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놉시스
마약조직 골든 게이트를 쫓다 동료 형사를 잃은 강청식. 그는 경찰이란 거대 관료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로 오직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수사하며 밀어붙이는 독불장군이다. 어느 비오는 날 마약조직의 창고로 혈혈단신 찾아간 강청식은 마약조직의 보스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를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감사를 받게 되고 면직 처분에 형사고소까지 될 수 있는 위기에 처한다.
그렇게 경찰 청문관들의 감사를 받던 어느날 강청식은 선배 경찰인 백진수 총경의 호출을 받는다. 총경은 사면초가에 처한 강청식을 돕는다는 구실로 어려운 사건 하나를 맡긴다. 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 홍정훈의 약혼자인 김지연 관장이 연관된 위작 사건의 수사였다. 김지연 관장은 아시아 최고의 화랑인 나래 갤러리의 대표로, 전속화가인 고혼기 노화백의 미발표 작품들의 전시회를 기획하여 개최했다. ‘비속의 나신전.’ 1980년대 고혼기 화백은 김지연 관장의 어머니인 이미애 대표의 젊은 시절 나신을 그려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추상화가인 고혼기 화백이 그린 유일한 인물화 시리즈로, 비가 내리는 듯한 화폭에 펼쳐진 몽환적인 여인의 나신이 슬프고도 기묘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김지연 관장의 갤러리 나래는 그 시절 고혼기 화백이 발표하지 않은 나신 작품들을 모아 ‘비속의 나신전’을 개최하면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그때 거래된 그림들이 사실은 위작이라는 소문이 미술계에 돌기 시작하고, 전시회에서 작품을 구매한 한 그림 애호가가 이를 경찰에 고발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위작 사건일 수 있지만, 김지연 관장은 유력한 대선 후보인 홍정훈 변호사의 약혼자였다. 자칫 잘못하면 경찰이 선거에 개입한다는 지탄을 받을 수도 있는 사건. 마약조직 보스 살해 건으로 사면초가에 처한 강청식은 이 사건의 배경에 뭔가 부정한 공작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건을 맡게 된다.
강청식은 위작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탐문하는 것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부동산 개발로 큰 돈을 벌어 미술품에 투자를 시작한 전형적인 강남의 부호인 양회장, 도도하고 아름답지만 철저히 자신의 몸짓과 삶을 연기하는 듯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김지연 관장, 사회 여론의 극심한 비난을 받던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밝혀 내어 일약 대선 정국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강직한 성격의 홍정훈 변호사, 그리고 자신이 오래전 그린 나신들의 몽환 속에 빠져 살아가는 늙은 화가인 고혼기 화백. 강청식은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만나면서 위작 작품의 배후에 교묘한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위작을 소재로 예술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라는 고전적 주제를 다루면서 현대 미술 세계의 위선과 모순을 파헤치는 한편, 사랑과 욕망, 정치와 음모라는 또 다른 주제들을 씨실과 날실로 유연하게 엮어내면서 한편의 비정하고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 거칠고 황량한 내면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작가는 특유의 시적이고도 몽환적인 문체로 아름다움을 꿈꾸는 자들의 허허로운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섬연한 시어로 직조된 비정한 하드보일드 세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는 예의 하드보일드 작품들이 그러하듯 협박과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의 아수라도가 아니다. 오히려 냉혹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더욱 비정해 보이는 세계의 몽상이 하드보일드라는 서사의 형식을 빌려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보통의 하드보일드 소설과는 다른 이 작품만의 유니크한 매력일 것이다.
◆ 캐릭터 [인물들]
강청식. [정보과 형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외롭게 걸어가는 독불장군 형사. 거칠고 냉소적인 성격이지만, 형사로서의 신념과 정의감만큼은 확고하다. 지독히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인물로 현실적인 계산이나 판단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목표한 범죄자를 잡는 일에 사냥개처럼 달려든다. 마약조직 골든 게이트를 수사하다 정치권과 고위 경찰에 연이 닿아 있는 조직보스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동료 형사를 잃는다. 그에 대한 복수로 강청식은 마치 귀신에 씌인 것처럼 비 내리는 어느 날 조직 보스를 찾아가 살해한다. 이 사건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정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위작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다.
강청식은 무척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인물이지만, 그에겐 마치 지나가 버린 아름다운 꿈처럼 느껴지는 가족이 있다. 학교 폭력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버린 딸. 강청식은 집에 있는 날이면 딸이 숨어든 벽을 종일 쳐다보며 오래 전 자신의 손으로 느낄 수 있었던 딸의 아름다운 체온을 상상해 보곤 하다. 마치 고혼기가 이제는 자신의 손을 떠나버린 아름다운 나신의 그림들을 몽상하곤 하는 것처럼.
김지연 [큐레이터]
고혼기 화백의 ‘비속의 나신’의 모델이었던 아름다운 여인 이미애의 딸이자 어머니를 이어 갤러리 나래의 대표가 된 인물. 차갑고 고혹적인 미모의 소유자. 대선후보인 홍정훈의 약혼자이자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자신의 삶을 드라마틱한 절정으로 이끌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어머니 이미애에 대한 지독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어 어떻게든 갤러리 나래에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지우고자 한다.
“늘 몸을 봄날의 꽃처럼 환하게 피어 있게 해야 한단다, 몸을 아름답게 지속시킨다는 건 너의 몸속에 깃든 단 하나의 화초인 정신이 시들지 않도록, 너의 몸속에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지 않도록 가꾸는 일과도 같단다" 아름다운 몸이 곧 정신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온 김지연은 삶을 인형극의 무대처럼, 자신의 몸을 아름다운 무대의 인형처럼 여긴다.
어머니가 발굴하여 키운 고혼기 화백의 작품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욕망에서, 그리고 약혼자인 홍정훈 변호사에게 대선 자금을 만들어주려는 계획으로 고혼기 화백의 위작들을 제작하여 1980년대 미발표작이란 기획으로 비속의 나신전을 개최한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갤러리 나래는 위작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고, 김지연은 자신의 아름다운 궁전인 갤러리 나래의 명예를 지키고자 약혼자인 홍정훈을 배신한다.
고혼기 [화가]
탐미주의자. 예술지상주의자. 1970년대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구금되어 고문을 당한 후로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1980년대 실험적인 작품들을 발표하여 신진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내다 마치 미의 화신 같은 갤러리 나래의 대표 이미애를 만나 처음으로 인물화를 그린다. 그것이 바로 고혼기를 세계적인 화가로 만든 비속의 나신들. 이미애가 죽은 후로 고혼기는 더 이상 인물의 누드화를 그리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이미애의 딸인 김지연이 갤러리 나래의 관장이 되고, 고혼기는 때로 김지연의 모습에서 이미애의 환영을 보곤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김지연이 여러차례 자신의 나신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음에도, 고혼기는 결코 그녀의 나신을 그리지 않는다. 김지연의 몸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 그녀의 어머니가 지니고 있던 소멸에 가까운 탐미적인 기운은 지니고 있지 않았기에.
어머니 이미애가 세계적인 큐레이터가 된 것은 오롯이 고혼기가 그녀의 나신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지연은 고혼기 화백이 다시 비속의 나신들을 그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미 고령이 된 고혼기 화백은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었다. 하여 김지연은 일본에서 고혼기의 위작을 그리던 젊은 화가를 불러들이고, 늙은 화가를 대신하여 그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이런 김지연의 계획을 고혼기는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그림들을 젊은 화가의 손을 빌려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일 뿐, 결코 위작을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혼기는 젊은 화가의 건강한 손과 그 손목의 힘을 통해 화폭에 펼쳐지는 비속의 나신들을 보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 생명의 환희로 도툼하게 부풀어오른 아름다운 손등,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언제나 힘찬 예술의 파도가 출렁이던 손목. ‘바로 저 손이 과거 나의 손이었다, 지금 내 육신에 덜렁거린 채 붙어 있는 손은 오래전에 죽었다. 그리고 저 남자의 손으로 환생한 것이다.’ 라고 고혼기는 생각한다.
“비속의 나신들은 모두 내 안에서 흘러나온 것들이다.”
고혼기의 몽상 속에서 그는 결코 젊은 화가에게 위작을 그리는 것을 허용한 적이 없다. 오래 자신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작품들을 다시 화폭에 펼치기 위해 젊은 화가의 손을 잠시 빌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홍정훈 [변호사]
엄정한 법치주의자. 사회의 공분을 샀던 살인사건의 변호를 맡아, 여론의 비난 속에서도 꿋꿋이 피의자의 무죄를 밝혀 내어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법치주의를 향한 그의 곧은 신념과 강직한 성격이 부각되면서 일약 정치권의 스타로 부상한다. 이 무렵 김지연을 만나 그녀의 고혹적인 미모에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된다.
홍정훈은 그녀의 불가사의한 미목이 사람을 파괴하는 아름다움이란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일생 건조하고 객관적인 법의 들판에서 살아온 그에게 김지연은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꿈처럼 느껴진다. 그가 굳은 신념으로 품은 법치주의의 세계는 한번도 그를 꿈꾸게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김지연을 만나 아름답고 혼혼한 꿈의 세계로 빠져든 것이다. 비록 그 꿈이 자신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을 위험이라 해도 그는 김지연이란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홍정훈은 김지연에게 배신을 당한다. 그가 처음 사랑에 빠지고 꾸었던 꿈은 악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정훈은 김지연을 떠나지 않는다.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 친다. 악몽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곁에서 보았던 꿈은 아름다웠던 것이다. 김지연이 위작 사건으로 구속 위기에 처하고, 그녀의 궁전인 갤러리 나래가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홍정훈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각오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