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 동아시아 해역의 약탈자, 왜구
한일 관계의 도입 단계로 그 단서가 되는 왜구를 다루었다. 한반도에 대한 왜구의 약탈은 1350년부터 시작되며, 이후 고려 말까지 해안 지방은 물론 내륙 깊숙이 약탈이 자행된다. 우선 왜구의 약탈 모습을 현재 도쿄대학교에 소장된 『왜구도권』을 통해 그려보았다. 이어 이들 왜구가 한반도에 출몰하여 무엇을 어떻게 약탈했는가를 『고려사』의 사료를 중심으로 기술했다. 그렇다면 고려에서는 왜구들의 약탈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우선 외교적인 방법을 써서 7차례나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남북조시대의 혼란기여서 그다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결국 고려는 군사적 방법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의 무인세력이 성장하여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된다. 이 책에서는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소개했고, 현장감 있는 사료와 사진을 덧붙였다. 또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후소샤판 『역사 교과서』가 왜구들에 대해 어떻게 왜곡했는지 소개했다.
제2장 : 공존의 시대, 조선통신사와 일본국왕사
1392년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왜구의 약탈은 계속되었다. 일본도 같은 시기에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면서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과 일본은 왜구 문제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틀 안에서 해결하고자 했고, 양국이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책봉 체제에 편입된다. 이어 조선통신사와 일본국왕사가 왕래하면서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 교린 관계를 성립시키면서 공존의 시대를 열어간다.
이 과정에서 조선통신사는 믿음으로 통하는 통신(通信)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교린 관계를 이중 구조로 만들어 제도적 정비를 해 나간다. 하나는 조선국왕과 일본국왕(장군) 사이의 대등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장군 이외의 모든 세력을 각종 통교 규정에 의해 조정해 가는 기미 관계였다. 각종 통교 규정이 성립되면서, 왜인들이 약탈자에서 통교자로 바뀌고, 조선의 삼포에 와서 무역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조선과 일본의 교린 관계의 밑바탕에는 믿음[信]이 전제되어야 했다.
제3장 : 경상도의 재팬타운, 삼포
1426년 삼포제도가 정비되면서, 조선에 오는 모든 왜인들은 한반도 동남해안의 세 포구(염포, 부산포, 제포)에 입항했다. 각종 명목으로 조선에 왔던 일본인들은 삼포에서 무역을 하면서, 우두머리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조선국왕을 알현했고,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삼포에 살게 되었다. 1471년 신숙주가 편찬한 『해동제국기』에는 삼포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삼포 왜인들의 생활상을 기록했다. 가히 조선시대의 ‘저팬 타운’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들 삼포 왜인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왜인의 입항과 무역, 상경로와 방법, 절차와 접대, 서울에 묶었던 여관인 동평관, 서울고지도에 남아 있는 왜관동의 유래, 체류 기간 동안의 생활, 국왕의 알현 등을 소개했다. 또한 온천을 즐기는 등 삼포 체류 왜인의 일상생활과 살았던 집, 이들과 거래한 무역품 등을 각종 사료와 사진, 고지도를 통해 설명한다.
제4장 임진왜란, 불구대천의 원수
1592년, 조선통신사와 삼포에 의한 200년간의 우호교린이 임진왜란에 의해 깨진다. 임진왜란의 원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에게 돌리지만, 사실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인 책봉 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무로마치 막부의 외교 노선을 계승하지 않고 배신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조선통신사를 조공사로 취급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 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과거의 상경로를 통해 20일 만인 5월 2일, 한양에 입성했고, 6월 16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프로이스의 일기』에는 그의 침략 의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의 승리도 개전 초기 2달간이었고, 이후 7년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의병과 민중의 저항, 이순신 장군의 활약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에 29개나 되는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지만, 히데요시는 죽고,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그의 아들 히데요리는 전쟁 후, 히데요시가 쌓은 오사카 성 정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인에게 지울 수 없는 전쟁의 상흔을 남겼다. 전쟁 중에 당한 여인들의 수난을 그린 『삼강행실도』와 양국의 각종 기록들은 지금도 그 참혹함에 치를 떨게 한다. 또 조선인의 코로 만든 코무덤 등, 이후 조선 사람은 일본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7년간의 전쟁을 통해, 조선 문화가 일본에 전달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도공들이 빚은 도자기는 일본 국보가 되었고, 고려불화나 조선종, 많은 서적들이 지금도 일본 문화재로 전해진다.
제5장 : 통신사의 부활, 평화의 시대
임진왜란 후,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새로 성립하고, 중국은 명·청 세력이 교체하는 시기였다. 조선과 일본 양국 모두가 전쟁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드디어 1607년 강화사에 의해 국교가 재개되지만, 조선에서는 이 강화사를 ‘통신사’라 하지 않고, ‘회답겸쇄환사’라고 했다. 아직 일본과 믿음을 통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왜냐하면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의 ‘국서’를 위조했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가 부활되는 것은 1636년부터이며, 이후 200년간의 평화의 시대가 전개된다.
조선통신사가 부활되면서 이후 9회에 걸쳐 조선통신사의 파견이 정례화된다. 조선후기 200년간, 우호교린의 상징으로 부를 만하다. 통신사의 규모는 평균 400명에 이르고, 장군의 습직을 축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들은 한양에서 출발해, 부산까지는 육로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 후쿠오카를 거쳐 일본 내해인 세토 내해를 통과해 오사카에 상륙한다. 이후 육로로 장군이 있던 도쿄까지 가서, 장군을 알현하고 국서를 교환한 뒤, 갔던 길을 되돌아온다. 대개 1년 반의 일정이었다. 조선통신사에 관해서는 수많은 기행문과 그림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했고, 어디에서 잤으며,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떻게 이동했는지, 심지어는 무엇을 먹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까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중도에서 일본 지식인이나 민중들과의 만남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평균 30년에 한 번씩 일본을 방문하는 조선통신사 행렬은 일본인들을 매료시켰다. 저자는 통신사 행렬에 얼이 빠져 있는 일본인의 모습에서 ‘조선시대의 한류’를 연상해 본다.
제6장 : 통신에서 배신으로, 침략의 전주곡
조선후기 200년간이나 지속된 평화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요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1811년 이후는 막부 장군이 연이어 습직해도 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서세동점과 일본 내부의 조선멸시론과 조선침략론(정한론)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868년 메이지유신이 일어나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그런데 메이지정부는 그때까지 히데요시가 그랬던 것처럼, 도쿠가와 막부의 조선에 대한 외교 정책을 계승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과의 관계에서 대등한 외교 의례를 깨고, 일본을 한 단계 위에 위치시켰다. 그러고는 메이지유신을 알리는 서계 거부 사건이 일어난다.
한편 조선은 메이지정부에 일본의 정권이 바뀐 것은 일본 국내 사정이므로, 서계 형식을 대등하게 고쳐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의 요구를 무시한 채, 1872년 부산에 있던 왜관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이것은 조선 후기 200년간 통신사로 상징되는 우호교린을 배신한 행위였다. 조선 전기 200년간의 통신이 히데요시의 배신에 의해 깨진 것처럼, 조선 후기 200년간의 통신이 메이지정부의 배신에 의해 깨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