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침묵의 언어로 노래하는 세계
허순용(sellavy@yes24.com)
2003년 2월 8일, MBC 느낌표의 <책을 읽읍시다>코너에서는 제12차 선정도서를 발표했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였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무척 반가웠다. 정민 선생의 작업을 지켜봐 온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책이 널리 알려지고 보다 많이 읽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정 민 선생은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전공은 한문학이며 특히 한시와 문장론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청소년기에 한시에 매료되어 국문학에 입문한 이래 그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일에 매진해 왔다. 그간의 연구 성과만 보아도 선생의 성실성과 탁월함을 잘 알 수 있다. 박사논문인 <조선후기 고문론 연구>를 시작으로, 연이어 다음과 같은 책을 내놓았다.
뛰어난 시인이었으나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석주 권필을 다룬 『목릉 문단과 석주 권필』, 한시의 미학을 유려하고 깊이있게 살핀 작품『한시 미학산책』, 연암 박지원의 문장에 대한 비평서인 『비슷한 것은 가짜다』를 썼다. 김도련 선생과 함께 한국 애정한시 평설집 『꽃피자 어데선가 바람 불어 와』를 내고,『한국고전 비평론 자료집』과 『한국역대산수유기취편』을 엮고, 『통감절요』를 번역하고, 중세문학사에 나타난 도교적 상상력에 대한 논문을 모아 『초월의 상상』을 펴냈다. 또 공부하는 틈틈이 생각하고 느낀 바를 모은 산문집『책읽는 소리』, 취미인 전각을 살려 『돌 위에 새긴 생각』,『와당의 표정』을 펴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소개하기 위해 어린이용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를 내고, 그의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많은 질문에 답변하는 일까지 동시에 해 나가고 있다. 학문과 삶에 대한 참다운 애정이 없이는 이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그의 저서들은 모두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역시『한시 미학산책』이다. 이 책은 『현대시학』지에 1992년 2월부터 96년 5월까지 연재했던 원고를 다시 고쳐 만든 것으로, 연재 당시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책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한시에 대한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높은 안목을 보여주는 비평서이고, 창작의 원리와 현묘함을 다룬 창작론이기도 하다. 전통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문화론이자, 한시를 통해 언어의 실존적 모순을 논한 언어철학이다. 문장 하나 하나는 어렵지 않고, 이야기 한편 한편은 넓고 깊다. 책 전체가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영롱함을 잃지 않아 산으로 치자면 설악산에 가깝다.
이 산에 깃든 이야기는 모두 24편이다. 한시의 언어 미학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는 1,2,3 장을 비롯하여, 당시[唐音]와 송시[宋調], 정경론(情景論), 시안(詩眼)과 시마(詩魔), 잡체시와 파격시를 거쳐 선시(禪詩)에 이르기까지, 이 봉우리 저 골짜기엔 구름도 많고 물길도 여럿이다. 끝으로 한시를 왜 읽고 배우는지, 오늘을 사는 사람은 어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숙고하면서, 우리는 하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시를 보여주고 읽어주며 그 아름다움과 뜻을 친절하고 깊이있게 알려준다. 특히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이러한 한시의 미학을 저자가 '체험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한시가 등장하지만 하나같이 저자가 공들여 읽고 깊이 추구한 뒤에 내놓은 것이라 독자에게 결코 생경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예시가 되어 한시 전체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 역할을 한다. 그런 치열한 탐구와 엄격성이 있었기에 잘못 논증된 부분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태백의 유명한 구절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반박하고, 이 시가 17수의 연작시 중 15수임을 감안, 문맥을 살펴, 백발은 흰 머리가 아닌 달빛 받은 강물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 좋은 예이다. 또 권필이 의주에서 그를 찾아온 형 권겹을 만나 감격하며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의 7구를 잘못 해석하여 완전히 다르게 오역한 사례를 비판하며 적실한 해석을 붙이는 장면도 그러하다.
전반부에선 주로 한시의 미학을 논하였다. 반면 중반부 이후에는 시에 얽힌 시인들의 사연, 문자 유희에 가까운 시들, 그리고 조선후기 한시의 변천과정에서 보여주는 파격과 해체 등 '이야기'가 풍부하다. 시는 현실에 맞선 자기 성찰과 혁신의 산물이며 시인은 떳떳한 기상을 갖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얘기. 또 잡체시는 한시만이 가질 수 있는 문자 유희의 재미를 보여주는 데, 재치와 언어구사력이 흥미롭다. 조선 중후기에는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면서 한시에 대한 의도적인 해체나 파격이 성행하는데, 그 대표적 인사가 김삿갓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창작된 수많은 시들을 시대 상황과의 관련 속에 살피면서, 저자는 그 시들의 묘미를 인정하면서도 시대정신의 몰락이 가져온 문화의 하강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말과 글이 가고자 하는 곳을 노려본다. 왜 이렇게 치열할 정도로 한시와 문장론에 집착하는 걸까? 왜 문장론으로 박사논문을 쓰고, 박지원의 문장을 샅샅이 연구하며, 한시에 매달리는 걸까? '말' 혹은 '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그리워하며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리고 말과 글은 어떻게 드러나고 숨어야 하는가? 이것이 애초의 화두였던 바, 한시는 이러한 문장의 미학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곧잘 하는 얘기지만 시는 언어의 사원이며, 시인은 그 사원의 사제이다. 시는 '다 보여주지 않고 말하기'의 방식이며, 극단적으로는 한 글자로 죽고 사는 표현의 방식이다. 이는 언어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은 자가 취하는 존재 방식이다 . 그래서 시는 언어로 굳어버리기 전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더우기 한시란 어떠한가? 한자(漢字)는 소리 글자가 아니라 뜻글자이기 때문에 글자 한 자가 품고 있는 함축이 엄청나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도 메가톤급이다. 말하자면 한자는 침묵하는 언어이며 시는 침묵하는 노래이다. 이렇듯 한시는 컨텐츠로서의 가치가 무궁무진하지만 옛 글의 말투나 표현을 흉내낼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준열하고 사물과 시대를 읽는데 날카로왔던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할 뿐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강호에는 난다하는 무림의 고수들이 허다히 숨어있다. 그들은 없는 듯이 살지만, 때가 되면 조용히 그러나 신속 정확하게 나타난다. 그러니 나의 보잘 것 없는 지식과 안목으로 어찌 함부로 혀를 놀리겠는가? 하지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들도 집집마다 이 뛰어난 책을 비장(秘藏)하고 밤마다 책장을 넘기며 황홀경에 빠질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