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나 에밀 길렐스 같은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인기는 동양에서 특히 높게 나타난다. 이들의 스펙타클한 베토벤 역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유럽 본토의 시각은 이와는 좀 다르다. 러시아 인들은 무지막지한 완력과 흠 잡을 곳 없이 빼어난 테크닉으로 베토벤을 연주하고 있지만, 단지 우격다짐일 뿐 논리와 개념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이 때 이들이 놀리 정연한 연주의 교과서로 흔들어 보이는 것이 바로 켐프의 해석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시대 연주자들에 비해 그의 레퍼토리는 극히 제한적이다. 베토벤은 소나타 전곡 녹음을 무려 세 번이나 거푸 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 이외에는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가 다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극히 적은 작품들만을 연주했다. 비록 넓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연주하는 작품만큼은 누구보다도 깊은 연구로 작품이 지니고 있는 최적의 모습을 피아노로 그려놓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집념은 그가 후학들을 지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는데, 터키 출신의 신동 연주자로 그녀의 국비 유학을 도와주기 위해 국회가 소집되어 법까지 뜯어고친 전례를 만들었던 이딜 비레트는 그의 스승 켐프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 분이 가장 강조하셨던 것은 바로 섬세한 효과와 단순성이었습니다. 과장으로 인해 음악의 선이 왜곡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켐프가 지향하는 최고의 미덕이자 질서였습니다. 레슨 도중에 중요하다고 느낀 것을 적어놓으려고 하면 그것도 말리셨지요. 듣고 자연스럽게 몸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적으면서까지 억지로 노력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 분의 주장이었지요'
악보에 있는 것을 가장 단순하게 피아노로 옮기는 것, 그것도 연주자가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연주해 나가야 한다는 켐프의 이론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연주자는 드물다. 왜? 그 원칙을 100% 지키다보면 자칫 지루하고 재미없는 연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켐프는 피부만을 자극하는 표면적인 재미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음악의 재미는 단순하고 명료한 울림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논리의 미학이며, 작곡가의 의지를 탐구하고, 오직 그것만을 청중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절제된 나눔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켐프의 연주에 대한 비판은 뻔하다. 연주가 너무 재미없다는 것과 기교적으로 미숙한 부분이 가끔 보인다는 것인데, 두 가지는 서로 상통하는 것으로 모두 외관이 화려한 기교주의 연주에 탐닉해 있는 결과이다. 처음 친해지기는 어렵지만 일단 친해지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면, 켐프의 연주는 바로 그런 속 깊은 친구와도 같은 존재이다.
켐프는 1895년 11월 25일 베를린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위테르보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의 오르간 주자 겸 합창 지휘자였고, 후일, 프로이센 궁정이 있던 포츠담의 니콜라스 성당에서 이 일을 계속해 나갔는데, 그의 증조 할아버지 또한 평생 이 직함을 명함에 새기고 다닌 인물이었으니 켐프의 어린 시절에 있어서 음악이라 하는 것은 특별한 취미나 여가 활동이 아닌 매일의 일상과 다름없는 환경이었던 셈이다. 베토벤과의 첫 만남 또한 아주 어린 시절에 이루어졌다. 켐프의 회상을 들어보자.
'나는 베토벤의 소나타 악보를 펼쳐놓고, 라르고, 알레그로 같은 해독되지 않는 난해한 단어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의 저로서는 아버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그건 신이 쓰셨단다." 정도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는 정색을 하고 "그건 베토벤이 섰단다.'라고 하셨고, 그 베토벤이라는 위대한 인물의 이름은 그 순간부터 나의 뇌리에 확실하게 각인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접했던 베토벤이라는 이름은 소년에게 평생 신앙처럼 작용했던 것이다.
생활의 일부로 또 신앙처럼 느껴졌던 음악은 켐프를 계속 떠나지 않았고, 베를린 음악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켐프는 하인리히 바르트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로베르트 칸으로부터는 작곡을 배웠는데, 바르트는 한스 폰 뵐로의 수제자로 음악에 있어 독일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칸은 브람스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줄기 중의 하나였기에 베토벤 이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면면히 내려오고 있던 독일 음악의 물줄기가 켐프에게 와서 합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년기부터의 환경에서부터 여러 인연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켐프 자신의 노력 또한 이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1916년 베를린 음대의 졸업식은 음악에 있어서의 독일 혼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한 청년의 독무대였다. 피아노와 작곡 분야 모두 멘델스존 메달은 이 청년의 차지였고, 그 주인공은 당연히 빌헬름 켐프였다.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또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함께 해나갔던 켐프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정신 없는 기간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쟁과 혼돈으로 점철되어 음악가들에게 조용히 연주와 연습에 전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런 혼란은 29세의 켐프에게 벌써 슈투트가르트 음대의 학장 자리를 부여했고, 37살에는 작곡가로서 교향곡은 물론,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등 대규모 작품들을 두루 섭렵한 이후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켐프, 그러니까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이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의 상처가 아물어가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부터이다. 더욱이 1951년의 영국 투어를 시작으로 켐프의 연주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특유의 사색적이며, 꾸미지 않는듯한 그의 스타일이 완성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빌헬름 켐프를 이야기하자면 항상 베토벤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독일적'이라는 수식어가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독일 혹은 독일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켐프 음악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서양 음악의 역사에서, 물론, 바로크 시기를 지난 빈 고전파 이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고전주의 양식을 수립, 완성한 대표적인 인물들, 즉,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모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그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낭만주의 음악의 역사 또한 이 지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체코, 헝가리 등의 동유럽이나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 작곡가들의 음악을 가리켜 '국민주의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묶었을까?
사실, 이 시기의 독일은 음악의 중심을 이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켐프 앞에 붙어있는 독일의 의미는 보다 좁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독일이 중심이 되어 있던 당시의 음악 가운데에서도 베토벤과 브람스로 대표될 수 있는 유럽 음악의 적자, 순수 독일 음악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음악의 해석에 대한 한, 누구도 켐프의 연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토마스 만에게 어떤 이가 묻기를 '히틀러의 독일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하자, 대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거기 있는 독일은 독일이 아니야. 진짜 독일은 내 안에 존재하고 있지.'
전쟁은 끝났고, 히틀러의 철권 통치도 막을 내린 지 오래지만, 이런 질문과 대답은 켐프의 음악 앞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 독일은 언제나 켐프의 음악 안에 있다고.
켐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을 같이 했던 루돌프 제르킨 또, 클라우디오 아라우와 비교해보면, 켐프의 이런 독일적 특징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제르킨이나 아라우가 베토벤과 브람스를 연주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들의 베토벤 또한 훌륭한 것들임에 분명했지만, 독일 작곡가의 작품과 켐프의 인연은 유난히도 독특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누가 일부러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이고 운명적인 것이 아닌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