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 (출판평론가)]
일본의 서지학 대가로 나가사와 기쿠야(1902-80)라는 인물이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당시 대학 재학 중이던 각 분야의 연구자들로부터 한문, 경학, 일본 고전 등을 개인 지도 받았던,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교육 환경에서 자라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에서 간행된 중국 고전적의 분류, 정리, 연구에 관한 선구적인 업적을 낸 나가사와는 서지학과는 구별되는 도서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구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말하는 도서학의 얼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도서학은 도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도서의 정의와 발달, 도서의 재료와 형태, 서사와 인쇄, 도서의 내용과 전래, 도서의 수집과 분산, 도서의 보존과 이용, 도서의 정리와 목록, 저작권과 출판권, 제작과 판매 등을 조사,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론 그의 소망대로(그는 만년에 자신의 대부분의 논저에서 도서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도서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반화되지는 못했지만, 책에 관한 일종의 종합학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은 의의를 지닌다.
물론 한계도 있다. 나가사와 도서학의 한계는 도서에 관한 인문적 성찰이 약하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하나의 물체로서의 도서에 대한 천착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대신, 의미로서의 도서, 상징으로서의 도서, 그 밖의 보다 다양한 측면에는 눈길을 덜 준다고 할 수 있다.
나가사와의 도서학에 관해 제법 길게 언급한 까닭은, 『읽는다는 것의 역사』가 종합학으로서의 도서학의 가능성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전학, 문헌학, 서지학, 문학, 사회학, 문화사, 사회사, 미디어론, 언론학 등의 다양한 성과와 통찰을 종합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구성 면에서는 서양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는 통사적 구성을 보여준다. 여러 필자가 다양한 주제를 논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산만해지기 쉽지만, 각 필자가 자기가 맡은 주제를 깊이 논하고 있으면서도 읽기의 변화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짜임새가 있다.
이 책을 반드시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로제 샤르티에와 굴리엘모 카발로가 집필한 머리말 부분은 맨 먼저 읽어두는 게 좋을 것이다. 60여 쪽에 달하는 짧지 않은 분량이니 일반적인 머리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론 즉 이끄는 글 혹은 길잡이 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을 봐도 고대 희랍과 헬레니즘 세계에서부터 로마, 중세, 근대, 독서혁명, 인쇄술 발명 이후의 변화, 독서의 역사에 관한 연구 방법론 등을 포괄하고 있다.
머리말에서 샤르티에와 카발로가 말하는 이 책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서구사회가 고전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하면서 만났던 중요한 변화 ―문화적ㆍ종교적ㆍ정치적 변화― 에 대한 참신한 시각을 독서방법의 변화에 대한 연구로 이끄는 일이다. …독서는 역사에서 분리된 인류학상의 불변체는 아니다. 서구의 남성과 여성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독서를 하지 않았다. 몇 가지 유형이 독서관행을 지배했으며, 몇 차례의 ‘독서혁명’이 행동과 습관을 변화시켰다. 이 책은 그런 유형과 혁명을 조사ㆍ연구하여 그들을 더 이해하기 쉽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위의 말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독서 행태 혹은 독서의 의미와 위상 등은 시대에 따라 늘 변하기 마련이며, 같은 시대에서조차도 독서 행위의 주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그런 변화에는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들이 있다는 것. 이 책은 그런 변화와 계기들을 살펴봄으로써 독서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좀더 심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1장 ‘고대기와 고전기의 그리스’를 펼쳐 읽는 독자는 일순간 질려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고전 희랍문학을 연구하는 예스퍼 스벤브로가 고대 희랍에서 ‘읽는다는 것’이 뜻하는 바에 관해, 고대 희랍어 문헌학 지식을 동원하여 깊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순간 질려버리는 게 좋은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읽는다는 행위의 20세기적 의미에만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로서는, 읽는다는 것이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실감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필사 문화의 역사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 아르만도 페트루치가 집필한 마지막 장 ‘독서를 위한 독서’는 오늘날 세계가 처한 독서를 둘러 싼 현실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특히 오늘날의 미국을 매스 미디어에 조율된 젊은이 문화와 더 전통적인 방법으로 질러진 젊은이 문화 사이에 가장 확실한 차이가 드러나는 국가로 규정하는 대목이 매우 흥미롭다. 매스 미디어에 조율된 문화는 록 음악, 영화, TV, 전자게임 등을 선호하고 독서에는 2차적 관심밖에 없다. 반면에 전통적인 문화는 독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질 높은 연극과 영화를 보고, 고전 음악을 듣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매스 미디어의 새로운 기술은 보완적으로 이용한다.
이런 양극화 속에서, 확신을 갖고 열심히 독서하며 여론을 형성하는 독자, 즉 유력한 독자 혹은 양질의 독자는 소수에 불과해진다. 미국 출판인들 상당수가 미국 인구 2억 3600만 명 가운데 그런 양질의 독자는 1만 5000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추정한다. 교육의 양극화, 문화의 양극화, 독서의 양극화가 어디 미국만의 일이겠는가? 페트루치의 다음 말을 들어보면 마치 우리 현실을 얘기하는 듯 하지 않은가.
“…독자 역시 선택 기준을 잃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예상되는 기호에 근거한 합리적인 생산계획을 세우기 어렵게 되고 있다. 현재 수가 줄어드는 이른바 ‘유력한 독자’는 시종일관 책에 대해 확실한 기호가 있다. 그들은 연간 훌륭한 책을 많이 읽고 있으며, 모든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안정된 독자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수가 적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출판사 오너가 그들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누구나 읽어야 할 필수 독서 목록이 있었던 시대도 저문 지 오래 됐다. 이른바 정전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독서의 질서가 무너지고,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는다’는 게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텍스트 사이의 서열 관계는 더 이상 없으며 ‘무정부 상태 독자들의 독서’와 ‘소비자지향 작가’들이 늘어난다. 책을 사색하고 배우고 존중하고 기억해야 하는 텍스트로 보느냐, 아니면 책을 책으로 보지 않고 소비하여 없애거나, 아무 곳에나 두어 잃어버리거나, 심지어 한 번 읽고 던져버리고 하는 일회용 물건으로 보느냐에 따라 독서 내용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페트루치는 이런 추세에 관해, 또 그 앞날에 관해 어떻게 보는가? 그는 독서가 광범위하고 복잡한 현상이라고 말한 뒤, 앞으로 10년 20년 안에 그 방향이 분명해질 것이며, 50년 또는 100년이 지나면 독서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판단을 유보한다. ‘지금은 아니다. 아직 너무 이르다’라는 말로.
― 《기획회의》 173호(2006.4.5), 특집에서 발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