으로 강제 시행되고 있었다. 급수대, 공공 화장실, 공립학교, 공설 수영장, 버스 좌석, 주택, 식당, 병원이나 치과의 대기실, 버스 정류장 대합실 등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다니던 교회를 비롯하여 교회들에도 그 나름의 분리가 있었다. 1962년에 나의 모(母)교회는 투표를 통해, 흑인을 예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이 나의 고향이다. 그러니 거기서 자란 흑인 청년, 또는 한 세대 전에 애틀랜타에서 자란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이 자유주의 기관(시카고 신학대학원이나 크로저 신학대학원 같은)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학교들이나 기관들은 흑인을 철저히 차별했고, 남부의 학교들일수록 특히 더 심했다.
양심적으로 고백하건대, 아무리 그럴싸하게 온갖 합리화를 했어도 결코 ‘평등한 분리’가 아니었다. 존중과 정의와 사랑이 아니었고, 따라서 기독교가 아니었다. 인간을 비하하는 흉측한 일일 뿐이었다. 곧 보겠지만, 나도 거기에 공모했기 때문에 회한이 많다.
이 책의 초점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다. 내 삶과 희망은 복음에 빚진 것이다. 복음이 없다면 나는 아직도 인종차별주의자로 교만하게 활보하고 다니거나, 아니면 ‘백인의 죄책감’에 죽도록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 시절의 나는 명백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내 태도와 행동에는 거의 모든 면에서 백인우월주의가 배어 있었다. 무심한 죄에서 깨어나다.
인종차별에 무심한 죄에서 나를 깨어나게 한 가장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가 대학 졸업반 때 찾아왔다. 1967년 12월에 결혼을 1년 앞두고 노엘과 함께 대규모 어바나 선교대회에 참석했다. 보수침례교 해외선교회 총재이자 파키스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워렌 웹스터(Warren Webster)가 수천 명의 학생들 앞에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총재님이 선교지에 있는 동안 총재님의 딸이 파키스탄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 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이 질문은 웹스터에게 인종이나 민족의 딜레마가 되리라는 우려의 관점에서 제기된 질문이었다(그때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기 넉 달 전이었다). 웹스터는 굉장히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미국의 백인보다 파키스탄의 그리스도인이 낫습니다!” 실제 표현은 그보다 더 직설적이었던 것 같다(미국의 부유한 금융업자라는 말도 들어가지 않았나 싶은데 확실히는 모르겠다).
표현이야 어찌됐든 그 말은 노엘과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략)
처참한 현실을 실감하다
그 후로 독일에서 3년(1971년 6월부터 1974년 6월까지)을 지내면서 1972년 크리스마스 때만 고국을 다녀갔다. 3년 동안 자기 나라를 떠나 사는 이점은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나 자신이 미국과 미국 교회보다 훨씬 큰 현실의 일부로 느껴졌다. 게다가 끔찍한 인종차별주의인 독일 나치즘의 역사가 불과 26년 전의 일이었다. 히틀러는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자살했다.
우리가 살던 뮌헨에서 북서쪽으로 16킬로미터 거리에 다하우 강제수용소가 보전되어 있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Nie Wieder)이라는 이름의 기념관도 함께 있었다. 물론 일요일에 나들이 삼아 갈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갔다. 철조망, 줄지어 선 막사, 3층짜리 좁은 침상, 화장용 노(爐), 교수형에 쓰던 방, 허울 좋은 샤워장 등 모두가 그대로 있다. ‘지배 민족’이라는 아리아인족의 진화론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이 그렇게 증언되고 있었다. 인종차별의 처참한 잔재가 물리적, 은유적으로 내 삶의 지척에 있다 보니 내 사고의 방향 전환이 긍휼 쪽으로 더욱 굳어졌다.
교외의 교실에서 도심의 교구로
1979년 가을,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적용하고 싶은 열정 때문에 직업의 위기에 빠졌다. 벧엘 대학에 통지하고 교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1980년 여름에 베들레헴 침례교회의 청빙을 수락했다. 미니애폴리스 도심부의 언저리에 위치한 109년 된 도심 교회였다. 내 생각에 그 위치는 내 열정을 실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서쪽은 부유층의 상업 지역이었고, 북쪽으로는 하얀 천장의 메트로돔 경기장(한창 건축 중이었다)과 경공업 단지가 있었다. 동쪽에는 미네소타 대학교가 있었고, 남쪽은 그 도시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구 분포가 다양한 엘리엇 공원과 필립스 지역이었다.
우리는 그 도시로 이사하여 그 뒤로 쭉, 교회에 걸어 다닐 만한 거리인 엘리엇 공원과 필립스 지역에 살고 있다(어언 30년이 다 되었다). 2005년 현재 이 지역의 인종별 인구 분포는 백인 24.6퍼센트, 흑인 29퍼센트, 히스패닉 22퍼센트, 미국 원주민 11퍼센트, 아시아인 5.9퍼센트, 기타 7.4퍼센트다.12 세월이 가면서 이민 추세도 변화하여 다양한 집단이 때로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했다. 어쨌든 11번가 사우스의 내 서재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인파의 구성은 대략 그렇다.
50세에 흑인 소녀를 입양하다
여기가 내가 있고 싶었던 곳이다. 나는 여기서 죽고 싶다. 물론 하나님이 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다민족의 자리를 떠나려면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이 동네에서 네 아들을 키우며 노엘과 내가 하던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는 이유는 우리 아이들이 거리에서 저녁 뉴스를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1996년 쉰 살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지아 주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아내의 친구이자 낙태를 반대하는 사회사업가는 노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정이 필요한 어린 소녀가 하나 있는데 왠지 당신 생각이 났어요.” 딸을 달라고 기도했던 노엘에게 하나님은 그때까지 네 아들을 주셨다. 혹시 기도 응답일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내 나이는 50이었고 그 소녀는 흑인이었다. 나이 쉰에 다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고민하는 것 자체를 무모하게 여겼다.
그 무렵 노엘과 나는 오래오래 걸으며 함께 주님을 구하곤 했다. 결국 응답을 받았다. “아내를 사랑하고, 이 어린 소녀를 네 친딸처럼 사랑하며, 죽는 날까지 인종 화합에 헌신하라.” 타인종과 한식구가 되는 것보다더 목사의 마음을 인종의 다양성에 얽어매는 것은 없다. 그때가 15년 전이었다. 지난 세월 우리 교회는 인종간 · 민족간 다양성과 화합을 더 깊고 넓게 추구해 왔다(그동안 우리 교회가 한 일의 일부를 부록 3에 소개했다).
나는 다민족 도심의 모범적 목사가 아니다
지금 성공한 다민족 지도자로서 이 책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며, 인종간 다양성의 전문가도 아니다. 다민족 교회를 위한 실용적 묘책을 찾으려 한다면, 여기서 작별을 고하는 게 좋겠다. 나에게는 그런 게 없다. 이 책을 쓰는 이유는 성경의 진리, 내 마음의 확신, 내 가슴의 열망 때문이다.
인종간 다양성과 화합을 궁극적으로 유의미하게 이루려면 복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 믿는다.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제하시고 죄 사함과 성화(聖化)의 능력을 주신다는 기쁜 소식이다. 인종간 · 민족간 다양성을 신속 · 간편하게 하려고 복음의 충만함을 버린다면, 고작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와 모조품을 지어내는 것뿐이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다양성과 화합은 복음으로만 가능한데, 그 유일한 길을 잃는 것이다. 다른 모든 종류는 그럴싸한 함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만일 완전한 다양성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