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틀담의 꼽추
원종원 (뮤지컬 컬럼니스트/순천향대 신방과 교수)
몇 해 전 프랑스 친구로부터 뮤지컬 음반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영미권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뮤지컬 공연시장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프랑스인지라 농반진반으로 불어를 몰라 재미있을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 곳엔 너무도 아름다운 선율이 담겨 있었고, 꼼짝없이 매료돼 몇 달 동안 자동차 오디오에서 CD를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필자가 처음 '노틀담의 꼽추(Notre Dame de Paris)'를 만났을 때 일이다.
1998년 9월 첫 선을 보였던 이 뮤지컬은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가히 '국민 뮤지컬'이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큰 인기를 기록했다. 간혹 팝 록 뮤지컬(혹은 Pop Rock Blockbuster Musical)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선율에 대중적인 대형 록 뮤지컬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연 이듬해 프랑스를 찾았을 때 길거리 곳곳마다 혹은 라디오 방송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주제곡을 들을 수 있었던 기억도 난다. 그만큼 프랑스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실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프랑스산(産) 뮤지컬이라면 단연 '레 미제라블(Les Mis?rables)'을 꼽을 수 있다. 1980년에 초연됐던 이 뮤지컬은 끌로드-미쉘 쉔버그(Claude-Michel Sch?nberg)와 알랑 부브릴(Alan Boublil)이라는 프랑스의 황금콤비가 만든 작품이다. 프랑스에서는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다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빵 한 조각을 훔쳐 19년간 옥살이를 하는 인본주의의 상징적 인물, 장 발장과 그를 쫓는 법과 제도의 화신 - 자베르 경감의 얽히고 설킨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이 '레 미제라블'이 외국에서 흥행한 것과는 달리 정작 프랑스에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원작 자체의 스케일이 워낙 장중한데다 진지한 스토리보다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프랑스 대중의 취향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했던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원작 그대로가 아닌 영국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쉬(Cameron Mackintosh)의 숨결이 가미된 1985년판 영어 버전이었고(마치 우리의 '지하철 1호선'이 독일 원작의 그것을 완전히 재구성했던 것처럼),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91년에는 이 영어로 재제작된 공연의 불어 역(逆)번역 뮤지컬이 파리의 모가도르 극장에 올려지기도 했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인 셈이지만 문화 마케팅에서 국가와 문화를 불문하는 세기적 흥행작의 출현은 쉽지 않다는 무대위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계기가 됐다.
같은 빅토르 위고의 원작이지만 프랑스 사람들이 선택한 작품은 '레 미제라블'이 아닌 '노틀담...'이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설득력을 갖게된 것도 이런 문화적 배경 탓이다. '노틀담...'은 부브릴과 쉔버그가 '레 미제라블'에 선보였던 스펙타클한 극적 구조를 따르면서도 이리저리 꼬여있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어 프랑스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입맛에 꼭 들어맞는' 진일보된 작품으로 여겨졌다. 누구라도 첫 눈에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집시 미녀 에스메랄다를 둘러싸고 주교인 프롤로, 군 장교인 퓌부스, 약혼자인 프로-드-리스 그리고 노틀담 성당의 종치기인 불구 꼽추 콰지모도에 이르기까지 각자 쏟아내는 자신들의 이야기와 사랑의 고백들은 노래같은 시구를 표현하기 좋은 불어와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작곡을 맡았던 리샤드 꼬끼엉뜨(Richard Cocciante)와 작사가 뤽 플라몽던(Luc Plamondon)은 모두 뮤지컬을 만들기 이전 이미 프랑스 대중음악계에서 인정받던 흥행 제작자들이었기에 프랑스 문화 특유의 대중적 코드를 읽어내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 시작돼 전대미문의 엄청난 흥행과 대중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 뮤지컬은 프랑스 전역에서는 물론 기타 불어문화권으로도 그 영향력을 넓혀 벨기에, 스위스 그리고 캐나다 등지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공연됐다. 2000년에는 영화 '사관과 신사'의 주제곡인 '업 웨어 위 빌롱(Up where we belong)'이나 '타이타닉'의 '마이 허트 윌 고 언(My heart will go on)'의 작사가인 윌 제닝스(Will Jennings)가 참여, 영어 번역 음반이 제작되기도 했다. 이 곳에는 세계적 팝 스타인 셀린 디온을 비롯, '지저스 크라스이트 수퍼스타' 30주년 기념공연에서 예수역으로 나와 각광을 받았던 미성의 가수 스티브 발사모(Steve Balsamo), 호주의 대표적인 뮤지컬 여가수 티나 아레나(Tina Arena) 등이 함께 해 뮤지컬 매니아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같은 해 런던 웨스트엔드의 도미니언 극장에서는 영어버전의 공연이 올려지기도 했는데, 호주태생의 금발 미녀가수 카일리 미노그의 여동생인 데니 미노그(Dannii Minogue)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됐었다. 하지뢸 '노틀담...'의 팬들에게는 아쉽게도 이 공연은 장기상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때마침 미국에서 불거진 9.11 테러 여파로 관광객이 급감한 데다 앞서 설명한 영미권과 불어권의 미묘한 문화적 취향의 차이가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영미권에서의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한 흥행이 '노틀담...'이 이룬 성과 자체를 빛바라게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작품은 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하는 프랑스 뮤지컬들의 신(新)부흥기에 결정적인 초석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노틀담...'의 흥행은 프랑스 뮤지컬계 혹은 프랑스 공연계의 산업화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등장하는 대중적 성격의 팝 록 뮤지컬 혹은 록 오페라 작품들 - 예를 들자면 '십계(Les Dix Commamdements)'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et Juliette)'같은 대형 스펙타클 뮤지컬의 탄생을 가져왔다. 실제 무대로 제작된 '노틀담...'에서 히로인인 에스메랄다를 맡았던 엘렌 세가라(Helene Segara)는 요즘 프랑스에서 소위 '가장 잘 나가는' 절정의 인기 가수가 됐으며(오리지널 파리 캐스팅 음반에서는 세가라가 아닌 노아(Noa)가 이 역을 맡았다), 이외에 콰지모도 역의 가루(Garou)나 프롤로 역의 다니엘 라브와(Daniel Lavoie), 시인으로 나오는 브루노 뻴리띠에(Bruno Pelitier)는 모두 프랑스 최고의 뮤지컬 배우이자 가수로 등극했다.
'노틀담...'의 무대는 형이상학적인 매력으로도 유명하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식의 대규모 특수효과가 가미되는 사실적인 무대가 아닌 프랑스 특유의 예술적 감각과 미술적인 축약이 돋보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는 미술 세트가 '노틀담..'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해낸 셈이다. 등장인물의 의상도 과거의 그것에 국한되기보다 현대성과 역사성이 절묘하게 교차되는 형식을 띄고 있으며, 이는 또한 형이상학적인 무대와 함께 잘 어우러져 관객으로 하여금 원작 소설 속의 배경을 과거 파리의 노틀담이 아닌 현재의 이야기로 무리없이 끌어들이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역시 이 뮤지컬의 가장 큰 매력은 아름다운 음악이다. 두 세 번만 반복해 듣다보면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멜로디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그만큼 인상적이면서도 대중적이고 감미로운 노래들이다. 오는 2004년 말에는 인터내셔널 투어팀의 국내 초연 무대도 예정돼 있어 기대가 된다. 미리 음반을 통해 소문난 명작을 맛보는 것은 '보는' 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자 세심한 배려다. 모쪼록 국내 애호가들에게 이국적인 멜로디의 흥행 뮤지컬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