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초원으로 가자<br/>2부 눈 내리는 섬 혹은 에밀리의 유령<br/>3부 오시리스, 돌의 신<br/><br/>옮긴이의 글<br/>요시마스 고오조 연보<br/>원문시

시는 죽었는가. 아니다.
시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 있다. 저기에 있다.
또한 시가 없는 곳에도 시가 있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있는 시.
인류의 오랜 삶과 함께 있는 시.
인류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질 시.
그리하여 시는 이 지상의 처음과 끝이다.
온갖 슬픔과 기쁨 그리고 어둠과 한 줄기 빛살이 내려오는 모든 곳에서
시는 생명과 영혼의 기호이다.
우리는 이같은 시의 매혹과 존엄 그리고 그 뜨거운 숨결에
동행하기 위해서 현존 세계 시인들의
한 편 한편의 진실에 다가간다.
시는 있다. 시는 살아 있다.


‘오늘의 세계 시인’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시인 고은 선생의 적극적인 추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세계의 시들이 번역 출간되었으나 몇몇 유명 시인들에게 편중되다 보니, 보다 다양한 시인과 시의 세계를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것과는 차별을 두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시인들만을 엄선, 그 작품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여 기획한 것이 바로 ‘오늘의 세계 시인’입니다. 특히 ‘오늘의 세계 시인’에 소개하는 시인들은 고은 선생과 오랫동안 시적 교류를 해왔던 분들이거나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각국의 시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꼽았습니다.

‘오늘의 세계 시인’에 첫선을 보이게 될 작품은 일본의 요시마스 고오조와 스웨덴의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입니다. 이 두 시인은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시인들이지만, 그들의 작품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새로운 시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며, 이를 통해 폭넓은 세계 시인들을 만나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이후 시인이자 환경운동가이며 영미시에서 선시(禪詩)를 구사하는 미국의 게리 스나이더, 프랑스의 이브 본느프와 등등 현존하는 세계 시인의 작품들을 계속 출간할 예정입니다. 소설과는 달리 시의 번역은 너무도 지난한 작업이라 번역자 역시 원문시의 세계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전공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원문시를 감상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시집 말미에 원문시를 실어놓았습니다.

고은 선생이 발간사에서 ‘시의 매혹과 존엄 그리고 그 뜨거운 숨결에 동행하기 위해서 현존 세계 시인들의 한 편 한편의 진실에 다가간다. 시는 있다. 시는 살아 있다’고 표현했듯이, 모쪼록 훌륭한 세계 시인들을 소개하는 이 기획으로 하여, 보다 다양한 세계 시인들의 시 세계와 그들의 시적 정서를 한껏 음미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b>격렬함, 그리고 행간 사이에 흘러 넘치는 시인의 육성-요시마스 고오조</b><br/><br/>나는 일본시를 잘 모른다. 겨우 대표 시선집으로 일본현대시사를 일별했을 뿐이다. 이런 무지 상태에서 요시미스 고오조의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종이에 물 스미듯 그의 시세계에 들어섰다. 어느덧 번역시집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시는 번역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좋은 시는 ‘종족의 방언’의 경계를 넘어선다. 저자도 사라지고 원본도 증발한 채 한국어로 점화된 요시마스의 언어에 순간순간 반응하는 이 ‘순수한’ 시읽기! 자본이 유령처럼 편재(遍在)하는 도쿄의 시인이 발신하는 언어의 절제된 폭발에서 나는 냉동된 사회성의 임리(淋?)한 흔적들을 본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솟아오른 이 찬란한 불꽃놀이는 뜻밖에 영검한 무(巫)의 신탁과 닮았다. 독자가 살아 있어 행복한, 그래서 한편 행동이 언어를 돌아보지 않는 대언(大言)으로 횡행하거나, 개인방언의 구시렁거리는 미로를 배회하는 어떤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최근의 한국 시단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 <br/> 崔元植(문학평론가?인하대 국문과 교수)<br/><br/>요시마스 고오조(吉增剛造)는 한마디로 무한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보면 시적 공간을 무한대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단지 사물을 묘사하는 언어가 아닌 그 언어 자체로서 시적 운율을 다스리는 솜씨가 탁월하다. 비록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이제라도 그의 시를 한국에 소개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운인지 모른다. 한국어판 번역 시집은 그의 대표 시집 중에서 그의 시 세계를 가장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고, 시인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긴 32편의 시들을 골라 엮은 시선집이다. <br/> <br/>요시마스 고오조는 1939년 동경에서 태어나 게이오(慶應)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 이노우에 데루오(井上輝夫), 오카다 다카히코(岡田隆彦) 등과 함께 잡지 　미타시인(三田詩人)　을 복간하여 왕성한 시작활동을 한다. 그러나 요시마스의 시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62년 7월 동인들과 함께 창간한 잡지 　도라무깡　에 의해서였다. 시대가 가장 크게 굴절되어 있었던 일본의 60년대에 등장한 까닭에, 이후 ‘60년대 시인’이라 불리며, 요시마스는 그 잡지에 시 외에도 ?삶과 문학? 등의 에세이를 발표하기도 한다. 대학 졸업 후, 한때 미술잡지 등의 편집을 맡아보다가 1970년, 아메리카 시인 아카데미에 초대되어 미국을 방문한다. 그 이후부터는 문학활동에만 전념하는 나날을 보낸다. <br/><br/>1964년의 처녀시집 <출발(出發)>에 이어 1970년에 내놓은 시집 <황금시편(黃金詩篇)>은 현대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킴과 동시에 질주하듯 멋지게 비약하는 언어와 이미지로 작가 요시마스와 동세대 사람들에게는 물론, 그 이후의 신진 시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노우에 데루오가 “그의 시는 연소해가는 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는 그 섬광이 온 하늘에 불붙어 오르려 할 때, 막 훔쳐낸 듯한 열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광경은 인간이라는 미지의 능력이 저마다 소리쳐 깨우는 무수한 북이 서로 울려대는 혼돈과 닮아 있다. 일종의 비통한 파괴적 에네르기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쇠약해가는 착란의 무질서가 아니다. 때때로 매우 지성적인가 하면 돌연 격정의 선율을 연주하며, 섬세한 영혼이 수치심에 고개를 떨구는가 싶으면, 다음 순간 그 영혼은 대담하리만큼 오만하게 공격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듯이, 요시마스의 시는 매우 격렬하며, 시의 행간 사이에 흘러 넘치는 시인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br/><br/>그 육성은 때때로 너무 정의롭고 날카로워, 이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황금시편>에서 발췌한 <어느 날 아침 미쳐버리다>와 같이 혼돈의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조각칼이 되어, 마치 광인의 울부짖음 같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시 ?돌아가자?에서처럼 ‘만일 돌아갈 수 있다면’ ‘사자와 송사리가 생몸을 부대끼며 서로 속삭이는 저 먼 창공으로’ 본질적인 것을 찾아 헤매던 작가의 정신이 ?목포―사실은 목포까지 걸어가고 싶었다?에서는 ‘제주도’에 이르러 ‘내 마음속 하늘’의 풍경을 읽어내고 있는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br/><br/>현대인의 고독한 몸부림을 길다란 행과 부호로서 표현하는 동시에, 순수로 향한 요시마스의 은밀한 의지가 전달되어오는 그의 시는 우리를 도시의 공간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더 큰 상상력으로 이끌어주는 데 손색이 없다. 언어의 규모마저 지상적인 것을 초월한 좀더 우주적인 시적 감동으로 안내받는다. 존재 그 자체, 행위 그 자체, 생각 그 자체가 강열한 언어의 체험이 되어, 무한한 시적 우주를 짜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의 거리 시부야에 이르기까지 시적 공간 또한 무한대로 넘나들고 있다. <br/><br/>한편, 발성(發聲)하는 일로서의 시의 가능성과 자신감을 많은 시인들에게 느낄 수 있도록 한 요시마스의 시의 세계는 ?황금시편(黃金詩篇)?으로 그해 신설된 다카미 준(高見 順) 상을 수상하였으며, 요시마스 고오조 자신이 자작낭독(自作朗讀)에 열의를 가지고 여러 곳에서 자작시 낭독의 시도에 참여한다. 그것은 요시마스 자신이 “아기 때 큰 소리로 울어젖힌 이래, 온몸으로 소리지르거나 울거나 하는 일이 이제 모두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중략) 자유자재로운 발성의 퇴화, 발성의 기아상태(飢餓狀態)가 되어버렸으므로, 이것이 생명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航海日誌, 1969～1970')는 생각에 바탕을 둔 행위로, 현대에 있어서의 시의 존재 이유와도 관련되고 있다.<br/><br/>1984년 8월 간행된 시집 <오시리스, 돌의 신>이나 1998년 출간된 상당히 긴 이름의 시집 <눈 내리는 섬>혹은 <에밀리의 유령>을 펼쳐보아도 여전히 그 내용보다는 우주공간을 넘나드는 현란한 문체에 먼저 압도된다. 수많은 음부(音符)와 자유분방한 행간은, 많은 전통적인 시적 가치관이 무너진 후에 등장한 현대시에 있어서도, 또 다른 하나의 독특한 시도로써 그 선명함이 전해져 온다. 현대시의 최첨단을 사나운 힘으로 절개(切開)하여 가는 요시마스의 언어의 영토가 무한정 펼쳐진다. <br/><br/>요시마스는 2001년 6월에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린 ‘세계 시 아카데미’ 창립회의에 일본 시인으로 초대받아 창립위원 60명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일본 문화 계간지 　캉(環)　(藤原書店)에 ?고은?요시마스 고오조의 왕복서한(高銀?吉增剛造의 往復書翰)?을 연재, 한국과 일본의 두 시인이 역사, 문화 등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삶과 예술 전반에 걸쳐 서로 번갈아 쓰는 편지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br/><br/>그의 나이는 “세월의 덧붙임이 아니라 계속하여 늘어가는 에너지라 할 수 있다”고 평한 이나가와 호오징(稻川方人)씨의 말처럼 그의 시에는 힘과 살아 있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