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식으로 풀어낸 세기말식 예언서
99/12/09 이희인(heen@ktcf.co.kr)
1.
조지오웰의 <1984>는 확실히 1984년 이전에 읽을 때 더 맛있는 책이 될 것이다. 98년 9월 28일 지구가 멸망한다던 <터미네이터2>는 그 날짜를 기점으로 이전에 보는 맛과 이후에 보는 맛이 사뭇 다를 것이다. 이제 막 30대로 접어든 사람에게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 류의 책들은 하루아침에 폐품으로 던져질 지 모른다.
20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늦기 전에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을 집어든 사정이 그러했다. 어떤 저작들은 시간의 흐름에 이토록 절대적으로 지배를 받는다. 그 책들은 시간을 다루고 있거나 시간에 끈질기게 집착하고 있는 책들이다. '시간'은 최근 몇 년간, 또 앞으로 얼마간 인류에게 절대 절명의 화두임에 분명하다. 아탈리의 <21세기 사전> 역시 아주 단단히 '시간'의 결에 걸려있는 책이다.
2.
<21세기 사전>이란 제목은 분명 모순적이다. '21세기'란 단어와 '사전'이란 단어가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그 모순된 어법이 만드는 기묘한 분위기가 이 책을 집어들게 만드는 매력인지도 모른다.
채 한 달여도 안 남았다지만, '21세기'란 단어는 현재(20세기)로서는 도대체 객관적일 수도, 합리적일 수도, 총체적일 수도 없는 단어다. 이는 단지 세기말의 불안과 희망을 표현하는 '감정 섞인' 단어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전(Dictionnaire)'은 어떠한가? 그것은 객관성과 합리성, 총체성을 지향하는 근대 철학의 산물이 아니던가.
하긴, <21세기 사전>이 터하고 있는 '미래학'이란 학문 자체가 모순적임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래학'을 인정하는 것은 '점성술'이나 '사주팔자'를 학문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래'란 엄밀히 말해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요령부득의 학문은 벨이나 맥루한, 토플러 같은 대학자들에 의해 힘차게 하나의 학문적 영역을 마련해 왔고, 그 관심은 세기말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SF 영화를 비롯하여, 미래 예측 분야가 서가에 따로 마련될 만큼 이 분야는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관심과 흥분이 하나의 결정을 이룬 것이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일 것이다. 모호한 미래의 예측들이 마침내는 사전으로 편찬될 만큼 넉넉하고 풍요로워진 것일까?
3.
이 책은 가히 예언서로 읽힐 만하다. (그렇다고 심각하고 무거운 책은 아니다!) 400여 항목들이 특정 분야나 지엽적 관심에 머물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쳐 있어 비교적 총체와 일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다고 빈틈없이 방대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항목들이 딱 들어맞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21세기를 맞이하는 독자에게 얼마간 관심과 태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렇게 구속력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탈리의 예언서를 집어드는 기분은 비의에 쌓인 전래 예언서를 접하는 기분과는 사뭇 다르다. 옛 예언서들이 신비와 상상력에 근거하여 범인은 근접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언어로 예언을 행하고 있다면, 아탈리의 예언서는 널리 보편화된 과학과 지식을 근간으로 비교적 쉽게 쓰여 있다. 거기에는 촌철살인 식의 명쾌한 재치가 있는가 하면 집요하고 힘겨운 추리와 상상도 있다. 재치 있는 잠언처럼 구성된 짧은 항목들이 결코 가볍거나 건정건정, 만만하지만은 않다.
아탈리의 예측에 쓰인 도구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이고도 총체적인 파악이다. 이 우쭐해하는 저자는 수많은 앞선 예측들이 빗나간 이유가 당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과연 이 당당한 저자의 예측들은 대부분 현재와 상관없는 먼 얘기가 아니라, 그럴 듯한 현재의 연장으로 읽힌다. 때로 비겁할 만큼 가능한 정도의 예측만을 행한다거나, 좀 당연하다 싶은 얘기들도 있어 그 조심스러움이 읽힌다. ('한국'같은 항목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그가 그린 미래의 그림은 대개 파편적이다. 그것은 이 책이 사전의 형식을 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파편들을 짜 맞추다 보면 제법 일관되고 체계적인 하나의 그림이 만들어질 것이다. 마르크스가 생산력, 생산관계 등의 개념을 들이대어 나름대로 미래의 밑그림을 그렸듯이 아탈리는 '유목'이니, '가상현실', '미로', '나노', '네트워크' 등의 키워드를 메스로 삼아, 그다지 암울하지도 그다지 희망적이지도 않은, 그야말로 그럴법한 미래를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이 책은 읽는 이의 관심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문학적(SF적) 감수성으로 읽을 수 있고,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실용서로 읽을 수도 있으며, 정치 경제 등을 포괄하는 사회과학 서적으로도 충분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읽는 독서는 물론, 아무 때고, 필요한 항목을, 사전 찾듯, 뒤적거리며,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미덕이 될 것이다.
21세기 어떤 날, 아마도 어떤 호사가는 오래 전 출판된 이 책의 항목들을 손가락으로 짚어내며 그 예언들이 얼마만큼 맞아 떨어졌는지 따져보는 재미를 즐길지 모른다. 그러나 희망과 불안을 붙안고 20세기 마지막 날들을 보내고 있는 동시대인들에겐 각 항목들이 단순한 '재미'일 수만은 없다.
한 해박하고 치밀한 저자에 의해 두루 진단된 미래의 예언 항목 중에는 개인의 삶과 직접 관련된 '그림'이 잔뜩 숨어있을지 모른다. 그 '숨은 그림들'을 빨리 많이 찾거나, 더디게 적게 찾고 하는 것은 각자의 능력이다. 독자에 따라서 이 책은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재치 있는 교양서가 될 수도, 희부염한 미래의 앞날을 밝혀줄 유용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 특히 눈앞에 다가온 근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가장 적극적으로 현시점의 욕망과 관심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