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동이나 사유, 삶의 방식에서 변혁이나 혁명을 사유하는 데 맑스에게 커다란 신세를 졌다. 나는 나의 삶과 신체, 혹은 사유에 새겨진 어떤 식으로도 결코 지워질 수 없고 무효화될 수 없는 그의 강렬하고 지대한 흔적을 몹시 사랑한다. 그런 만큼 나도 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 이미 죽은 이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아마도 그것은 그의 사유를 영원히 살아 있게 하는 것일 게다. 그를 다시 살려내는 것, 그를 ‘죽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런 식으로 나는 그에게 우정의 선물을 하고 싶다. 그런 식으로 나는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
‘맑스의 영원성’에 기여하기 위해 나는 그가 그린 저 구불구불한 선을 다시 탐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의 일부를 가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도를 그리려고 할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에 더욱더 강한 힘을 싣고 더욱더 구부러지게 하여 또 다른 맑스의 얼굴을 그리고 싶다. 또 하나의 맑스를 만들어내고 싶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나의’ 맑스, ‘나만의’ 맑스를 가지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살았던 세계 속에서 사유할 뿐이고, 지금의 ‘나’를 만든 인연 안에서 사유할 뿐이며, 그럼으로써 ‘나’의 신체에 새겨진 인연의 흔적들로 말할 뿐이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맑스는, 내가 그린다고 해도 ‘나의’ 맑스가 아닌 것이다. 내가 만난 모든 것, 내게 다가왔던 모든 것, 그 만남과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흔적과 주름들, 그 모든 것들과 맑스를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게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맑스와 헤어지고 만날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맑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인 『자본』(Das Kapital)에 대해, 아니 거기서 내가 배운 것에 대해 쓰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과서화된 정통파 정치경제학도 아닐 것이고, 맑스 자신에 의해 그려진 자본의 형상에 대한 단순한 요약도 아닐 것이다. 맑스에 대해, 『자본』에 대해 여기서 듣고 저기서 배운 것들이 등장하겠지만, 그것은 ‘충실한’ 혹은 ‘성실한’ 데생이 아니라 내 나름으로 배우고 사유한 것을 그린 새로운 그림일 것이고, 따라서 대개는 변형된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정통적인 맑스가 이미 도처에 널려 있는 마당에 그것을 다시 성실하게 요약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수도 없이 많은 맑스 가운데, 그 중 어느 하나를 잡아서 충실하게 요약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책 『자본』을 ‘자본에 대한 책’이란 의미에서 『자본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의 외부’에 대한 책이란 의미로 이해한다. 그것이 『자본』인 것은 자본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연구를 통해서 진행되기 때문이지만, 이를 통해 맑스는 자본에 대한 어떤 ‘이론’을 제시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자본의 외부’들, 즉 자본의 전제가 되는 것을 들추어내고자 했고, 자본과 공존하는 ‘외부’가 자본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이로써 결국은 자본에서 벗어난 세계를 사유하고자 했다고 믿는다. 나는 이것이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본적인 문제설정이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자본』은 ‘자본과 그 외부’에 대한 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혹은 ‘그 외부를 통해서’ 자본을 연구한 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맑스가 『자본』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수행하는 실질적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반복해서 보여주고자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 내지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는 시간과 공간, 조건에 따라 언제나 달라지게 마련인 외부에 대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이유에서, 『자본』은 자본에 대한 연구가 항상-이미 귀속되어야 할 어떤 귀결점이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달라지는 자본의 양상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활자로 고정된 『자본』이란 책의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텍스트고, 그 외부를 통해서 항상 변이하는 텍스트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살아 있음을 확신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또 다른 외부를 통해 그것을 변이시키는 것이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임을 확신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럴 경우 『자본』은 항상 달라지게 마련인 그 외부를 탐색하는 또 다른 여행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이제 맑스와 함께 그 외부를 다시 여행하고 싶다. 아니, 맑스로 하여금 그 외부를 다시 여행하게 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주제는 ‘자본과 그 외부’라고 할 것이다. 책의 제목 또한 그렇게 붙이고 싶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자본을 넘어선 자본』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제목은 『자본』을 ‘자본을 넘어선 『자본』’으로 읽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고,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쓰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나는 이 책이 『자본』에서의 자본에 대해, 나아가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대해 새로운 사유를 촉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맑스에 대해, 『자본』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쓰겠다는 나의 기획은, 고전을 현재적인 문제설정 속에서 다시 쓰고 변형시키겠다는 이 총서의 기획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로써 고전들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탈주선들이 총서 전체에 범람하게 되기를! 맑스와의 새로운 만남들이 이 총서 안팎에서 범람하게 되기를! 그리하여 새로운 삶을 꿈꾸는 ‘현실적인 이행운동’이 자본의 공간 여기저기서 자본주의의 외부를 무수히 창출하게 되기를!
칼 맑스. 누가 그를 모른다 말할까? 예전에 존 레논(J. Lennon)은 “비틀즈는 예수보다도 유명하게 되었다”는 말로 허명에 놀아나는 자신의 팬들을 풍자한 바 있지만(물론 덕분에 반어와 풍자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많은 기독교도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지만), 맑스 또한 그러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 역시 예수처럼, 비틀스처럼 이름에 가려, 사도들의 고식화된 명제에 박제되어 그 진면목을 뜻하지 않게 숨겨야 했던 인물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공산주의의 이론적 ‘수괴’, 혹은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사상가. 하지만 정반대 방향에 있는 이 두 점은 사실 너무도 가까이 있다. 원주 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점이 사실은 가장 가까이에 근접해 있듯이. 『심판』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카프카(F. Kafka)의 소설 『소송』(Der Prozeß)에서 요제프 K는 재판소와 반대 방향에 있는 티토렐리의 집 침실 옆에서 재판소 사무국을 발견하지 않던가!
사실 맑스 자신의 사유는 결코 곧은 하나의 직선을, 혹은 곧은 원주를 그리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무한히 구불구불 구부러지는 프랙탈(fractal)한 선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일까? ‘정통성’의 자와 콤파스로 그린 공식적인 맑스나 주류적인 맑스 옆에서는 언제나 그 곧은 선에서 벗어나는 선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맑스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세심한 눈으로 그의 사유를 관찰하며 따라가던, 그리고 그 구부러진 선을 강조하거나 그걸 한번 더 구부린 탁월한 ‘제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걸 대충 보는 사람들은 레닌에서 소비에트 맑스주의로 이어지는 정통파의 곧은 선만 보지만, 세심한 관찰자들은 그 구불구불한 선들의 매혹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느낀 매혹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초상을 그린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맑스가 있게 되었다. 카우츠키의 맑스, 레닌의 맑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맑스, 루카치의 맑스, 그람시의 맑스, 스탈린의 맑스, 알튀세르의 맑스, 네그리의 맑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맑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맑스가 “죽지 않는 사람”임을 진실로 믿는다. 불사조는 죽지 않는 새가 아니라 반복하여 죽고,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새다. 보르헤스가 발견한 ‘죽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반복하여 다른 인물로 태어나는 사람이고, 반복하여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 경우 죽음이란 변이의 문턱을 표시하는 선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성, 그것은 이처럼 새로운 얼굴로 반복하여 다시 태어남으로써 이루어지는 불사(不死)의 형식이다. 따라서 무언가가 영원하길 바란다면, 그것에 어떤 창조적인 무언가를 새겨 넣어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떤 사상을, 혹은 어떤 사상가를 영원하게 하는 것, 그것은 거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어떤 차이를 새겨 넣음으로써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