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세계의 거장 정명훈
2005년 2월 이성일
지휘자로서의 행보
정명훈은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음악애호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역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음악가인 정경화(violin), 정명화(cello)의 동생이다. 뉴욕의 매네스(Mannes)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한 후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피아노 외에 지휘를 더 공부했다. 1974년에는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등상을 받는 쾌거를 이룩했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눈여겨본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는 1978년에 정명훈을 자신이 맡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보조 지휘자로 임명했고, 2년 후에는 그를 다시 부지휘자로 승격시켜주었다. 이후 정명훈은 1984년에 독일 자르부뤼켄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 갔었고(1989년까지), 1986년에는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하면서 드디어 세계 음악인이 갈망하는 꿈의 무대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명함을 내밀었다.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한 후 그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졌다. 정명훈은 그가 스승처럼 모시는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의 영향을 받아 베르디의 오페라에 정통하다는 평을 자주 듣게 되었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유명한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하는 기회를 자주 얻게 되었다. 1987년부터는 피렌체 시립극장의 수석 객원지휘자(1992년까지)로 있었고, 1989년에는 마침내 아트투로 토스카니니 상까지 받았다. 같은 해에 정명훈은 바렌보임의 뒤를 이어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의 지휘자가 되었는데, 당시 이 소식은 우리에게 커다란 국가적 경사로 보도되었었다. 유럽 음악계에서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바스티유 오페라의 오케스트라를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와 당당히 자웅을 겨루는 악단으로 만들어놓으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정명훈의 능력은 정말 놀라웠다. 하지만 운영진과의 마찰로 고심하던 정명훈은 씁쓸한 뒷맛을 느끼며 1994년에 바스티유를 명예 퇴진해야 했다. 이미 세계 음악인들과 애호가들은 정명훈의 능력과 그가 정치적 희생으로 퇴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상세히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며 일하다가 도중하차한 거장을 영입하려는 곳은 여전히 많았다. 정명훈은 1997년 1월 아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그곳의 음악 감독 겸 상임지휘자 직을 맡았고, 곧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선택했으며, 2000년에는 프랑스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정명훈의 음반들
정명훈이 지금까지 내놓은 음반들은 거의 대부분이 최고의 평가를 받아왔다. 그래서 정명훈의 음반을 좀 들어보고 싶은 애호가들은 초기 녹음이든 후기 녹음이든 선택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단순하게 말하면, 정명훈의 디스코그래피는 곧 그의 명반목록이 되는 셈이다. 이는 물론 정명훈이 하나하나 자신의 결과물에 최선을 다해왔다는 증거다. 초창기 정명훈의 음반은 스웨덴의 BIS사에서 나왔는데,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정도를 제외하면 그의 디스크 대부분이 덴마크의 작곡가 닐센(Nielsen)의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닐센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위한 협주곡에는 강동석의 바이올린까지 합세해서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냄으로써 북구의 애호가들한테 코리언 파워를 유감없이 과시하기도 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도 정명훈이 초창기에 남긴 닐센 녹음들이 여전히 최고의 명연으로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BIS에서 관심을 표명한 드보르자크의 음악은 도이체 그라모폰(DG)으로 이어져 교향곡 3번,6번, 7번, 8번(7번, 8번은 BIS에서 녹음했었다) 그리고 <현을 위한 세레나데>까지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정명훈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급 가수들과도 여러 가지 녹음을 남겼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음반에서 이름을 찾아 나열해보면, 스페인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이탈리아의 맹인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와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미국의 소프라노 캐슬린 배틀과 셰릴 스튜더, 그리고 웨일스의 베이스 바리톤 브린 터펠 같은 이들이다. 이런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최고의 지휘로 뒷받침함으로써 정명훈은 그들의 인지도를 한층 더 높이 끌어올렸다.
정명훈의 디스코그래피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역시 현대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만들어진 일련의 음반들일 것이다. 2002년 메시앙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정명훈이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메시앙의 음악을 연주하려고 했을 때,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는 한국의 거장 정명훈을 ‘영적인 지휘자(Chef spirituel)’라고 표현했었다. 그에게는 종교적 신비주의 색채가 강한 메시앙의 음악을 해석해내는데 특별한 감성과 혜안이 있음을 암시한 대목이었는데, 실제로 메시앙은 정명훈이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는 지휘자라고 생전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투랑갈릴라 교향곡>, <예수 그리스도의 변용> 등 지금까지 정명훈이 도이체 그라모폰을 통해 내놓은 일련의 메시앙 음반들은 작곡가의 찬사를 기억하는 애호가들 앞에서 특별한 지위를 유지해왔다.
한껏 부푼 기대
얼마 전 매스컴은 정명훈이 2005년부터 3년간 서울시향(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한다고 전해줬다. 세종문화회관 산하기관에서 재단법인으로 독립하는 서울시향이 새로운 출발을 세계적 거장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1998년 KBS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가 행정상의 마찰로 네 달 만에 사임하면서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 고국에서 일체의 고정 직책을 맡지 않겠다던 정명훈. 그가 서울시의 제안에 그리 어렵지 않게 응했던 이유나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벌써부터 우리 애호가들은 궁금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뒷얘기가 적지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 음악문화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직접 맡거나 객원 지휘해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거장이 다시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와서 높은 수준의 음악을 우리 애호가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기뻐해야할 일이다. 서울시향을 맡게 된 일은 정명훈 개인적으로도 약간은 특별한 감회로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1960년 그가 발이 페달에 잘 닿지도 않던 일곱 살의 나이에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했을 때 그의 피아노를 받쳐주며 연주했던 오케스트라가 바로 서울시향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장을 맞이하는 우리 애호가들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 있다. 그가 서울시향을 세계적 수준의 악단으로 키워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애호가들과 보다 가깝게 호흡하는 지휘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