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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24년 08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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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 /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45.90MB 파일/용량 안내 |
ISBN13 | 9788937416477 |
2024년 11월 01일 ~ 2024년 11월 01일
2023년 02월 09일 ~ 2024년 12월 31일
상시
85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아무리 넓은 지면이 주어져도 못 쓰는 건 못 쓰는 것이다. 책이 아무리 재밌어도 못 쓰는 건 못 쓰는 것이다. 아무도 쉽게 손대지 못하는 어려운 책을 읽었다는 티를 엄청 내고 싶어도 못 쓰는 건 못 쓰는 것이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은 명확하게도 따로 존재해서 나는 잘 읽는 사람이 반드시 잘 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송강호가 영화를 잘 안 본다고 말하는 거나 원작이 있는 작품에 캐스팅 된 배우에게 감독이 일부러 원작을 보지 말라고 주문하는 경우와도 같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은 너무나 또렷하게 별개라 나는 종종 당황스럽다. 읽어내는 일과 별개로 쓰고 싶은 걸 쓰지 못할 때 자신에게 답답해진다. 글을 쓰고 싶잖아. 사실 글을 쓰고 싶어 담고 또 담아놓는 거잖아.
구혜선이 첫 소설을 냈을 때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써왔고 그걸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놓고 종종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보기에도 앙증맞고 귀여운데 소위 전문 작가에게 좀 어설퍼 보여도 배우,감독,소설을 다 만들어내는 그녀는 놀랍다.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세상에, 어설프게 해놓고 어설픈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잘한다 하면 진짜 잘하는 줄로 아는 멍청한 사람보다는 하나하나 도전하는 게 얼마나 놀라웠는지 모른다. 욕심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열 살, 열 다섯 살, 스무살, 스물 셋에 쓴 일기 속 내가 전부 다르다고.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고. 그래서 그때의 일기를 뒤적이면 지금은 떠올릴 수 없는 그 나이 또래의 캐릭터가 나오고, 그렇게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몰랐던 것도 아닌데 새삼 세월과 시간을 간직한다는 것은 추억을 저장하는 것 외의 역할이 있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내 오래된 일기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도 없었다. 아쉬워하기도 전에 잃어버린 어린시절의 증명들을 다시 찾아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서로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얼 하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p.148)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이야기하면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산산이 부서져내린 '9.11 테러'를 빼놓을 수 없다. 아홉 살 소년 오스카는 바로 그 역사적 사고로 아빠를 잃는다. 기약 없이 떠나버린 사람으로 남은 사람을 괴롭히는 영원한 화두는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것과 잃어버린 사람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봐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무엇으로도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공허감일 것이다. 심지어 아홉 살 꼬마 오스카에게도 슬픔은 온전하다. 오스카는 매일 아빠가 보고싶고 그립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아빠의 빈자리는 세상 전부일 만큼 커서 아무리 시니컬하게 세상을 바라보려 해도 슬픔이 옷자락을 놔주지 않는다. 몇 번이나 집에 전화를 걸어왔는데 수화기를 들지 못한 사실이 자꾸만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린다. 이걸 알면 엄마와 할머니가 더 슬퍼할텐데 어떡하지. 결국 오스카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숨긴 채 혼자만 아빠의 마지막 목소리를 간직하기로 한 채 옷장 안에 꽁꽁 숨긴다. 그리고 비로소 아빠의 '마지막'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 소설은 아빠의 아빠(할아버지)가 겪은 오래된 사랑 이야기와 전쟁의 상흔 그리고 오스카의 아빠 찾기가 똑같은 농도로 혹은 어느 것이 다른 어느 것보다 더 뜨겁고 뭉클하게 진행된다. 잘 버무려진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것처럼 황홀하기까지 해서 읽기를 멈출 수 없을만큼.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고, 내 마음도 그녀를 따라갔어, 하지만 나는 내 껍질과 함께 남겨졌어, 그녀를 다시 만나야 했어, 왜 그래야만 하는지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 욕망이 아름다웠던 거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잘못이 있을 수는 없는 거란다. (p.160)
지드의 <좁은 문>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구절은 아무도 가지 못하는 자신만의 길 혹은 누구도 이르지 못한 어렵고 중요한 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었다. 헤세의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오라'는 말은 한낱 작은 알갱이 같은 존재에서 좀 더 커지기 위해 혹은 존재의 가벼움을 인식하고 더 넓은 세상을 꿈꾸라는 말이기도 했다. 나 또한 아프락사스(abraxas)가 여기 아닌 어느 곳에 있을 거라 믿으며 그곳에 도달하려 안달했다. 성경을 비트는 헤세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해석은 기발했다. 그즈음 내 안에 늘 두 사람이 존재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금지된 것과 허락된 것을 제대로 분간하지는 못했다. 내 안에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존재하는 한 내게는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는 것을 어릴 때 그 책을 읽으며 절감했다.
아버지는 세계를 구하고 싶어 하셨어.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어. 하지만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도 없으셨어. 그것도 아버지다운 일이었어. 아버지는 내 생명을, 당신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를 한 생명과 저울질해 보았던 게 틀림없어. 혹은 열 사람의 생명. 어쩌면 백 사람의 생명. 아버지는 내 생명이 백 사람의 생명보다 더 무겁다고 판단하셨던 거야. (p.253)
오스카는 어땠을까. 오스카를 따라가다보면 작고 여린 오스카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죽은 아빠에게 보내는 목소리와 아버지가 죽은 아들에게(실제로는 태어나지 않은 아들 혹은 어딘가 살아있는 아들) 보내는 편지가 같은 온도로 들끓는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방해한 드레스덴 폭격이나 오스카의 행복을 방해한 9.11 테러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끝나지 않은 불협화음을 상징하고, 이는 할아버지와 오스카가 어쩌면 영원히 무거운 돌을 안고 살아야 함을 뜻한다. 시대의 불행 속에서 개인의 아픔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의미 없는 싸움이 비로소 끝나면 그들이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 속 모순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군인? 국가? 아니면 전쟁? 묻는다 치자.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아무도 이 문장을 가리키지는 않았지, 당신을 사랑해요.
그 주위에는 길이 없었어. 우리는 그것을 기어올라 넘을 수도 없었고, 끝이 나올 때까지 걸어갈 수도 없었어. (p.255)
할아버지는 폭격에서 겨우 살아남아 할머니와 결혼했지만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떠나버린다. 그는 많은 사람이 곁을 떠나버린 이 세상에 혼자만 살아남은 슬픔이 너무나 커서 어느 곳에도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다. 살아있되, 죽어버린 삶. 아내와 아들 뿐만 아니라 말도 잃었지만 끊임없이 시간을 글로 남긴다. 일기를 쓰고 아들에게 보내지도 못하는 편지를 쓴다. 그는 쓰면서 시간 안에 숨죽인다. 모든 시절이 글로 변한 노트가 폭삭 물에 젖어 회색빛이 되면 할아버지의 그 시간들도 온전히 사라질 것인가. 그러지 못한다.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스카는 네 개의 메시지 다음에 다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피해버림으로서 소년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비명과 솟구침,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아빠의 메시지를 외면한 순간 이 모든 것은 시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제때 해야 했던 말과 제때 들어야 했던 말을 제자리에서 밀어냈기 때문에 말들이 공기 중을 오랜 시간 떠돌다 결국 제자리를 찾아 오고야 만다.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고, 피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쿠션 한 줌 깔고 씩씩하게 부딪치는 것만이 떠난 사람이나 남겨진 사람에게 결국 더 나은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아니, 내가 말한다.
요즘 <해를 품은 달>에서는 운명을 이기려는 인간의 오만이 극에 달한다. 달이 해를 품겠다는데 달이 해를 품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이 세상을 주무른다. 왕위의 왕이 제 뜻대로 하는 일이 없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달과 해는 서로 만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달이 해를 품겠다는데, 행여 달이 해를 품다 소멸한다해도 그게 운명이라면 막아서는 안 되는 일 아닐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야 하는 말을 꼭 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아예 갖지 못했던 것보다는 잃어버리는 편이 낫죠. (p.433)
누군가의 위에 누군가를 완전하게 올려놓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디언은 친구를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 했는데 하물며 가족이란! 피를 나눠가지고 서로의 몸에서 서로의 몸을 탄생시킨 하물며 가족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는 가족을 말하는 데에 이 소설은 한 치의 모자람도 없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존재인지 묻지 않아도 가족은 모두가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존재들. 태어나기 전과 죽은 후의 세상이 같다면 가족은 어떤 이름으로든 보이지 않는 실로 꽁꽁 묶여 있을 것이다. 가족은 이름만으로도 너무 벅차고 무겁고 때로 헐겁다. 나는 그들로서만 증명된다. 그래서 알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얹혀 가는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너에게 얹혀볼까.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골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체를 알지 못해 늘 애태웠다. 스스로의 확신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나는 그래야 움직였다. 고집스럽게 세상이 흘렀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조금씩 컸다. 오스카가 아빠의 마지막 목소리를 외면했던 것을 후회하고 아쉬워하다 나중에 아빠가 남긴 열쇠의 주인을 찾기로 하면서 아빠 곁에 가까이 가듯, 보이지 않는 실이 이제부터의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알 수 없다. 내 뿌리와 잎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슬픔이 태어나겠지. 언젠가 증발하는 날도 오겠지. 언젠가 눈물과 비로 뿌려진 이 세상에 아빠를 데려다주겠지. 아홉 살 오스카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사랑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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