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미 Anytime Anyplace
CCM 칼럼리스트 유재혁
대한민국에 CCM이란 장르의 음악이 그 자리매김을 하게 된지 꽤나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최근 음악시장에 만연한 불황 때문에 그나마 구축된 CCM 시장의 가치가 다소 빚바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최근 십수년간을 되돌아보면 분명 국내 크리스천 음악계가 걸어온 여정이 뚜렷하게 그 행로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복음성가라는 타이틀에서 그 궤도를 조금 더 대중적으로 선회한 80년대 중반과 90년대의 국내 크리스천 음악계, 그 익숙치않은 처녀지에 발을 내딛은 이들은 분명 우리가 '선구자'라고 불러 마땅한 이들이었다. 구태의연한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나라 크리스천 음악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배 음악의 지평을 연 주찬양, 역 크로스오버의 좋은 사례를 보여준 하덕규, 클래시컬한 장르에 대중적인 태를 입혔던 박종호, 친근한 음악들로 CCM을 풀어간 최인혁... 그리고 그 이름들중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송정미다.
그녀의 첫 앨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에 수록된 노래 "축복송"이 우리나라의 교회 음악 문화에 남긴 자취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한국의 경제적인 안정 이후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가치있는 시도들이 더해지는 동안 교회안에서도 해외 음악의 단순한 번안이 아닌 '우리 음악'으로 찬양드림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걸어 가야할 길들, 풀어야할 난제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할때 "축복송"이 사람들 마음에 가져다 준 위로는 단순히 한곡의 노래가 일궈낸 성과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최근 많이 불려지고 있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나 "또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같은 찬양들이 갖고 있는 '축복'의 테마는 이 노래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송정미의 음악 사역에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면 그녀가 단순히 '축복송의 송정미'라는 수식만으로 그 이후의 사역을 이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명 송정미는 '과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음악인이다. 첫 앨범 이후 (라이브 앨범을 제외하자면) 두번째 스튜디오 프로젝트가 발표된 해가 3년 뒤인 94년이었고, 그 이후에도 앨범을 발표함에 있어서 늘 2년 혹은 3년의 짧지 않은 간격이 있어왔다.
꾸준한 콘서트와 현장사역도 앨범이 더디게 나온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본인 자신이 앨범을 만듦에 있어서 치열하리만큼의 최상의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앨범사이의 간격들은 결코 송정미의 음악활동에서 공백기가 아니었다.
그 산물인 두번째 스튜디오 앨범 [복있는 사람은]과 세번째 앨범 [이전보다 더욱]은 시편과 찬송가라는 아주 원론적인 기독교 텍스트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그러나 듣기에는 결코 부담이 없는 그런 앨범들이었다. 아마 첫 앨범의 좋은 반응에 이어 송정미는 이 두 장의 앨범들을 통해 크리스천 아티스트로서의 자기 확인을 다시금 해가며, 기세좋은 사역의 영속성을 만들어가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앨범들 가운데 큰 절정을 마련한 앨범으로 이후에 나온 (공식적으로는 네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99년의 [지금 여기에]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막연하게 크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힘의 선이 뚜렷했던 노래 "너는 크게 자유를 외쳐라"를 비롯해 이전의 송정미 앨범에 비해 조금 더 그녀 자신이 세상을 향해, 교회를 향해 말하는 이야기를 투영시켰던 이 앨범은 분명 수작이었고, 많은 이들은 자연히 송정미의 '다음 앨범'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꽤나 길었다. 햇수로는 거의 6년 만에 송정미의 새 음반 [Anytime Anyplace]를 만나게 된 것이다.
- Anytime Anyplace
송정미의 음악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클래식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녀 자신이 성악을 공부한 탓도 있지만, 인스퍼레이셔널 (워십과 부드러운 팝의 중간쯤에 놓일 수 있는 장르) 음악이 초기 한국 CCM의 큰 부분을 차지해왔기에, 많은 아티스트들에게도 그런 장르가 한국 CCM의 공인된 장르로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송정미는 이런 상황과 자신의 보컬 역량을 잘 배합시킬 수 있는 아티스트였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송정미는 달랐다. 99년 앨범이나 최근의 공연 등에서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이전과는 다른 무엇이었고, 그것이 새 앨범에 반영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를 예상하기 위해서 선견지명이나 뛰어난 혜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에서 들려지는 삶의 적용이 살아 있는 가사, 그리고 공연에서 보여지는 일반 아티스트들과의 조우, 그리고 몇몇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가했을 때나 방송 출연을 통해 간간히 들려주는 새로운 노래들은 그대로 2005년 새 앨범에 가미될 편린들이었기 때문이다.
새 앨범 [Anytime Anyplace]는 그 편린들의 아주 충실한 반영이다. 새 앨범의 곳곳에는 구성지게 짜여진 장르의 배치, 이전의 음악적인 느낌들을 이어온 친숙함, 그리고 앨범 전체 안에서 일관성 있게 보여지는 테마가 잘 살아있다. 무엇보다도 음악적으로는 한 장의 음반에서 꽤나 다양한 장르로의 시도를 만날 수 있다는 느낌 좋은 구성이 돋보인다.
하지만 정말 반가운 것은 이런 시도가 이전의 앨범과 단지 다르게 보이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송정미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의 때늦은, 그리고 솔직한 표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길승, 김도현, 류형선 등 잘 알려진 송라이터들의 노래는 그들의 이전 음악을 떠올리자면 충분히 그 분위기를 예상할 만하지만, 정작 그 노래들이 송정미에 의해 불려질 때 기성복을 덜컥 걸치는 말쑥함 보다는, 송정미라는 보컬의 음악적인 역량에 맞춰 잘 재단된 맞춤복이 입혀진 듯한 깔끔함이 느껴지는데 이런 점도 송정미라는 아티스트의 솔직한 표현에 일조하고 있다.
원초적인 비트로 앨범의 포문을 여는 "왕이 여기 계신다", 향수에 푹잠기게 하는 멜로디와 하모니의 "내가 주의 신을 떠나", 포크 내음이 짙디 짙은 "친구", "지금까지 지내온 것" 등의 노래들은 송라이터들의 충실한 결과물과 이를 자신의 음악으로 구현해낸 송정미의 멋진 합작품이다. 송정미 자신이 직접 만든 "주와 같이 길가는 것"같은 노래에서 들려지는 흥겨운 스윙 리듬에서는 하물며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기에 앨범의 작은 클라이막스를 만들어내는 - 김현철과, 강명식, BMK가 함께한 멋진 발라드 - "서로 사랑하라"까지 이르게 되면 이 앨범이 뚜렷히 보여주고 있는 개성의 자연스러움에 일말의 불만도 가질 수 없다. 송정미는 분명 이 앨범을 자신이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듣는 이들에게 편하면서도 즐거운 감상의 터를 마련하는 음악들이 제 역할을 하는 동안 그안에 담긴 가사는 정말로 명백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바로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송정미의 새 앨범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묵상하고 있고, 여기에 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기준점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태초일 수도 있고, 바로 지금 살아 숨 쉬는 우리네 삶의 순간일 수도 있고, 그분의 길을 따라온 여정의 진행형 속에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앨범의 포문을 여는 "왕이 여기 계신다"에서 선언되는 그분의 임재는, 우리가 걸어온 길에서 함께하신 것에 대한 감사("주와 같이 길가는 것", "지금까지 지내온 것"), 그분이 주신 삶의 계명과 교훈 속("평화가 있기를", "서로 사랑하라")에서 다시 드러나고, 다시 한번 앨범의 대미를 맺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고백 속에서 확인된다.
이 땅에 임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찾는 것. 어찌 보면 그 구도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하나하나 삶이라는 이름으로 체험하는 여정의 모습일수도 있다. 그렇기에 송정미의 새 앨범 [Anytime Anyplace] 역시 하나의 여정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리고 그 여정에의 동참을 멋진 노래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은 분명 본작이 갖고 있는 최고의 미덕임에 틀림없다.
국내 CCM의 1세대를 연 송정미의 새 앨범이라는 타이틀이 우리에게 주는 기대는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다소의 어두움이 드리워진 음악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기대할 수도 있고, 교회 음악에 펼쳐질 또 다른 전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앨범 [Anytime Anyplace]를 듣는 동안 마음에 쓰여진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내 안의 삶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였고, 내 안의 삶에서 함께 걸어가고 계신 하나님의 이야기였다. 물론 이는 위에서 말한 '기대'와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기억할 때, 그분은 온 세상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시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송정미의 [Anytime Anyplace]가 많은 이들에게 정말 '고마운' 앨범이 될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