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리는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정도로 유복한 환경임에는 분명했다. 아버지로부터 처음 피아노를 배웠던 미켈란젤리가 브레시아 음악원에 첫 걸음을 한 것은 네 살 무렵인데, 다섯 살 때부터는 훨씬 나이 많은 학생들과 어울려 교내 음악회를 엮어나가기도 했다. 완전한 외부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자신 내부로 꼭꼭 숨어 들어가 버리는 그의 독특한 성격은 어린 시절의 교내 음악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한 번은 무대로 걸어나온 미켈란젤리가 피아노 앞에 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가 의자가 너무 높다며 그를 안아서 의자에 올려놓아 주고서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주를 시작했다고 하니 꼬마치고는 너무 맹랑하지 않은가.
1938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쿨에서 관객들은 그의 연주에 흥분했지만 성적은 겨우 7등. 완벽주의자 미켈란젤리에게는 뼈저린 패배와도 같았지만, 이듬해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유럽 전체가 전화에 휩싸여 있던 이 시기 온전하게 음악을 즐길 수 있었던 곳은 중립국인 스위스뿐이었다. 제1회 제네바 국제 쿵쿨에서 그는 리스트의 1번 협주곡을 연주했고, 그의 연주를 들은 심사위원 코르토는 '리스트가 부활했다'고 소리쳤다.
코르토의 외침은 대단한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삽시간에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가 되었던 것이다. 그 명성은 2차 대전의 포연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았고, 1948년의 미국 순회 연주, 또 쇼팽 서거 100주년 기념 연주회는 미켈란젤리가 거장으로 도약하는 훌륭한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정갈하고 섬세하기 그지없는 미켈란젤리의 연주는 2차 대전 이후 새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객관적이고 이지적인 음악의 모습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엄청난 페달 사용을 통한 루바토로 음향효과만을 노리는 연주나, 자신만의 독특하고 주관적인 느낌을 전하는 자의적인 해석들은 이제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투명하게 갈고 닦은 순수한 울림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리의 연주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것이어서 청중들의 즉각적이고 열화같은 반응을 얻어냈지만, 이 또한 그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연주를 끝내고 무대 뒤로 걸어나온 미켈란젤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에게 열광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빠진다. 그들의 열광은 당연히 베토벤이나 쇼팽 같은 작곡자들을 향해야 마땅한 것이다. 나는 겨우 그들의 악보를 전달했을 뿐이지 않는가'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에 있어서도 미켈란젤리는 다른 이들과는 너무나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볼로냐 음악원, 또 토리노와 루가노에서의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많은 이들이 그의 문하를 거쳐갔는데, 마우리치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연주를 해보임으로서 가르침을 대신하고는 했는데, 자신과 똑같은 방법으로 연주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고 하니, 제자들은 오죽 처신하기가 어려웠을까.
미켈란젤리가 워낙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이다보니 그의 기이한 행적을 나열하는데 너무 많은 지면을 소비한 것 같다. 사실, 그의 기이한 행적을 알건 모르건 그의 음악이 들려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비정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게 벼려진 그의 울림은 작품의 크고 작음을 떠나 항상 그 안에 내재해 있는 것들을 직설적으로 드러나게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진행되어 나가는 그의 손놀림에 어떤 때는 소름이 끼치기도 하지만, 신랄하고 날카로운 감각만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동물적이다. 그러기에 그 수많은 기행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리의 이름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는 연주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것이고, 작곡가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청중이 있건 없건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건반 앞에 앉아있는 시간에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연주하는 음악이 있을 뿐이고, 앞으로 연주할 선율이 있을 따름입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바로 음악인 셈이지요.'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다름없는, 이렇게 잘난 체 하고 건방진 언행의 주인공은 바로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이다. 그저 평범한 피아니스트나 연주자를 꿈꾸는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면 주위의 인물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만, 미켈란젤리이고 보니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는 그런 인물이다. 미켈란젤리의 음악을 듣고 그를 흠모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미켈란젤리가 계속 보여주어 왔던 그의 의식 구조와 행동은 정상인의 그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그는 평생동안 자신의 피아노와 함께 움직였다. 너무나 예민한 악기이기 때문에 다른 피아노로는 도저히 음악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구 반대편의 공연장일지라도 자신의 피아노를 공수해야만 했고, 그 피아노를 온전히 관리할 조율사가 항상 따라다녔음은 물론이다. 그의 말처럼 진동이나 습도에 너무나 민감한 피아노는 긴 여행 후에는 섬세한 튜닝을 거쳐야만 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옮겨다니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상식이지만, 미켈란젤리의 고집 앞에서 상식은 그저 상식일 뿐이다. 물론, 침머만 같은 연주자들 또한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미켈란젤리만큼 심하지는 않다. 어디 그뿐인가. 몇 년 전부터 계획되었던 연주를 갑자기 취소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공연 기획사의 담당자들은 미켈란젤리의 공연이 다가오면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피아노의 상태, 심지어 날씨까지 자신의 기분과 맞지 않으면 취소하기 일쑤였다. 일본 동경에서도 첫 날 연주를 돌연 취소해 버렸는데, 이유는 긴 여행을 한 피아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인다는 것. 일본측 담당자들 위약금을 물리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하자 그는 평생동안 일본에 다시 가지 않았다.
녹음을 하는 스튜디오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푸르트벵글러나 첼리비다케처럼 밀실에서의 연주를 지독히도 싫어해서 그 양 또한 많지도 않지만, 마이크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세팅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녹음에 임하는 그의 결벽증은 유명한 것이었고, 녹음 기사 이외에 어떤 이들의 접근 또한 용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강박관념은 음악을 넘어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분명 이탈리아인이기는 했지만 밝고 쾌활하게 항상 떠들어대는 보통의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정반대였다. 알프스의 설봉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곳에서만 살았고, 외부인과의 접촉은 신경질적으로 꺼려했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부인 줄리아나의 존재 사실은 물론이고, 1970년의 이혼마저도 아는 사람이 드물어 독신으로 알고 있는 이도 적지 않다.
이탈리아인이지만 이탈리아를 너무나 싫어하는 것도 유명한 일이다.
미켈란젤리는 2차 대전 당시 공군 조종사로 참전까지 했던 인물이다. 비행기를 몰았던 그의 이력은 후일 사고와 부상을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스포츠 카에 몰두했던 것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애국심의 소유자가 1968년 이후로 이탈리아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안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는데, 사실 별것도 아닌 사건 때문이다. 미켈란젤리가 지분을 가지고 있던 레코드 회사가 파산을 하자 이탈리아 당국은 그의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고 이에 격분한 미켈란젤리는 이탈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이주해버린다. 이탈리아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90년 런던에서 예정되었던 한 연주회는 이탈리아 놈들이 60여 명이나 단체로 표를 구입했다는 이유로 취소하기도 한다.
당하는 사람들이야 상식을 넘어서고 있는 그의 요구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겠지만, 미켈란젤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음악의 연주는 마치 종교적 제례와도 같은 것이어서 주변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들이고, 사소한 것 하나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이미 그 의식은 의미를 잃은 것이기에 굳이 강행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