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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 2014년 03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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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이전의 기억이지만 책을 훔친 적이 있다. 집에 돌아가 사달라거나 제목을 기억했다 사면 그만인데, 가격도 전자기기나 웬만한 장난감보다는 훨씬 싼데, 그땐 왜 그랬을까. 물론 책의 연속적 탐욕 때문에 한 권으로 완전히 채우기는 힘들겠지만 일단 채우면 한동안 포만감에 행복해진다. 그런데도 그 순간에는 이상했다. 충동적이고 분별력이 없었다. 들키지 않았어도 당시 충동 그 이상이하도 아니었던 기억이 아픈 가시처럼 박혀있다. 부끄럽다.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은 문학에서나 가능하다. 책도둑도 도둑이다.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둑이다. 선물 받은 책으로 읽은 소설 <책도둑>의 줄거리는 어느새 잊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할 만큼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만은 또렷하다. 제2차대전 중의 독일로 가는 기차 안에 엄마와 어린 남매가 있다. 시린 기운이 가득 내려앉은 냉전의 도시는 어둡고 불온하다. 전쟁 속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아이로 향할 때 우리는 자주 우리의 관리영역을 벗어난 죄책감을 느낀다. 아빠 없이 전쟁통을 통과하는 삶이란 더 말해 무엇하랴.
추위와 굶주림으로 동생을 땅에 파묻고나자 기다렸다는 듯 버려진 집에서 다소 억척스런 새엄마와 다정한 새아빠를 만난다. 좋은 꿈을 꾸는 아이의 세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주어야 한다. 의무감보다는 벅찬 연민과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여 아이의 세계를 지키는 어른은 아름답다. 그들은 칭송받는다. 투쟁하는 어른들과 그런 어른 틈에서 상처입으면서도 어김없이 자신만의 꿈을 꾸며 상냥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계속되는 시위, 불태워지는 서적들, 젖은 땅과 뒤덮인 눈과 흩뿌려지는 순수와 우정이 순조로운 듯 보이지만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맴돈다. 우연히 집으로 숨어든 어떤 아저씨는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책을 보물처럼 품고 있다. 어느 시대나, 아프고 고약한 시대일수록 책의 가치는 책 이상이다. 혼돈과 비극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말(言)과 책에 대한 사랑으로 삶을 버틴다는 기적 같은 묘사는 더이상 거짓이 아님을, 무엇보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며칠 밤을 꼬박 새울 의지 충만한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은 절대 책을 향한 욕망을 잠재우지 못한다.
모든 걸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이들이 악착같아서 좋은 일은 별로 없다. 언젠가 빼앗기거나 버려야 할 것들에 집착한들 소용없기 때문이다. 다만 책의 소용所用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책은 무엇이며, 또 어떤 역할을 하는가. 특히 이 전쟁의 시대에 책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전에 한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으로 한스의 가족이 기꺼이 숨겨준 유태인 막스는 위험할까봐 그들의 곁을 떠나며 리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의 글 속에 언제나 살고 있을게." 책은 우리 혹은 우리 중 누군가의 이야기다. 막스는 우리가 우리가 만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제일 처음, 가장 잘 아는 이였다. 리젤이 시장 부인의 배려로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는 걸 시장에게 들킨 후 새엄마 로사는 빨래 일감을 잃고, 정당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스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밤낮으로 계속되는 징집과 공습과 대피는 누군가를 살리고 사랑한다는 사실마저도 변하게 할 수 있다. 책은 어두운 삶에 희망과 꿈을 드리우고,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도록 도와주는 지식과 감정을 갖게 하기에 나쁘다는 그들. 가질 수 없는 책 때문에 겪는 애타는 갈증과 가져서는 안 되는 책을 가졌단 이유로 겪는 모질고 혹독한 고통 중 어느 편이 더 낫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잿더미와 연기로 가득찬 세상에도 서로를 위한 마음과 배려가 남아있는 한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 리벨의 어린시절은 굶어죽은 남동생, 헤어진 엄마, 상처입은 고양이처럼 지하실에 숨어든 초점 흐린 눈을 지닌 막스, 언제나 그녀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 남자친구 루디, 친절하고 다정한 새아빠 한스와 투박하지만 마음씨 여린 새엄마 로사로 기억되겠지만, 책으로 배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누군가의 눈으로 배운 세상이 얼마나 멋졌는지 기억하는 한,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먼훗날 언젠가 히틀러라는 저주스런 이름에 담긴 전체주의의 유령과 전쟁은 한낱 배경이 되어버릴 것이다. 책은 이야기고, 이야기는 곧 책이다. 책은 상상이상의 온도에서 끓는 열망이자 꿈이고, 미래다. 아, 잊혀지지 않는, 사랑스러운 이들! 너무 좋아한다는 의미 안에는 상처 받을지도 모르는 두려움과 언젠가는 헤어질거라는 초조함을 내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받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것인가, 덜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물음에는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다. 여전히 책은, 책이다. 나 역시 한 권의 책이고, 나는 책을 읽고 당신을 읽고 누군가를 살리고 사랑하고 보듬는다. 이 불안한 하늘 아래, 책은 우리가 기대고 숨쉴 수 있는 영원한 존재다. 자, 이제부터 이야기의 힘이 폭발한다. 아까도 지금도 나중도, 언젠가 우리의 꿈이 꽃처럼 피어나는 이야기가 되기를. 한 권의 책이 된 이야기가 언제까지나 잊히지 않기를.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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