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경지를 연 사람들은 대개 그렇듯이 다윈 역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처음에 그에게 의학을 공부하도록 했고 그게 여의치 않자 목사로 만들기 위해 신학을 공부시켰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의 '바짓바람'은 결국 다윈이 어릴 때부터 흥미를 느끼고 좋아했던 박물학(요즘의 생물학이라고 보면 된다)을 하도록 만들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는 하라는 신학보다는 지질학과 박물학에 관심을 가지고 헨슬로 교수와 친하게 지냈다. 스물둘의 한창일 무렵 이윽고 다윈에게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1831년 영국 해군의 측량함인 비글 호가 5년간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생물과 지질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골에서 따분한 성직자로 살아갈 것을 두려워했던 다윈은 헨슬로 교수의 추천을 받아 76명의 학자들 틈에 유일한 박물학자로 끼였다.
스물둘의 나이에 제 실력을 갖춘 학자일 수는 없었을 테니 실은 일종의 도피처였겠지만, 비글 호에서의 연구 생활은 그에게 결정적인 명성과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남아메리카, 남태평양,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항해하면서 다윈은 수많은 생물 표본을 수집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종의 기원>을 펴낼 수 있도록 하는 자료의 원천이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1837년부터 다윈은 <종의 기원>의 원고를 쓰기 시작하여 1859년 마침내 책을 출판했다. 다윈이 비글 호를 타고 떠날 무렵부터 치면 <종의 기원>은 무려 30년간의 집필 끝에 완성된 책이다. 이후 이 책은 10년간 1만 3000부가 팔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871년에 다윈은 <인류의 기원>을 써서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임을 밝혔다.
경쟁의 원리
비글 호의 여행에서 다윈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생물의 종이 놀랄 만큼 많다는 사실이었다.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울창한 열대 우림을 처음 보고 그 엄청난 식물 종과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희한한 종류의 곤충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루만에 무려 68종의 딱정벌레를 채집하기도 했으니 그의 감격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정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구나! 그가 택한 첫 '할 일'은 변이(變異)에 대한 연구였다. 같은 종의 생물이라도 사는 지역에 따라 생김새와 습성이 제각각이다. 그런 변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 물론 지형이나 기후, 먹이 등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윈의 생각은 달랐다.
"박물학자들은 흔히 기후나 먹이 등의 외적 조건을 변이의 유일하고도 가능한 원인으로 믿고 있다. 제한된 의미와 범위에서는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딱다구리처럼 나무 껍질 속에 있는 곤충을 잡아 먹기에 똑 알맞게 적응된 발, 꼬리, 부리, 혀 등의 변화된 구조를 단순히 외적 조건의 탓으 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변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생물 종 자체 안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다윈은 사육과 재배에서의 변이를 연구하는데, 이것이 <종의 기원>의 첫 장이 된다. 오래 전부터 농부들은 가축과 작물의 교배를 통해 좋은 품종을 생산해 왔다. 이를테면 이것은 인위적인 변이이다.
다윈은 직접 여러 종의 비둘기를 교배시켜 보기도 하고, 가축 시장에서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선택적 변이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자연 상태에서 그런 과정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의 의도적인 선택적 교배가 불가능하므로 변이가 없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비글 호의 여행에서 그가 본 수많은 변이들은 뭐란 말인가?
왜 같은 핀치새(finch, 피리새)인데 어떤 것은 곤충을 먹기에 적합한 가늘고 긴 부리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은 식물의 씨앗을 먹기에 적합한 두꺼운 부리를 가지고 있을까? 사실 다윈은 1830년대 말에 이미 <종의 기원>의 초고를 써 놓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가 관찰한 사례들만을 나열한다면 그것은 '종의 기원'을 전혀 해명하지 못하는 사례 보고서에 불과해질 것이다. 고민하던 다윈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어 왔다.
그것은 바로 1798년에 나온 맬서스의 <인구론>이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인구가 조절되지 않으면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구론>의 내용이다. 뒤늦게 이 책을 읽은 다윈은 바로 이 생존 경쟁의 원리를 자연 세계에 도입한다.
"만약 모든 생물들이 죽지 않고 한 쌍의 배우자들이 낳은 후손이 계속 급속도로 증가한다면 지구는 순식간에 생물들로 뒤덮여 버릴 것이다."
다윈은 번식률이 가장 낮은 코끼리의 경우를 계산해 보았다. 30세에서 90세까지 생식 가능한 코끼리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면 1000년도 못 되어 코끼리의 수는 2000만 마리에 이를 것이다. 한 번에 100개 가량의 알을 낳는 거북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자연 세계에서는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제한된 먹이와 환경에서는 제한된 개체수만 생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생존 경쟁 때문이다.
선택의 원리
생존 경쟁을 통해 다윈은 자연 선택의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 마리의 거북이 낳은 100개의 알은 그 중 20개만이 부화하고 부화한 새끼 거북들도 대부분 새와 물고기들에게 먹힌다. 결국 생존할 수 있는 거북은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이렇게 해서 자연계는 생존 경쟁에 따라 평형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생존하는 개체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떤 개체가 생존하기에 적합할까? 그 답은 간단하다. 환경에 잘 적응하는 개체는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소멸한다.
"빠른 주력과 강한 체력을 가진 늑대는 가장 우세한 생존의 기회를 잡게 될 것이며, 또한 잘 보존되고 선택될 것이다. …… 가장 많은 꿀을 분비하는 꿀샘을 가진 꽃은 가장 빈번하게 곤충이 찾아들며, 또 빈번하게 교잡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우세해지며, 지역적인 변종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자연 선택의 원리다. 사육과 재배의 경우에 인간의 의도적 선택이 했던 역할을 자연계에서는 자연 선택의 원리가 담당해 주는 것이다.
"자연 선택은 날마다, 시간마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경미한 변이를 계속하고 있으며, 나쁜 것을 버리고 우수한 것을 보존하며,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유기적 또는 무기적으로 '기회가 있으면 언제 어디서 나' 생활 조건에 대한 모든 생물의 개량을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경미한 변이라도 오랜 세대에 걸쳐 누적되면 엄청난 변화를 빚을 수 있다. 따라서 개체가 이룬 변이는 조금씩 쌓이고 덧쌓이면서 마침내 다른 생물 종으로 진화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다윈의 진화론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발표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다. 우선 개체가 이룬 변이가 어떻게 후손들에게 계속 전달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또한 그 때까지 발견된 화석들을 보면 진화의 중간 단계를 말해 주는 화석의 예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해 다윈은 끝내 답을 알지 못했지만 얼마 뒤 멘델과 드 브리스가 그 문제들을 해결했다.
멘델은 유전 법칙을 발견하여 변이가 후손들에게 유전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했고(멘델은 1856년에 유전 법칙을 발견했으니 다윈보다 몇 년 앞서는데 다윈이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드 브리스는 돌연변이론을 주장하여 생물의 진화가 다윈의 진화론처럼 완만하게 진행된 게 아니라 주로 급격히 진행된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론상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진화론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는 학설이었다. 특히 생물이 진화한다는 진화의 개념은 획기적이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보면 세계의 역사는 6000년밖에 되지 않는다. 구약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최초의 인간 아담을 창조했다.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았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다.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인간 계보를 모두 합하면 아담에서 노아까지가 약 1000년이며,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가 약 850년이 된다. 계속해서 신약 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세대, 다윗에서 그리스도까지 28세대로 되어 있으므로 대략 1000-2000년 가량 된다. 이렇게 따지면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한 시기는 얼추 기원전 3000-4000년 정도다.
이를 근거로 해서 성립한 이론이 진화론과 반대되는 창조론이다. 창조론에 따르면 세계의 나이는 약 6000년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신이 창조한 것이다. 다윈의 시대에는 창조론이 거스를 수 없는 권위였다.
그가 <종의 기원>의 출판을 보류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지금까지도 미국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들이 있다). 하지만 19세기는 산업 혁명의 시대였다. 과학 문명이 빚어 내는 엄청난 변화 앞에서 창조론은 점차 설 자리가 잃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실 진화론은 다윈이 아니었더라도 당시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예컨대 라마르크는 다윈보다 앞서 진화론을 주장했고, 월리스는 다윈과 같은 시기에 같은 이론과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종의 기원>이 50년만 먼저 나왔다 하더라도 과연 지금과 같은 고전의 반열에 들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창조론에 밀려 사장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과 학문은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