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6/19 조창완(chogaci@hitel.net)
참 우습다. 우리 독서문화와 언론계의 수준이 이것 밖에 되지 않았다. 그저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랑 비슷한 소설을 이렇게 대우해야하는 우리 문화계의 협소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내 판단의 근거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일식'의 붐이다.
난 언론에서 열이 올라 칭찬하는 이 소설을 애써 무시했다. 출판이라면 기를 쓰고, 달라드는 내가 이 소설을 무시한 것은 나보다 어린 친구가 쓴 소설이 히트한다는 것에 대한 카인컴플렉스와 내가 요즘 일본 소설을 너무 읽었다는 자기통제기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차여차해서 이 소설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 친구에게 내가 준 소설은 이미 독서일기를 쓴 현기영씨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였고, 난 이 소설을 받아서 읽었다.
정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현기영씨의 그 좋은 소설은 무시되는(2판이나 찍었나) 상황에서 이런 소설이 장안의 지가를 좌우할 만큼 팔려나갔다는 것이 우습기 그지 없다. 우선 소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를 짚고 넘어간다.
우선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현실에 관한 내 소감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김진명이나 양귀자의 소설이 히트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리고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드래곤라자'나 '용의 신전'같은 소설이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당연히 이해가 간다. 나도 좋아하는 장르를 찾아 읽으니까. 하지만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 애매한 소설이 히트라는 우리 독자들의 취향은 무엇인가. 일본문화가 들어오고, 그것에 민감하지 못하면 뒤떨어진다는 강박관념이 빚어낸 현실은 아닌지. 사실 이 소설은 우리 독자의 취향에도 맞지 않고, 그리 흥미롭지도 않다. 더군다나 흥미를 자극하는 앞부분에 있어서는 조잡하기에 그지없는데도 말이다.
이 부분에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언론이다. 언론사들은 이 책의 출간 소식을 거의 대서특필했다. 저널리즘의 성격에 맞추어 보자면 신세대 젊은 작가가 의고체로 중세문화를 다뤘다는 특성, 일본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을 탔다는 점, 일본 문예지 사상 처음으로 데뷔작가의 소설을 전제했다는 점, 거기에 작가가 23살의 명문 교토대학에 다니는 재원이라는 점은 충분한 저널리즘적인 가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문학한다는 기자들로서도 애매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이미 2번이나 배출할 만큼 세계 문학계에서 인정받는 일본에서 그 정도의 상을 받았는데, 뭔가 있지 않을까. 졸라 떨떠름했지만 그래도 뭔가 있을 것 같아, 졸라 보도자료를 베껴 기사를 썼다. 그 근거는 내가 이 책에 관련기사를 뒤져 봤을 때, 자기 특색이 있는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판단한 것이다.
다행히 얼마전 이남호 선생이 한 신문에 뭔가 의심스럽다는 글을 썼다. 그나마도 조심스럽게 말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들어온 이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정말로 한심하기 그지 없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럼 그리 잘나지도 않는 내가 이 소설의 가치를 폄하하는 이유가 뭔가를 여유가 있는 이들은 찬찬히 들어보기 바란다.
우선 소설의 가장 주된 기둥은 서사구조다. 이 책의 가장 주된 줄거리를 살펴보자. 연금술사 피에르 위페는 플라톤이 꿈꾸던 자웅동체의 이상적인 안드로큐노스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안드로큐노스를 마녀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신실한 성직자 자크에게 걸려 처형된다. 그리고 그 처형의 순간에 일식이 일어난다. 소설은 기독교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던 중세에 유일하게 신과 인간의 경계가 혼돈스러웠던 1482년 시점을 배경으로해서 이 안드로큐노스라는 인물을 상정했다.
이게 어떻다는 것인가. 마녀사냥을 그리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사상의 부정성을 그리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피에를 위페를 중심으로 한 학문의 자유를 그리겠다는 것인가. 물론 이 모든 것을 그렸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저급하게 쓰여진 판타지 소설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마녀사냥의 계기가 되는 간헐열병이 퍼지는 과정등 작품이 가지고 있어야할 구성적인 치밀함은 거의 없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 들 역시 각자가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수 없이 분산되어 있는 엉성한 수준이다. 특히 소설의 중심이어야할 피에르와 안드로노큐스의 관계 또한 애매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인 일식이 생기는 과정과 전체 이야기의 연결 또한 그저 상징적인 애매함을 가져다 붙이기 위해 만들어낸 기제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일식과 기독교의 맹목적인 신관의 관계를 연결할 수 있지만 그게 무에 그리 크단 말인가.
이 소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 중에 하나는 의고체라는 문체다. 난 의고체라는 문체의 정확한 특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역자나 해설등으로 유추하건데, 의고체라는 문체는 긍정적으로 볼 때,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에 근거해서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게 가장 적절한 단어는 하나 밖에 없다는 사고 아래 죽어라고 그 단어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독자들을 무시하고 죽어라고 어려운 단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도대체 뭔가. 당연히 쉽고, 적절하게 풀어서 쓸 수 있는데, 정말 죽어라고 어려운 단어를 찾아서 쓴다. 역자도 밝히지만 사전을 찾아가며 소설을 읽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한다. 도대체 사전을 찾아가면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그럼 보자 그가 얼마나 뛰어난 지식과 고도의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소설의 첫머리는 정말 독자들이 혼돈할 만큼 어려운 개념들이 많이 나온다. 중세의 학파가 어떻고, 마니교가 어떻고 저쩌고. 하지만 이것은 한 장을 넘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는 소설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작가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장부터는 이야기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데, 죽어라 어려운 단어를(의고체라 포장된) 찾아서 쓴다. 이거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이것은 이 젊은 작가의 지식체계가 그에게 비유되어지는 에코에 전혀 미치지 못함을 가르킨다. 게이치로의 지식체계 역시 문학을 좋아하데, 중세나 신화에 관심이 많은 문학청년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로 언론이나 출판사 특유의 상혼으로 무장된 마케팅 전략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무협지나 판타지소설이 팔리는 것을 굳이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무협지나 판타지소설이 최고의 문학작품인 것처럼 위장되어 팔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소설은 내가 보기에 치기어린 문학소년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들도 내가 이렇게 무식하구나 자학하면서 어려운 단어를 찾아가며, 이 소설을 읽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시종일관 난 이 책에 대한 비판을 일삼았다. 긍정적인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작은 긍정을 인정하기 위해 큰 부정성을 간과하는 것 처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중세 기독교의 절대적인 가치관으로 인해 빚어진 폐단 역시 이런 특성 때문에 벌어졌던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교관련 논쟁 역시 궁극적으로 보면 이전에 무시했던 '텍스트'들의 부정성에 관한 유효한 논쟁이 없었던 탓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말한다. 난 이 소설을 읽으며, 한없이 짜증이 났다. 고작 이 정도의 소설이 언론과 독자들에게 대우받고, 내가 보기에 좀더 넓게 읽혀야 할 글들이 무시되는 이 독서계의 풍토가 우스울 뿐이다.
99/5/15 이상구(flypaper@yes24.com)
'배경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의 중세, 니콜라라고 불리우는 수도사가 나래이터로 등장해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젊었을 적 한때의 기억을 회고한다. 토마스주의자인 이 견실한 수도사가 이교도의 이단을 상대하기 위한 논리로서 연금술의 원리를 쫓게 되고, 그러다 시골의 한 마을에서 피에르라는 연금술사를 만나 영혼과 육체의 합일이라는 체험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
얼핏 줄거리를 스쳐 보기만 해도 어렵지 않게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할 수 있는 - 실제로 이 책에는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도사와 맞섰던 이단 심판관 '베르나르 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 이 작품은 99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75년생 일본 법과 대학생의 처녀작이다. 무척 신나고 스릴넘칠 것 같은 이 작품을 읽은 후의 느낌은......휴! 정말 어렵사리 무협지를 한권 읽은 느낌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지금까지 무협지를 읽어 본 적이 없는 난 그저 '무협지를 읽으면 이런 느낌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게 있다. 전혀 접해 본 적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으면서 왠지 그냥 꺼려지는게 있다. 뭐, 정 어쩔 수 없다면 다가 서 보기는 하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싶은게 있다. '감수성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싫고, 좋고, 그런데 일일이 이유를 붙이다간 정작 자기가 싫어하는 거 싫어할 시간도, 좋아하는 거 좋아할 시간도 없다'는 둥의 궁색한 이유나, 자기변호도 필요치 않다. 그냥 거리감을 유지하고픈...그런게 있다. 내 안에 있는 그런, 괜한 심술 중의 하나가 바로 무협지이다.
그렇게 낯설기만 한 무협지라는 쟝르를 머리 속에 띄운 채 진행된 독서인진 몰라도, 솔직히 그 모든게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라는 이 말에는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라는 뜻과, 이 작품에 쏟아진 일본문단의 전례없는 찬사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는 뜻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내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라는 추측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쉽게 잘 읽히는 책도 아니다. 요컨대 적당히 난해한 이유로 쉽게 잘 읽히지 않는 책인 셈인데, 그런 이유로 난 어느때와는 달리 눈을 부릅뜨고(?) 책을 읽어 나갔다. 하지만 몰입할 수는 없었다. 장대한 스케일이니, 심오한 사고이니 하는 사내적 스타일과는 좀 동 떨어져 있는 나였기에..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본 언론의 저널리스틱한 찬미 속에 담겨 있던 '긴장감과 스릴이 스토리를 전개하는 장중한 힘' 같은 것도 난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을까?에 대한 실마리는 역설적이게도 그 호들갑의 원인을 제공했던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에서 드러났다. 일본의 중견 소설가인 미야모토 테루는 이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심사평을 붙였다.
'이 소설은 기성품의 범주로부터 튀어 나와 손발을 쭉 뻗고 있다. 요즘의 신경증적인 폐쇄된 작은 소설들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
또 다른 심사위원은 이렇게도 말했다.
'요즘 소설들이 보여주는 분위기일 뿐인 비현실감이나 자폐나 파괴충동, 그리고 종말의식 같은 단조로움에 나는 싫증이 난다. 그에 비해 소설의 정통에 서고자 하는......'
10여명에 이르는 심사위원들의 대부분이 언급한 이 작품의 수상 선정 이유는 장대한 스케일, 주제의 심오함, 의고체 문장의 장중함 등이다. 말하자면, 일본은 왜소함, 나른함, 선병증적인 나약함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소설이 일련의 군을 형성했던 일본 문학계에서 <일식>과 같은 작품은 극히 이례적인 것, 이단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해야 하는 일본은 25살의 이 야심찬 신인작가에게 문단의 미래를 맡긴 것이다. 일본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대한민국에선 아니다. 여기와 일본은 문단의 흐름이 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보다 훨씬 재밌고, 짜임새 있는 소설이 한국에서도 몇 있었다. 소재면에서 찾아보면, 송대방의 <헤르메스의 기둥>이나 구효서의 <비밀의 문>같은 작품들이 있었고, 지적 박식함이나, 사유의 깊이, 문체 등으로 치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나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같은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호들갑은 없었다. 점잖은 나라여서인지, 아님 아사이 신문의 일면은 항상 책광고가 차지한다는 일본에 비해 문학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져서인지는 몰라도 요란스런 호들갑은 없었다.
분명 여기에는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숨겨진 이면이 있다. 국민성 같은거 뭐..그런 거겠지...하는 느낌이 들지만, 뭐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그런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일본에 있어서의 현대문학의 지향점은 '미시마 유키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간쯤이어야 한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재미있는 카멘트가 생각난다. 미시마 유키오에게서 문학을 배웠다는 이 야심찬 작가는 유키오와 하루키의 그 어느 지점에도 서 있지 않다. 어쨌든 아직까진 그만의 독자적인 영역에 서 있다. 그러나 난 그 영역에 쉽게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 왠지 앞으로도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여러가지 이유로 좀 허전한 느낌을 안겨 준 책. 보고 싶은 사람은 동네 책방에서 빌려 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