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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5년 05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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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288쪽 | 378g | 128*188*20mm |
ISBN13 | 9788954636261 |
ISBN10 | 8954636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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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시
2024년 11월 01일 ~ 2024년 11월 30일
상시
18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필립 로스를 도대체 어째야할지 모르겠다.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작가에 필립 로스는 속하지 않는다. 나는 누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을 때 필립 로스를 답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가 쓴 소설을 여러권 읽었고 그중에는 진짜 기막히게 감탄이 나올만큼 좋은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어떤 불편함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휴먼 스테인]이라는 그 놀라운 작품에서 그가 젊은 여자 페미니스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난다. 그 글솜씨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 생각하면 진짜 속상하다. 후.. 그래서 어떤 미운 마음이 내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책 [네메시스]를 읽으면서는 정말이지 필립 로스를 미워할 수가 없다고 체념해야 했다. 이 소설은 정말 너무, 너무, 너무 좋다. 이 사람 뭐야 진짜, 뭔데 이렇게 글을 잘 쓰는거야.
소설의 배경은 아직 '폴리오'라는 전염병에 대해 백신이 발명되기 전이다. 폴리오의 공식 명칭은 'poliomyelitis'(회백척수염) 이고 우리가 소아마비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병에 걸리면 열이 나고 몸에 마비가 일어나며 오랜 시간이 걸려 회복이 되기도 하지만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버키 캔터'는 학교의 놀이터 선생님이다. 놀이터 선생님이라는 게 내가 대한민국에서 본 적이 없어 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노라니 체육교사와 방과후 교사를 합친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운동을 가르치고 편을 먹고 게임을 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더 나은 동작과 바른 자세를 가르치고 또 태도를 가르친다. 그는 키가 작고 시력이 아주 나쁘지만 그러나 강인한 신체를 가지고 있고 운동을 잘하며 정직하고 용기있는 사람이라 학생들 모두가 그를 따르고 좋아한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조부모의 손에 자랐지만 조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삶을 대하는 바른 자세를 교육 받아 무척 '바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폴리오라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이 동네를 잠식해갈 때에도 그는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지, 이런 상황에서 더 나은 태도는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안전에 대해 철저하게 신경쓴다.
이렇게나 용맹하고 정직한 청년인 캔터는 사실 참전하고 싶었다. 자신의 친구들이 그랫던것처럼 참전하고 싶었고 그게 누구보다 자기가 원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력이 너무 나빠 참전할 수 없었고, 친구들과 다른 젊은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데 자기는 여기에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수치심이 들게 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남성성을 키워왔고 누구보다 남자답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타인도 그렇게 보는데, 그런데 마을에서 보이는 참전하지 않은 몇 안되는 젊은 남성인거다. 자신 안의 그 수치심을 누르며 그는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 아이들을 폴리오로부터 지키는 것, 늘 그랬듯이 건강한 생활을 하게 하는 것. 그러나 폴리오는 여지없이 이 학교 놀이터에도 찾아왔고 그가 함께 운동하는 아이들 중에서도 폴리오 전염병 환자가 생기며 사망하는 아이들도 생긴다. 캔터는 절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아이들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캔터에게 여자친구인 '마샤'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여름 캠프에 와 일하라는 제안을 한다. 여기는 안전해, 여기에 오면 나랑 둘이 있을 수도 있고, 여기에는 폴리오가 찾아오지 않아. 캔터는 고민 끝에 그러겠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고, 거기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캪프를 즐기는 건강한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또 그들의 밝음을 느끼면서 바로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구나, 여기가 너무 좋다, 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는 틈틈이 그에게는 자신이 폴리오로 고통 받고 있는 아이들을 두고 왔다는 죄책감이 수시로 밀려든다. 그러다, 이 캠프,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같았던 이 캠프에도 폴리오 환자가 나타난다. 이 안전한 청정 지역에 어떻게 폴리오 환자가 생겼을까? 그건 나다, 폴리오 환자가 생겨났던 곳에 있었던 나, 내가 이곳에 폴리오를 가지고 왔다, 내가 그런 것이다, 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히고 그래서 그는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건강한 감염자라는 확진을 받는다. 그는 격리되고 그 후에도 48시간 동안 아무 증상이 없었지만, 이윽고 예의 증상들이 찾아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그가 자부하던, 다른 사람들 모두가 우러러보던 그의 건강한 신체는 힘없이 축 쳐지고 만다. 그는 재활훈련을 멈추지 않지만 끝내 그전의 몸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런 그의 곁을 언제나 그의 할머니가 지킨다.
마샤. 그의 여자친구 마샤는 그를 찾아와 우리가 원래 하려고 했던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캔터는 그녀를 놓아주겠다고 한다. 아니, 너를 불구자의 아내가 되게 하지 않겠다. 좋은 집에서 밝게 자란 너에게 그런 고통을 줄 수 없다, 너는 나와 헤어져야 한다, 고 그는 말한다. 마샤는 그것이야말로 이기적인 거라고, 왜 나의 진심을 몰라주냐,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고 항변하지만 캔터는 자신이 그녀를 위하는 길은 그녀를 떠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녀를 밀어낸다. 그처럼 꼿꼿한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그의 삶은 결국 혼자 지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서는 나 역시 캔터의 선택이 옳았다고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내가 만약 캔터의 입장이었다면을 생각했을 때 같은 결정을 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샤의 반박을 읽노라니, 내 선택이 과연 상대를 위한 것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네가 폴리오에 걸렸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도 되는 권리가 생긴 건 아니야. 너는 하느님이 뭐하는 분인지 알지도 못해! 누구도 모르고 알 수도 없어! 너는 우둔하게 굴고 있지만-사실 너는 우둔하지 않아. 너는 아주 무지한 소리를 하고 있지만-사실 너는 무지하지 않아. 너는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지만-사실 너는 미치지 않았어. 너는 한번도 미친 적이 없어. 너는 완벽하게 제정신이야. 제정신이고 건전하고 강하고 똑똑해. 하지만 이걸 봐! 너는 지금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걷어 차고, 내 가족을 걷어차고 있어. 나는 그런 제정신이 아닌 짓을 거들지 않겠어!" -p.261
나는 일전에 내가 알츠하이머 초기가 아닐까 의심했던 적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병원을 찾아가면서 혼자 생각했었다. 그때 연애중인 애인, 그는 내가 살면서 가장 좋아한 가족 아닌 남자사람이었는데, 만약 내가 알츠하이머 초기라고 병원에서 말한다면, 그에게 헤어지자고 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던 거다. 나의 육체적 고통으로 그 역시 고통스럽게 만들면 안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병원에 가 상담을 받은 나는 닥터로부터 '너는 알츠하이머와 가장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안심해 병원을 나오면서 애인에게 전화했다. 이러이러했는데 아니래~ 라고. 또 머릿속에서 소설 썼다고 지청구를 들었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고, 그래서 캔터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것이 분명한데, 그런데 내가 하는 결정이 오히려 나를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을 걷어차게 되는 것이었을까. 상대를 위한다는 게 상대를 위한 게 아닌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다.
내 확신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것, 그게 이 책이 한 일이었다.
그의 남성성에 대한 이상, 그렇게 남성으로 자라온 자부심, 그의 조부모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에게 이제 롤모델이 되어주는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주는 안정감까지. 그가 얼마나 한 남성으로서 잘 자라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되었는지를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그의 강한 신념과 자신이 더 강하지 못했다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죄책감은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더 강하게 찾아든다. 이 세상 모든 고통이 그의 책임이 아닐것인데, 그는 자신이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인 것으로 생각한다. 도대체 신은 뭐하길래 아이들을 고통에 빠져 죽게 하는건지도 모르겠다고 신을 원망하다가, 내가 아이들에게 폴리오를 옮겨 죽게했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괴로워한다. 캔터의 이 내면이 너무나 잘 드러나서 그의 기쁨도 그리고 그의 꼿꼿함과 죄책감도 생생하다. 캔터라는 인물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여기 살아숨쉬는 바로 하나의 인간인 것이다. 그가 그의 신념을 지켜나가기 위해 그리고 더 나은게 무언지 끊임없이 찾기 위해 어른을 찾아가 우리가 이 전염병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묻고 또 그 대답을 얻는 대화를 읽는 것도 나는 좋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가 더 절실하게 느껴진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를 묻고, 위험을 과장하지 말고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들은 대화한다.
이 소설은 지독히 남성적이다. 지독히 남성적이지만 읽는 맛이 대단하다.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가끔 좋은 소설을 만났을 때 읽으면서 으앗 좋다, 하고 흥분하게 될텐데, 이 책의 60페이지 남짓에서부터 나는 흥분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면서 모든 문장들이 다 너무 좋았다. 캔터라는 한 사람에 대해 읽는 것이 좋았고 그 사람이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읽는 게 좋았다. 게다가 중간부터 갑자기 말하는 화자가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뭐라고? 그 줄만 세번을 읽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게 맞아, 그럼 뭐가 된거지? 하고 놀라워했는데, 이 책 끝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구절을 본다.
'게다가 이야기의 전달자를 나중에야 밝히는 경우도 있어, 작가에게 듣는 이야기인 줄 알고 읽어나가던 독자가 중간에 당황하여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옮긴이의 말, p.285
진짜 내가 딱 그랬다.
이 소설 너무 좋다. 지독하게 남성적이라고 툴툴 대면서도 이 소설이 너무 좋았다. 특히나 이 책의 마지막, 그의 가장 건강했던 육체적 아름다움을 읽노라면 아아, 눈앞에 생명이 살아 숨쉰다. 팔딱거린다. 그렇기에 캔터의 지금 입장이 더 혹독하게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조조 모에스'의 [미 비포 유] 생각도 났다. 가장 강한 것, 가장 자랑스러운 것, 가장 나를 살게하는 것을 잃었을 때,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 너무 좋다 진짜 좋다 이래서 소설을 읽는 거야 계속 생각했다. 얼마전에 윌리엄 트레버 읽으면서 베셀이 줬던 불만을 싹 다 씻어주었던 것처럼, 이 책이 못난 소설 읽고 짜증났던 마음 다 씻어준다. 아, 그래, 소설은 이래야지, 이래야 하는거야. 진짜 짜릿하게 읽었다. 역시 나는 소설이 좋다. 좋은 소설이 진짜 너무 좋다.
"나는 정신이 멍했어. 크나큰 행복 때문에 정신이 멍했던 거야. 너무 정신이 멍해서 수화기에 대고 소곤거렸어. '네가 정말 이렇게나 멋진 거야?' 그런 여자가 존재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였어. 게다가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었지. 내 말 이해하겠어? 마샤의 그런 사랑이 있는데 누가 나를 막을 수 있겠어?"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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