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논점들
애피아는 우리가 다른 문화나 사회를 바라볼 때 사용하는 사고의 틀과 도덕적 기준이 실제는 얼마나 많은 오류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철학적 논증들을 통해 밝히고 있다.
① 도덕적 진리란 ‘조각난 거울’과도 같다
서로 다른 사회,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만나게 될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경험하게 된다. 특정 종교의 관행에 대해 타 종교인들이 가지는 입장이라든가,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성 할례에 대한 입장 등에서 사람들은 심각한 ‘불일치’를 느낄 수 있다. 이는 동일 사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같이, 낙태나 동성애에 관해 구성원들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특히 도덕과 관련된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애피아는 나의 관점에서 나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남의 관점에서 남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도덕과 관련해서는 단 하나의 ‘진리’라는 게 없을 것이다. 애피아는 진리를 ‘조각난 거울’에 비유한다.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을 각각 반영하고 있는 거울 조각들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전체 진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조각난 거울도 단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거울이 있을 수 있으며 도덕적 진리 역시 이와 같다. 우리는 기껏해야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만 ‘동의’할 수 있을 뿐이다.
② 상대주의가 위험한 까닭
그렇다면 문화란 상대적인 것이라거나,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입장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인 태도는 어떤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위해 다른 사회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상대주의는 타인을 배려한 것이므로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애피아는 상대주의, 특히 윤리나 도덕과 관련한 상대주의가 사람들 간의 소통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인간의 기본 가치,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한번 보자. 예를 들어, ‘친절’을 보편적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친절을 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역시 친절을 원하기를 바란다. 즉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기를 바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권하고 장려하기를 바란다. 도덕적 가치는 개인에게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즉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친절함이나 잔인함과 같은 개념은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함축돼 있다. ‘친절하다’, ‘잔인하다’, ‘인간적이다’와 같은 가치 평가적 언어들 역시 우리 자신에게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상대방에게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가치 언어를 사용하며 대화하고 토론할 경우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정서를 확인하게 되고 공통된 이해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결국 공동의 가치 언어를 강화한다면 우리는 서로 동의하지 않던 것에도 더욱 쉽게 동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상대주의에서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요원하다. 윤리와 도덕에 관한 상대주의가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내가 있는 곳에선 내가 옳고, 네가 있는 곳에선 네가 옳다”라고밖에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상대주의를 권고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관용’을 일깨울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오히려 우리의 소통에 한계선을 그어버릴 수가 있다. 상대주의에 대한 애피아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옳은지 서로에게서 배울 수 없다면, 우리 사이의 대화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런 상대주의는 대화를 장려하기는커녕 단지 우리를 침묵하게 할 뿐이다.”
③ 실증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주의는 이방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다른 문화에 열광하는 문화인류학자들도 자주 동의하는 방법론이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우리가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 대부분이 단순히 우리의 지역적 관습이나 선호도가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애피아는 이러한 상대주의는 헤로도토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오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나 가치에 관한 담론은 ‘과학적 확실성’의 잣대를 들이대 볼 경우 ‘개념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실증주의적 세계관으로 고착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애피아는 현대의 상대주의가 사실(facts)과 가치(values)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과학적 세계관인 ‘실증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 20세기에 논리실증주의가 절정을 이루게 되면서 크게 유행하게 된 실증주의는 ‘관찰 가능한 사실이 곧바로 진리’라며 ‘사실’을 과대평가하는 반면에, ‘가치’는 과학적·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평가절하하고 배제해 버린다. 실증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가치들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립시켜 주는 합리적 토대는 전혀 없다. 즉 우리가 어떠한 도덕적 가치를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합리적 논증도 없다는 관점이다. 결국 실증주의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 다른 문화의 가치 선택을 존중하는 ‘관용’이란 것은 자기모순이 돼버린다. 관용 역시 또 다른 가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애피아는 이런 실증주의적 세계상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고,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사회 사이에 대화의 단절을 가져와 우리의 비교문화적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④ 과학적으로 우월하다 해서 우리의 가치가 다른 사회의 가치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방인, 혹은 다른 사회, 다른 문화를 평가할 때 과학적 발전상을 하나의 잣대로 삼을 때가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세계종교로서 공인된 종교를 믿는 사회가 전통적인 미신이나 신령을 믿는 사회보다 합리적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주술에 대한 믿음은 비합리적인가? 애피아는 그렇게 말할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합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과 이전부터 알고 있는 관념에 의존한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믿음의 합리성을 검증하려면 언제나 또 다른 믿음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뜻이며, ‘모든’ 믿음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한다. 우리는 가족과 사회의 소속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혼자서는 개발해 내지 못했을 수많은 믿음이 이미 갖춰진 상태에서 출발한다. 주술을 믿는 사람들도 기존의 사회와 조상에게서 주술에 대한 믿음을 물려받은 것이며, 우리도 그들의 믿음과 함께 자라고 경험을 공유했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믿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술에 대한 믿음이 비합리적이라고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주술과 같은 것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서구의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적 설명이란 것도 과학자들이 이미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따른 것이다. 애피아는 이를 논하기 위해 ‘뒤앙의 테제’를 예로 든다.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뒤앙(Pierre Duhem, 1861~1916)은 어떤 이론을 설명하는 자료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자료를 똑같이 잘 설명해 주는 다른 이론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의 사실에 수많은 이론과 가설이 대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과학적 탐구가 아무리 많이 이루어져도 사물의 본질을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음을 뜻한다. 실증주의는 ‘가치’보다 ‘사실’이 낫다고 전제하지만, 뒤앙의 테제에서와 같이 ‘사실’ 또한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탄탄하지 않은 것이다. 과학은 더 합리적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 아니라, ‘사실’을 파악하고 현실에 개입하는 데 있어 더 나은 도구가 돼준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 과학이 ‘사실’ 파악에 있어 진보를 가져다 준 것은 맞다. 그러나 ‘가치’에 대한 이해는 증진시키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과학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가치가 다른 사회의 가치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이유다.
⑤ 도덕적 가치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은 가치 평가적 언어에도 원인이 있다
‘서로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에서 ‘가치 문제에 관한 불일치’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도덕적 충돌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원인은 무엇일까? 애피아는 우선, 우리가 가치를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가 매우 다의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의 정치 이론가 마이클 월처(Michael Walzer, 1935~)의 ‘두꺼움’과 ‘얇음’의 개념을 빌려 왔다. 월처는 ‘특수’와 ‘보편’을 설명하면서 그 메타포로서 ‘두꺼움’과 ‘얇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즉 모든 사회는 각각의 특수함을 지닌 ‘두꺼운’ 사회이며, 이런 여러 사회의 특수함(두꺼움)의 일부가 겹쳐 공통의 보편성(얇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애피아는 가치 평가적 언어 중에서도 ‘좋다’라거나 ‘옳다’ 등의 단어들은 ‘얇은’ 용어로서 상당히 무제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무례하다’와 같은 단어는 특정 사회적 맥락과 복잡한 현실에 얽혀 있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사용돼야 하는 제약이 따르는 ‘두꺼운’ 용어다. 애피아는 우리가 타인이나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두꺼운 개념들 속에 잠재해 있을 ‘얇은’ 개념들을 추상해 낸다고 말한다. 또 두 집단 간의 토론에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는 전혀 없는 어떤 개념을 끌어들이면, 두 집단 간에는 가장 근본적인 불일치가 발생하며, 이런 불일치는 논쟁을 통해 합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애피아에 따르면, 가치 평가적 언어들에 대해 불일치가 생기고 논쟁이 많은 것은 가치 용어들의 ‘열린 구조’ 때문이다. ‘용기’라든지 ‘잔인’과 같은 가치 용어들은 일상적이고 익숙한 경우에서는 잘 맞더라도, 어떤 특정한 측면이나 상황에서는 그 용어의 적용 범위를 두고 사람들 간에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 평가적인 언어의 목적은 우리들의 행위뿐 아니라 사고와 감정까지도 이끌어내는 데 있다. 그래서 ‘도덕’과 관련한 어휘들을 공유하고 있는 동일 사회 내의 구성원들이라도, 그 어휘들이 ‘본질적으로 논쟁적’이고 ‘열린 구조’이기 때문에 서로 싸울 일이 많아지게 된다.
⑥ 우리가 정치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데는 ‘관행’의 역할이 크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가치에 관해 대화하자면 결국에는 불일치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애피아는 이런 결론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 행위를 하는 것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가 동료 시민들과 정치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애피아는 바로 ‘관행’에 있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서로 공유하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함께 사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익숙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이웃들 역시 대체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그런 안정된 삶의 형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지, 동료 시민들이 자신에게 반드시 동의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즉 우리는 함께 사는 것을 유익하게 해주는 공존의 가치에 대해 서로 합의하지 않고서도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관행이 정당한지 서로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그 관행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역적인 합의에 있어서도 이렇다면, 서로 다른 사회 간의 대화에서는 어떨까?
지역적 합의의 문제를 보건대, 우리와 이방인의 대화에서도 가치들에 대해 서로가 이성적인 합의에 도달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합의, 즉 ‘정당성’을 논하면서 불일치가 있을 수는 있어도, 관행 자체에 대해서는 이해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애피아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많은 것들을 옳다고 생각하는 데는 바로 그것들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여성 할례나 한때 풍미했던 중국의 전족 풍습 등은 그것이 사람들이 평소에 하는 ‘익숙한’ 관습이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변화하려면, 그 관행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는 이성적인 논증이나 가치에 대한 긴 토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점진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지위는 100년 전과 지금이 판이하게 다르다. 애피아는 만약 낡은 성차별주의적 관행의 정당성이 문제였다면, 여성운동은 2~3주 만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여성운동이 바로 우리의 습관을 변화시켜 우리가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고, 그 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행과 관습의 성립이나 폐지는 이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애피아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가 평화롭게 모여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논증이나 원리가 아니라 ‘관행’이라고. 결국 애피아가 말하는 대화의 취지는 어떤 것에 대한 합의, 특히 가치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다. 따라서 애피아는 우리가 가치에 대해 서로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로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⑦ 문화적 순수보다는 ‘혼성’이 낫다
세계화가 각 지역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모든 것을 동질화해 버린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이제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지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의 고유한 문화가 사라진다는 명분으로 그 젊은이들에게 농촌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에 필요한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 애피아는 본래의 문화적 관행과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해서, 사람들이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지역적 정체성’ 속에 그들을 가두고 다양성을 ‘강제’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 오늘날 문화의 보호를 말하고, 본래의 생활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본래’의 문화, 본래의 생활 방식이란 것이 과연 본래의 것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전통이라 여기는 것도 한때는 혁신이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란 지속과 변화를 동시에 거치면서 형성되고, 한 사회의 정체성도 이런 변화를 통해 존속한다. 애피아는 본래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며 ‘문화적 순수성’이라는 ‘이상’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볼 때면 오히려 반대로 ‘혼성(contamination)’이라는 개념에 더욱 끌린다고 고백한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해 동질적인 문화와 가치 체계를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음을 지적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거대 제국, 몽골 제국, 무굴 제국, 아프리카에 정착한 반투족, 기독교와 불교의 전파 등등, 역사적으로 대규모의 ‘혼성’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오늘날 문화의 과정이었거나 기원이 되었다.
애피아는 ‘문화적 순수’라는 말이 모순어법이라고 말한다. 월드컵 축구나 힙합, 리바이스 청바지 등, 문화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세계시민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곳에서 들어오고 많은 것들의 영향을 받는 문학이나 예술, 영화 등이 그런 세계시민주의적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즉 애피아는 ‘차이’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조화시킬 수 있는 세계시민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⑧ 문화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 예술은 공유되어야 한다
세계시민주의에 입각한 애피아는 문화유산의 소유자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문화유산’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대상은 상당수가 현대 국가 체제가 성립하기 이전에, 즉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애피아에 따르면, 그들의 피를 생물학적으로 이어받은 후손들이 살고 있더라도, 현대 국가의 국민들이 유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 명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서아프리카 초기 철기 시대 문화인 노크 문명의 조각품들이 나이지리아에서 발견되었을 경우, 지금의 나이지리아 국민들이 (설령 노크족의 직계 후손이 나이지리아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각품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다만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발견되었고 누구도 현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경우이므로, 나이지리아 정부가 소유권을 결정하거나 그 유물을 보존한 특별한 책임을 갖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애피아는 문화유산을 ‘민족’의 관점이 아닌 ‘인류 모두’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나이지리아 정부가 노크 문명의 조각품을 관리하는 것은 ‘인류의 수탁자’로서의 직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며, 노크의 조각품들이 나이지리아 국민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애피아의 이런 세계시민주의적 관점은 오늘날 첨예하게 대두된 문제인 ‘지적 재산권’에 대한 얘기로까지 이어진다. 애피아는 현시대 문화의 특징이 불가피하게 잡종이고 혼성인데, 지적 재산권을 새롭게 보호하려는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이 오히려 보호되어야 할 관습들 자체를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법적인 규제는 법인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철저하게 집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애피아는 그러한 법인 이해관계가 아닌 ‘인류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⑨ 관용 없는 보편주의는 위험하다 - 반세계시민주의자들
‘국가를 초월해 인간의 존엄성을 믿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세계주의적인 집단들이 있다. 프랑스 학자 올리비에 루아(Olivier Roy, 1949~)가 “신근본주의자”라고 부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다(이들을 ‘지하드’를 외치는 “급진적 신근본주의자”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애피아는 이 신근본주의자들이 전통적 종교 권위를 거부하고 『쿠란』과 전통 신앙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신근본주의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보편적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으며 “종교의 개인화”를 지향하고 있다. 또 폭력적이든 그렇지 않든, 신근본주의자들은 어쨌든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애피아는 이들의 보편주의, 정확히 말해 ‘관용 없는 보편주의’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유럽의 종교전쟁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적 진리에 관해 ‘하나’의 해석만을 주장하는 보편주의는 살인으로 쉽게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의 많은 기독교도들은 비기독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십계명을 모든 법원과 낙태와 동성애에 적용하고 진화론을 배제한 생물학 교과서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정부와 사회를 더욱 기독교화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애피아는 더 나아가 애틀랜타 올림픽 기간에 일어난 공원 파이프 폭탄 사건(1996)이나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 폭파 사건(1995)과 같은 기독교 테러리스트들의 사례도 예시하고 있다. 애피아는 신근본주의자들과 같이 세계시민주의적인 구상에 역행하는 이들을 ‘반세계시민주의자’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보편주의는 세계시민주의와 어떻게 다를까?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방식이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오직 사소한 부분에서만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는 ‘다원주의’를 포함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많은 가치들이 있지만 그 가치들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고 보기에,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가 다양한 가치들을 구현하기를 기대한다. 또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하고 잠정적이므로 새로운 증명을 통해 개정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오류가능주의’다.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편에 서기를 원하지만, 세계시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이 말하는 보편주의는 획일성인 것이다.
⑩ 우리에겐 이방인에 대한 의무가 있다
세계시민주의자들이 고수하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과 친척처럼 혈연으로 맺어진 이들과의 유대나 시민적 유대를 넘어서는 ‘타인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증을 하기 위해 애피아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품위를 가지고 살기 위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기본적인 욕구들, 즉 건강이나 음식, 집, 교육 등이 있다. 또 아이를 갖거나 거주지를 이동하거나 생각을 표현하거나 하는 선택권들도 마땅히 가져야 하며, 반대로 불필요한 고통이나 신체 훼손 등을 강제당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애피아는 묻는다. 우리가 이런 기본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를 위해 어떤 것을 기본적인 의무로 감수해 왔는가?
애피아는 이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할 때는 몇몇 제약 사항들이 따르게 된다고 말한다. 첫째, 이런 권리를 보장해 주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은 ‘민족국가(nation-state)’에 있다(이런 점에서 애피아는 ‘세계정부’를 외치는 ‘정치적’인 세계시민주의자들과 다르다). 둘째, 우리의 의무는 전체의 짐을 홀로 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몫을 공평하게 져야 하지만, 자신의 몫 이상을 지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여기서 애피아는 “우리는 재산을 거의 모두, 가능한 한 즉시 유니세프나 옥스팜과 같은 자선 단체에 보내야 한다”는 철학자 피터 엉거의 논리를 반박한다). 셋째, 우리의 기본 의무가 무엇이든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가족, 친구, 민족에 대한 우리의 1차적인 편애와 조화되어야 한다.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기본 의무가 무엇이든, 우리 가족,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을 넘어설 만큼 충분할 리 없기 때문이다.
⑪ 감정보다는 이성의 실천이 요구된다
애피아는 이 세상에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세계적인 빈곤’이 존재하는 이때, 애피아는 ‘돈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발경제학자들은 1950~1995년에 엄청난 규모의 대외 원조가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돈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 경우라고 본다. 세계에서 대외 원조 예산을 가장 많이 책정하지만 GDP 비율로 보자면 부유한 원조 국가 중 가장 밑바닥 수준인 미국은 지난 2004년 지진해일 피해를 입은 나라들에 구호 기금으로 내놓았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인 약 18억 달러를 관세로 매겼다. 단순히 감정이 폭발해 도와주는 지원이 아닌, ‘이성을 실천하는’ 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굶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전반적으로 풍족하게 만들어서 그 아이들을 도와야지, 비과세 곡물을 원조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그 지역 농부를 도산시키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구한다면, 이는 좋은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더 큰 해악을 낳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했을 때, 그 돈이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한두 번 정도 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애피아는 우리가 내 나라 또는 내 지역의 일자리를 보호해 준다는 이유로 지지했던 정책들 때문에 그 아이들이 죽어간 것일 수도 있음을 인식하라고 요구한다.
애피아는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터무니없는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며, 우리더러 삶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방인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방인들이 겪는 고통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자리 잡은 이성, 원칙, 양심”(애덤 스미스) 들에 우리가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