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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2년 0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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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60쪽 | 696g | 153*224*30mm |
ISBN13 | 9788932008424 |
ISBN10 | 8932008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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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30일 ~ 2024년 10월 31일
2024년 10월 01일 ~ 2024년 10월 31일
상시
58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명작으로 알려져있던 문학 작품을 직접 접해보고 나만의 방식으로 느끼는 감정의 경험은 벅차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작품이 왜 명작인지를 납득하면서 텍스트 안에 느껴지는 엄청난 힘을 나의 생각으로 담는 과정은 힘들지만 꽤나 뿌듯함을 안겨주는 작업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더욱이 명작은 읽는 사람의 관점에 의해 그 힘이 더 커진다. 독서 후의 감정은 그 명작을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며, 읽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역시 압도적인 관념과 감정의 힘을 느끼면서도 꽤나 생각해볼 지점이 많은 작품이다. 역시나 명작은 그만의 이유가 있다.
<당신들의 천국>은 나병 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록도에 부임한 조백헌이라는 인물이 섬 병원의 원장을 겪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장은 섬을 모두의 낙원으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환자인 원생들은 원장의 의지를 쉽사리 따르지 않는다. 원장이 꿈꾸는 낙원은 누구를 위한 천국일까. 원장은 그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환자들을 위한 '동상'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반복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든다.
낙원을 만들고자 하는 원장의 의지에 이전 전임자들을 겪어왔던 환자들은 '그러나 보다'의 무심함으로 응답한다. 원생들에게는 과거 주정수라는 원장이 자신의 동상을 만들면서 환자들을 억압했던 역사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조백헌 원장은 이러한 섬의 뿌리깊은 불신과 두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축구 시합을 도입하여 소속감과 활기를 안겨 주려고도 하고, 대규모 개간 공사를 통해 섬의 제약을 넘어 새로운 환경을 만들려고도 한다. 이른바 과거의 고착화된 관행을 깨는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려고 했지만, 그것은 과연 아름다운 결과로 보답받을 수 있을까.
원장의 신념은 환자들로 하여금 '동상'으로 상징되는 원장의 권위와 억압을 재현하리라는 두려움을 안긴다. 신념은 과연 환자를 위한 것인가, 원장을 위한 것인가. 누구나 신념은 개인을 향할 때 에너지를 극대화시키기 마련이다. 이타적인 공헌과 기여가 자신의 보람과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원장이 갖고 있는 섬을 지배하는 권력자로서의 위치는 그의 선의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것은 조백헌 원장의 전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자는 명분을 독점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 명분을 함께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다.
전임 원장 주정수는 환자들의 노동력으로 지상 낙원을 위한 공원을 만들지만 그것은 그 자신과 그것을 자랑해보기기 위한 외부인을 위해 쓰인다. 섬에 꾸며진 낙원은 원생들이 아니라 원장과 그 섬을 다녀간 사람에게만 존재했다. 명분은 당사자들의 노력을 제물로 바치고 당사자들이 아닌 권력자와 외부인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역설적인 현실, 그것이 반복되어 갔던 것이다. 서로의 생각이 배반하고, 서로의 이해가 배반하고, 결과를 위한 과정이 배반하는 연속된 배반의 시대를 이들은 살아 왔다고 볼 수 있다.
명분의 뒤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동상'의 두려움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치욕과 절망과 배반의 기억으로 얼룩진 환자들을 위해 조백헌 원장은 섬을 육지와 잇는 대규모의 공사를 시작한다. 끝도 없이 이뤄지는 힘든 공사 과정을 통해 또 다시 배반의 기미는 시작된다. 서로의 원망과 절망감은 되풀이된다. 원장은 환자를 위해 일하고 환자는 원장을 위해 일하는 이어지지 않는 갈등의 반복. 조백헌 원장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욱과 주민들은 희망과 신념이 또 다른 속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한다. 누구 하나 진정한 섬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원장은 섬을 떠나게 된다.
<당신들의 천국>은 책의 내용 내내 진정한 인간의 '선의'라는 것의 의미를 파헤치는 잔인한 작품이다. 조백헌 원장은 진심으로 그만의 동상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결과적으로 남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동상의 존재가 만들어진다. 또한 환자들에게는 타고난 병으로 얻게 된 소외와 단절로 태생적인 경계심이 있다. 섬의 실세인 황노인은 그러한 나병환자들의 습성을 '자유'라고 믿어 왔다. 선의로 대하는 원장의 태도와는 별개로 환자들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살아갈 자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황노인은 이러한 자유보다 더 값진 것이 사랑이었음을 고백하고, 자유와 사랑이 공존할 수 없었던 모순을 이야기한다. 선의는 타인의 자유를 진정으로 덮어줄 수 있는 사랑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선의는 자유로울 수도 없고, 일방적일 수 없다. 하지만 선의에 대한 인간의 배신은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만들어지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일반인 원장과 나병 환자들의 간극은 각자 선의의 무게와는 다르게 서로 다른 자유를 갖고 자라났다. 특히나 나병 환자들은 그러한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사랑의 감정이 메마를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사랑으로 충만한 선의가 완성되는 것이 과연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있을까. 나병환자가 될 수 없는 일반인과, 권력자가 될 수 없는 피지배인들이 자유와 사랑을 함께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자유와 사랑의 방법이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한다. 원장의 희생과 선의의 동기가 있더라도,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일은 어느 한 쪽의 의욕이 아니라 사람들 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를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선의는 한 사람의 통제가 아닌 관계의 조화에서 만들어지므로.
그래도 훗날 다시 돌아온 조백헌 원장은 각자의 운명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운명을 함께 한다는 선의를 믿는다. 원장은 '내 운명을 함께 할 각오'로 다시 섬에 돌아왔다고 말한다. 공동의 운명을 함께 하는 각오는 일방적인 신념과 다를 것이다. 그는 믿음을 통해 자신의 선의가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백헌은 자유와 사랑에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운명이 다른 이들에게 같은 힘을 적용하는 일은 실패가 따르지만, 그럴 수록 그 힘을 잃어버리지 않고 명분과 우상을 떠나 믿음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인 사내와 병력자 사내의 결혼을 계기로 원장에서 일반인으로 다시 돌아온 조백헌은 작고 보잘것 없는 일부터 자신의 힘을 기르면서 자유와 사랑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당신들의 천국>은 끊임없이 진정한 선의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왔던 인생의 여러 순간을 되짚어보게 한다. 항상 나의 마음은 그런게 아니었는데, 결과는 선의를 배반하고 감정의 간극은 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은 과거의 회한과 원망에 대한 마음을 후벼파는 순간을 여러 번 소환한다. 그것이 상대가 그 방식으로 생각한 자유였구나. 그리고 나는 그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구나. 운명을 함께 하듯 서로의 믿음을 구하지 못했구나. 자유나 사랑이 완성될 수 없을 정도로 실천적인 힘이 부족했구나.
'흙과 돌멩이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이어져야 한다'는 조백헌 원장의 마지막 결혼 축사는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인생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많이 연구했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의의 마음은 늘 선의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주 표피적인 사랑과 용기로는 쉽게 완성되기 어려운 일이다. 선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보통의 힘이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꾸준한 사랑의 힘.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지 않는 내면의 힘이 우리들의 천국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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