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란 무엇일까?
국적, 계급, 성별, 종, 외모, 재능, 건강, 가정환경, 성적취향 등등에 따라 그 깊이와 무게가 다채로울 것이다. 나는 경험을 신봉하는 편이다. 누군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나는 존중한다. 나이가 적지만 수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이가 많아도 경험이 미천한 사람이 있다.
이러한 세상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시간이 가면서 먹히는(?) 나이와 상관없이, 경험의 다양함과 깊이에 따라 나이를 먹는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나는 '장유유서'를 존중할 것이다. 조선시대가 그런 세상과 비슷했다면, 장유유서는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일 것이다.
흔히, 책읽기를 '간접 경험'이라고 얘기한다. '간접 경험'은 책읽기 말고도 다양하다. 지인과의 대화, 유투브나 영화 등을 통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거나 시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은 '간접 경험'이라는 표현에 인색할까? 내 생각에는 책읽기가 '찐' 간접 경험이기 때문이다. 참나무, 참나물, 참깨 등 그 분야에서 으뜸인 경우, '참'을 붙이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책읽기는 '참 간접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 만큼 좋은 간접 경험을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책읽기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활자를 통해 '상상'과 '생각'이라는 구조화, 내제화를 할 수 있다. 책읽기 만의 매력이다.
저자는 '역사책'과 친해지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알려준다. 역사 에세이 작가이기 때문에 뭔가 대단한 비법이 있는 줄 기대했는데, 역시 그런 건 없었다. 저자는 두꺼운 통사나 시대사 역사책을 읽다가 질려서 포기하지 말고, 첫 단계로 흥미로운 분야의 역사책 한 권을 완독하라고 조언한다. 초보에게 알려주듯이 차근차근 진행한다(20개의 꼭지를 유투브 영상 20개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고로, 난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산책 때 한 꼭지씩 읽었다(그만큼 책이 작고 가볍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 집중하여 읽었다. 내가 느낀 것은 20 꼭지 중에 11 꼭지부터 심화 단계인 것 같다. 질문과 의심이 자연스럽게 생겨야 11 꼭지 이후 진행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러려면 양적 성장이 아니라 자발적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즉, 저자가 얘기한 '역덕'(역사 덕후) 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 처음부터 역덕을 목표로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 즐기는 법'이 뭘까 궁금하여 호기심에 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역사책을 읽다가 저자처럼 의심하거나 질문할 일이 없고 박물관을 방문할 일이 없을 사람이라도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기 쉽게 알려준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역덕이 된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못 따라오거나 반대 의견인 독자까지 고려하여 최대한 쉽게 자신의 노하우를 드러내고 있다. 딱딱한 문체가 아니다. 애정과 진심이 느껴진다. 이 책 한 권을 완독하면 그 진심이 뭔지, 저자가 왜 그렇게 진지했는지 어렴풋이라도 알 것이다.
'난 저 길로 절대 가지 않을테니, 그 쪽 길과 관련된 책이나 영화 같은 건 시간낭비일 뿐이야' 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곤 하기 때문이다. IMF와 코로나19 등 살면서 무수한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어찌 함부로 시간낭비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가? 일단,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만이 유리할 뿐이다. 그냥,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요' 이런 태도가 좋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책을 통해서 이런 경험과 과정을 통해 역덕이 되는구나를 간접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흥미가 생기면 저자가 알려준 대로 하나씩 실천하면 된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과정은 역사책에만 국한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과정을 응용하고 확장하여 일반적인 책읽기와 운동, 배움 등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10 꼭지까지 요약하면 아래이다.
- 일단 한 권 -> 통사부터 -> 반복반복,흐름만 파악 -> 쉬운 책부터 -> 도서관 서가 털기 -> 다독보다 편견 털기 -> 네 번의 뒤집기와 여성사 읽기 -> 꼬꼬읽(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기) -> ...
이렇게 적고 보니, 7 꼭지인 편견 털기 부터 쉽지 않을 것 같다. 저자도 얘기했듯이, 결국 역사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무엇이든 빠져들다 보면 나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저자가 '들어가는 말'에 써놨듯이 '태어난 것 자체가 사고입니다.'가 맞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인생 메뉴얼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얘기도 했다.
'랜덤으로 받은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완성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유한한 생명과 바꾼 시간을 어떤 콘텐츠로 채우느냐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피같이 소중한 시간'이 맞다. '시간'은 최고로 중요한 가치다. 내가 먹는 것이 내 몸을 만들듯이, 유한한 생명과 바꾼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나 자신을 규정한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 중에 으뜸은 책읽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작고 가볍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특히, 11 꼭지 이후는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만 하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페터의 할머니께 흰 빵을 선물하려는 이유가 뭘까? '왕자와 거지'에서 수도원장이 에드워드 왕자를 죽이려는 이유는 뭘까? 이런 것들을 궁금해 하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 보자. 충무공 이순신과 임진전쟁 관련하여 한,중,일 각각의 입장에서 입체적으로 생각해 보자(오희문의 '쇄미록'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억울하게 마녀로 몰린 '핸젤과 그레텔'의 빵굽는 할머니와 프랑스 혁명 때 억울한 죄목으로 사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 대신 분노도 해보자. 그러면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당신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구? 책이라는 게 그런 마력이 있다.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 특히 역사책을 읽다보면 다양한 환경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역사는 강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알다시피,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과거는 비슷하게 재현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역사책을 많이 읽어 내공이 있다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서 꽃길(하나마치)을 걸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다양한 패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선택지가 여러 개인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얘기가 있다. 특히, 한국처럼 하나의 선택지를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다양한 선택지를 갖는 게 경쟁력이다. 책읽기, 특히 역사책 읽기를 통해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만 알아도, 다른 선택을 해도 된다는 것만 알아도 우리는 내 인생의 조연이 아닌 주연이 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주연에게는 남들의 이상한 시선을 무시할 정도의 배짱은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을 읽고(두 번째에), 영화 '엣지 오브 투머로우'가 떠올랐다. 아시다시피, 톰 크루즈는 같은 순간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면서 그만이 과거의 반복된 경험들을 기억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반복을 통해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역사책 읽기는 같은 시간을 반복하는 마치 타임머신 같은 마법 같은 능력이 있다고, 그로 인해 제 2의 생을 살 수 있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해가 뜨고 지고 비슷한 시간에 식사하고 자고를 반복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책에 나오는 수많은 년도와 인물 등을 외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시험보는 게 아니다. 그런 '반복반복'되는 다양한 예들을 보며, 그 안에 숨겨진 지혜를 터득하면 된다. 매일매일 반복반복 하는 일상은 우리에게 엣지 오브 투머로우의 톰 크루즈 처럼 자신의 운명을 바꿀 가능성, 기회를 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다양하게 손질된 먹거리가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다면 언제 손님이 방문하더라도 여유롭다. 역사책 읽기, 역덕은 그런 여유와 지혜를 가질 수 있다며, 저자는 아낌없이 자신의 노하우와 지식을 이 책에 담아놨다.
'임진전쟁' 이라는 용어가 신선했고, 고려시대 삼별초 항쟁에서 '당시 제주 사람들에게는 몽골이나 고려나 삼별초나 모두 똑같은 외세일 수 있습니다' 역시 신선했다. 저자가 소개한, '화력조선' 유투브 영상은 흥미진진했다.
이 책에 나온 저자의 추천 책들 중에, '12. 참고문헌 리스트는 나의 선생님'에 나온 다음 책들을 읽어보려고 한다.
-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 대항해 시대
-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나는 이 책을 읽고 한 가지는 결심했다. '세상에 만연한 편견과 혐오의 조력자'는 되지 않겠다고.
요즘 읽고 있는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세이노는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책들도 찾아서 읽으라며, 본인은 균형 잡힌 판단력을 갖기 위해 한겨레와 조중동을 같이 읽는다고 한다. 참고로, 세이노가 얘기한 독서 습관 17개 중에 첫 3개는 아래다.
1. 최대한 쉽게 되어 있는 책부터 읽어라
2. 실전을 다룬 책들을 먼저 읽어라
3. 같은 부류의 비슷한 책을 여러 권 읽어라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하다. 역시 왕도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 진심이 담긴 가이드가 있다. 쉬운 책부터 시작, 흥미를 가지고 꼬꼬읽 까지 간다. 그 후 비슷한 책 여러 권을 읽으며(물론, 네 번의 뒤집기와 여성사 읽기를 명심하며) 의심과 질문의 조각 퍼즐들을 하나씩 맞춰가는 것이다. 굳이 역덕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계속 나아가다 보면 어떤 존재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
결국 반복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그 나라 그 분야의 역사 뿐만이 아닙니다. '나 자신'도 알게 됩니다. 내가 어떤 사건의 전개에 관심을 갖고 재미있어하는 인간인지, 어떤 인물이나 집단에 특별히 감정이입하는 인간인지 말이에요. 이렇게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알아 가는 과정은 나 자신을 새롭게 알아 가는 과정이기도 하기에 더욱 즐겁습니다. (42쪽)
마녀 사냥뿐만이 아니죠.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 내용이 다 진실은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만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의심해 봐야 더 깊이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편견과 혐오의 조력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 의심하고 질문하는 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98쪽).
아하, 역사의 길을 돌아, 여러 인물을 거쳐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군요. 중요한 것은 내 시대의 야만을 헤쳐 나갈 나의 의지였군요. 이를 알게 되었으니 약을 끊을 때가 된 건가요? 아니죠. 이제 인물 이야기나 역사책은 약이 아니라 밥이 되는 거죠. 나의 일용할 양식, 즉 나의 에너지원이 되어 내가 목표를 향해 달리게 해주는. (153~154쪽)
역사를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저는 현재 우리 사회 모습에서 매우 우려되는 현상을 봅니다. 음, 말하자면 지난 근현대 역사의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해서 사회가 좀 병들어 있다고나 할까요. 우리 개개인도 윗대에 청산되지 못한 과제를 빚처럼 떠넘겨 받아 고통받고 있다고나 할까요. (162~163쪽)
잘못된 이야기는 잘못된 현실을 만듭니다. 그러니 기존의 상식을 의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상상력은 물론, 언제든 자신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 그리고 새로운 역사책을 찾아 계속 업데이트하는 꾸준함이 역사를 즐기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한 편, 역사 에피소드 하나가 현실을 다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의 발명 과정에 소설이 기여한 것처럼 말입니다. (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