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프랑스 철학의 “얼굴 없는 사제”,
『모리스 블랑쇼 선집』 발간
―문학적 경험을 통한 근대성의 와해, 새로운 공동의 언어를 열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최근 세계 철학계의 중심 화두다. 자본주의나 제도 정치에 대한 단순한 비판 때문이 아니다. 탈정치화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현대라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다. 그리고 이 정치성은 기존 담론에서 배제되어 온 자들, 목소리 없는 자들의 복권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 이러한 때 그린비에서는 온몸으로 20세기를 살아내며 현대의 심층을 규명하고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작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선집을 발간한다. 2009년 1월 1차분으로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정치평론 1953~1993』(Ecrits politiques 1953~1993)이 출간되었다.
블랑쇼는 평생 대중에게 직접 노출하는 일을 꺼렸기 때문에 한때 그저 은둔하는 작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작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모리스 블랑쇼 선집』 발간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한 사상가를 본격으로 소개한다는 것 이상의 의의를 띤다. 첫째로 ‘지식인의 죽음’ 이후 어떻게 민족이나 계급을 넘어선 주체로서 대중을 인식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꿀 수 있을지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현 시기, 20세기 프랑스 지성계의 현실 참여적 흐름 안에서 블랑쇼를 재위치시키면서, 21세기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일지 성찰해 볼 수 있다. 둘째로는 블랑쇼의 언어가 복잡한 이론적인 논의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삶에 호소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사유는 아카데미를 넘어서서 여러 삶의 양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적 틀에 대해 강력한 탈-프로그래밍, 탈-코드화의 힘을 발휘하는 블랑쇼의 사유는 우리를 에워싼 시장전체주의와 경제 유일사상에도 작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남다른 겸허함을 보여 준 블랑쇼의 언어가 ‘모리스 블랑쇼’라는 한 개인의 이름을 빛내기보다는 어떤 공동의 ‘우리’에 참여하게 하고, 새로운 공동의 언어를 생성하고 소통하게 하는 데에 있다는 데서 선집 발간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간 그 사상적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체상의 독특함과 사유의 깊이, 한국의 블랑쇼 연구자가 매운 드문 상황이 겹쳐져 블랑쇼의 진면목은 한국 독자들에게 제대로 소개된 바가 없다. 1990년대에 『문학의 공간』과 『도래할 책』(출간 제목은 ‘미래의 책’)이 번역된 바가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절판되어 독자의 손에 닿지 않게 되었다. 이번 선집 발간에는 프랑스에서 ‘블랑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한국 최초로 블랑쇼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관동대 고재정 교수, 자크 랑시에르와 장-뤽 낭시의 지도 아래 블랑쇼의 ‘바깥’ 개념으로 박사논문을 쓴 박준상 박사, ‘블랑쇼에서 글쓰기의 문제’로 학위논문을 쓴 박규현 박사, 그리고 블랑쇼와 깊은 사상적 교류를 나누었던 푸코·바타유·클로소프스키 연구자인 심세광·이재형·이달승 박사가 발간위원회에 참여했다. 또한 발간위원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용어통일 회의를 통해 한국어판 ‘블랑쇼 용어들’을 만들어 냈다. 그 용어들을 바탕해서 번역된 선집 전체는 철학·문학·정치를 오가는 블랑쇼의 다층적 사상을 총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 『모리스 블랑쇼 선집』
1. 죽음의 선고 | 2. 문학의 공간 | 3. 도래할 책 | 4. 기다림 망각 | 5. 무한한 대화 |
6. 우정 | 7. 저 너머로의 발걸음 | 8. 카오스의 글쓰기 | 9. 정치 논평 1953~1993
(선집 번호는 프랑스어판 출간년도 순)
모리스 블랑쇼는 누구인가?
▶ 현대 프랑스 철학의 영감의 근원
2003년 2월 24일, 한 장례식장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철학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어떻게 바로 여기서, 이 순간, 이 이름 모리스 블랑쇼를 부르는 이 순간 떨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추도문(「영원한 증인」)을 읽은 사람은 자크 데리다. 세상을 떠난 이는 그와 근 40년간 철학적 대화와 함께 꾸준한 우정을 주고받은 작가, 나흘 전 95세로 세상을 떠난 모리스 블랑쇼였다.
철학자이자 작가로서 블랑쇼는 말라르메 시학의 영향을 받아 현대 철학·문학의 흐름을 창조적·비판적으로 이어가는 ‘바깥(Dehors)의 사유’를 전개시켰다. 문학 비평서 『문학의 공간』에서는 작가로서의 경험을 통해 카프카, 릴케, 횔덜린 등의 작품세계를 깊이 파고들면서 문학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보여 주었다. 문학의 특성을 죽음에 빗대어 표현하면서, 문학은 황폐의 공간이며 이러한 공간 속에서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블랑쇼는 근대성이 쌓아올렸던 거대한 이념 더미를 태우는 불꽃을, 그리고 이 더미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 준다. 그는 이 잿더미 가운데에서, 근대성 전체를 회상하면서 그 죽음의 미사를 집전하고 근대성의 조종(弔鐘)을 울리는 ‘사제’이다. 그 울림 가운데 그는 다만 우리를 우리 자신과 맞닥뜨리게―우리가 가졌던 환상을 직시하게―한다. 근대성을 뒷받침했던 이념적 지주들(예를 들어, 인간의 주체성, 신, 예술의 자율성과 절대성, 예술가의 천재·내면성, 공동체의 이념) 자체가 블랑쇼에게서 무너져 내린다.
그는 한편으로는 건조하고 냉정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단호하고 열정적으로, 어떻게 주체(이성의 사유 능력)의 최고주권이 ‘주체의 사라짐’으로, 변증법적으로 구성된 개념적 절대 존재가 존재의 바깥으로,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한 예술가의 고유성·절대성이 예술가의 주변성(예술가의 세계로부터의, 또한 작품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어떻게 세계변혁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타자의 발견으로 귀결되는가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지난 50년간의 여러 프랑스 철학의 사조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일뿐더러, 다음 세대인 푸코·들뢰즈·데리다로부터 낭시·라쿠-라바르트·아감벤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위한 글쓰기
1907년에 태어나 2003년에 세상을 떠난 모리스 블랑쇼는 사르트르, 카뮈와 동세대인이다. 국가전체주의, 나치즘과 유태인학살, 탈식민주의, 공산주의 혁명과 실패라는 20세기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의 삶을 관통했고, 블랑쇼는 그에 대해 생애 전반에 걸쳐 성심을 다해 발언했다.
1925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는 평생의 철학적 동지,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만난다. 그들은 함께 철학과 독문학을 전공했고, 이후에도 현상학 전통 위에서 때로는 독립적으로, 때로는 공동의 기반 위에서 사유를 계속해 나갔다. 블랑쇼는 레비나스처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윤리를 내세우지 않았으나, ‘마지막 말’을 캐내는 끝없는 무위의 움직임과도 같은 글쓰기 속에서 ‘죽어감의 수동성’을 통한 타자에로의 열림을 보았다. 그리하여 600여 페이지가 넘는 자신의 저서 『무한한 대화』를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 대한 화답의 글로 바친다.
20대의 블랑쇼는 저널리스트가 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하고, 나치즘이 득세하던 어수선한 유럽에서 젊은 블랑쇼는 프랑스가 정신혁명을 통해 유럽을 이끄는 강한 국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반게르만주의, 반나치주의,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에 입각한 정치 기사를 써서 우익 잡지에 기고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상주의에 가까웠던 그의 정치적 입장은 프랑스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승인하면서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이후 그는 20년간 신문·잡지 기고를 중단한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블랑쇼는 죽음을 경험한다. 나치에게 체포되어 태어난 집의 담벼락에서 즉결처형을 당할 뻔한 것이다. 총살 직전, 레지스탕스의 급습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한평생 덤으로 살아가는 느낌,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전쟁 이후 그는 독일 강제수용소에 정치범으로 끌려갔던 로베르 앙텔므(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첫 남편), 국제사회주의 운동을 펼쳤던 디오니스 마스콜로 등과 가까워지면서 점차 좌파가 되어 간다. 이후 1950년대 드골의 재집권과 68혁명 시기를 통해 그는 ‘작가’(auteur)로서 정치적 발언을 재개하고 현실 참여를 계속해 간다.
그러나 그의 실천은 사르트르식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그는 현실에 밀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물러섬으로써 확보한 거리가 참여의 필요조건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적인 정치 투쟁보다는 글쓰기를 통한 우회적 참여를 택했다. 1940년대 중반 파리를 떠나 지중해 연안의 시골 마을에 정착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공개 강연이나 방송 출연 등(심지어 사진촬영조차)을 거부했다. 그의 글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사회적 명사(名士)가 된다거나 권위를 얻게 되는 현상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블랑쇼에게는 궁극적인 결론이 없다. 그 대신 블랑쇼는 독자에게 ‘무한한 대화’를 통한 소통을 제기한다. 거기에는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있다. 블랑쇼는 의도적·강압적으로 조직된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온 ‘공동의 영역’을 글쓰기와 읽기를 통한 소통의 가능성과 함께 탐색했다. 중심의 부재 또는 빈 중심으로 불리는 이 ‘밝힐 수 없는 공동체’는 20세기 이후 ‘공동체’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논의를 담고 있다. 블랑쇼를 읽는다는 것은, 그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모리스 블랑쇼’라는 (?배받고, 역사에 길이 남을) 한 개인의 이름을 지우고, 어떤 공동의 ‘우리’에 참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