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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 2008년 03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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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무게, 크기 | 85분 | 200g |
연령제한 | 15세 이용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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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슈마커 연출 <폰 부스>라는 제목의 짧은 스릴러가 2002년에 공개된 적 있는데 이 작품이 정작 주목받은 건 얼마 후 영화의 상황과 매우 닮은, 어느 스나이퍼의 연쇄 살인 사건이 전 미국을 뒤흔들고 나서였다. 이 사람이 해당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수사 당국도 인과 관계를 부정했기 때문에, 세간에선 감독의 빼어난 예지력을 칭찬하기도 했다. 사회를 진정성 있게 체험하고 예리한 감각을 키웠기에 '이런 일도 조만간 한번 터지려니' 하는 영감 어린 기획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게 당시 미국 평단의 반응이었음.
그런 관점에서라면, 지금 소개하려는 이 영화를 연출한 마이클 저지에 대해서는 예언자를 넘어 토인비, 앨빈 토플러 급의 혜안을 가진 문명사가라는 영예를 베풀어 줘도 지나치지 않겠다. 영화가 만들어진 건 2006년인데, 지금이 정확히 10년 후이니 소름끼칠 만큼 수비(數秘)적으로 미래를 내다본 셈이다(물론 농담). 프로레슬링 챔피언이 그저 대중들 사이에 누리는 인기만을 바탕으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며, 모든 시스템은 그저 자동 매뉴얼에만 운영을 맡겨 놓은 터라, 문제라도 혹 발생하면 이제는 전부가 백치가 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아무도 교정할 사람이 없이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
남 이야기도 아니고 먼 미래도 아니며 바로 지금 표피적인 현상만 접하며 오늘과 내일의 감성적 반응이 180도로 바뀌곤 하는 어리석은 대중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풍자했으며(진심 남 얘기 아님. 영화 속 시대, 공간의 평균적 인간을 정확히 반영하는 어느 멍청한 놈을 내가 알고 있음), 영화 속에 비친 '권력자의 변덕과 과장되고 저속한 제스처'에 열광하는, '그저 골빈 소비자이기만 한 유권자'의 모습은 바로 지금 어느 후보를 뽑은 어떤 나라의 풍경과 다를 바 하나도 없다. 정치적 함의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코미디를 따라 생각없이 웃을 수 있는 재미를 제공하지만, 이 영화를 지금 보는 감흥은 이미 관람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시사점이 전과는 판이하게 다가올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물론, 한국에서 이걸 본 사람도 얼마 안 될 것).
도널드 트럼프가 1년 반 전쯤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쟁쟁한 공화당 후보들에게 당연히 나가떨어질 것이라고들 예측했을 뿐 본선 진출 가능성을 심각하게 내다본 매체는 전무했다. CNN은 개표 개시 네 시간 전까지만 해도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전망이 90%'에 육박'한다고 했다. CNN은 심지어 개표 한 시간 전만 해도, '변화를 최우선으로 바란다는 유권자가 30%대에 지나지 않고, 적절한 경험, 건전한 판단력이 후보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으로 꼽은 유권자가 40%이 넘으며, 정부의 개표 시스템을 믿을 수 없다(트럼프의 주장)고 한 유권자가 15%도 안 된다'는 조사 결과들을 토대로, 힐러리 클린턴의 안전 입성 예측(projection)을 방송에 줄곧 내보내고 있었다.
개표가 본격 진행되고 출구조사 결과가 집계되어 CNN 상황실에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애널리스트이자 전직 앵커 존 킹의 독무대가 열린다. 이 사람은 미국 각지의 투표 성향을 카운티 단위까지 훤히 꿰는 독보적 전문성을 자랑하는데(물론 훌륭한 다른 스탭들의 도움을 받겠으나 방송에서 최종의 공은 '전달자'에게 있음), 벌써 플로리다 주의 대세가 10시 40분(한국 시각 기준)쯤 트럼프쪽으로 기울었음을 'Trust me'란 표현을 연발하며 암시하고 있었다. 민주당 강세 지역은 이미 개표가 끝나가는 반면, 공화당 텃밭은 개봉할 박스가 한참 남았는데도 표 차이가 저거밖에 안 되니 무슨 수로 힐러리가 우위를 유지하겠냐는 뉘앙스였다. 이때쯤이면 한국의 언론들은 '플로리다에서 힐러리 앞서감'을 보도하며 열심히 뒷북을 치고 있을 시점이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열심히 뿜어댄 선입견에 사로잡힌 시청자들에게 '현실'이 눈 앞에 들어올 리 없다. '젠장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건데?' 이 부분에선 시원하게 그런 니즈를 긁어 주는 NBC 등이 훨 앞서가던데(개표 예측도 대강 10분 정도는 빨랐음. CNN에서 백중세를 보도할 때 여긴 탁 짤라서 버지니아가 클린턴에게 넘어간다고 하고 실제로 그렇게 됨. 그래서 한 시간 뒤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가 트럼프 거라고 했을 때도 꼼짝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음), 애널리스트(이름 까먹음)가 저 존 킹(똑똑하고 잘생기긴 했으나 좀 답답함)처럼 길게 디테일 논거를 들지 않고 결론만 팍! 지르는 게, '네바다, 아이오와, 위스콘신, 이 세 주 중 한 곳만 먹으면 트럼프가 다음 대통령입니다!'라고 선언한 게 오후 1시(모두 한국 시각 기준), 아 이제 상황 종료구나 한국인도 미국인 시청자도 모두 방송 끄고 딴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도운 효과적 멘트였다.
NC는 경합주였으나 개표 초기 트럼프가 앞서가다가 클린턴이 역전, 큰 표 차로 리드했었고, 버지니아는 클린턴에 선거 기간 내내 기울었는데 개표 전반에는 내내 트럼프가 우월한 상황이었다. 버지니아를 내줘도 NC를 가져오면 클린턴이 이득인데, 정작 텃밭인 미시건 등이 트럼프에 넘어가는 통(이 보도가 나가던 중 힐러리가 자기 페이스북에 올린 멘트를 보면 그때 이미 비관적으로 돌아선 듯- '오늘 밤[현지 시각 기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우리 팀[선거 캠프]은 최고였다')이었고, popular vote의 합으로 승자를 결정하지 않는 간선제인 미국 시스템에서 큰 의미는 없다지만 초반 트럼프의 득표수가 지역 불문하고 고루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어서(약세 지역으로 꼽힌 곳들에서도 꽤 선전함) 조짐이 심상찮긴 했다.
지난 7월쯤 미국에서 잠시 들어온 지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그간 투표에 냉담하던 백인층의 지지 열기가 어마어마하며, 이 때문에 트럼프를 사람 취급도 안 하던 공화당 주류층도 가서 줄 서기 바쁘다'였다. 이건 선거 결과의 향방을 좌우하는 큰 대세 변화의 징후 중 하나인데, 기존의 패러다임에 꽉 사로잡혀 있는 눈에는 다 미미한, 무시해도 좋은 교란 팩터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비슷한 게, 지난 6월에 내가 만난 지인 중 한 명은 더불어민주당 당직자인데, 이 친구 말이 정장선씨가 총선 딱 3일 전 뭔지 확신을 가진 밝은 표정이더라는 것. 반면 새누리당은 선거 10일 전 역시 자체 보고를 받고 지도부의 낙관적 분위기가 싹 바뀌었는데 다만 방송이건 뭐건 워낙 새누리의 압승을 여전히 점치던 터라 결국 별 조치 없이 넘어갔다는 전언을 들었다. 선거 캠프는 언제나 '결과 추산 내부 모형'을 자체 개발해 돌리는데, 건성으로 알바 고용해서 운영하는 여론조사기관과는 달리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열성이 반영되므로 정확한 결과가 나올 때가 있다. 저런 걸 internal model이라고 하는데, 다만 이번 미국 대선에선 양 진영 모두 잘 들어맞진 않았는지 트럼프 캠프에선 하루 전 보고를 받고선 'tough night'을 예상했다고도 보도가 나왔다(CNN). 세상 일은 이처럼 정보가 가장 중요한 법이며, 바른 정보를 위해서는 똑똑하고 힘 있으며 돈되는 인맥을 가져야만 한다.
이번 선거전을 요약하는 한 마디 태그라인이 하루 전쯤 화제였는데(그때만 해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evil과 idiot의 싸움'이 그것. 힐러리는 우리 한국인들만 잘 모른다뿐 미국 주류층에게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편협하고 완고하며 교활한 인물로 이미지가 굳은 형편이었으며, 이걸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게 이번 결과에 크게 한몫했을 거라 본다. 트럼프가 철판을 깔고 그녀를 향해 crooked니 nasty니 외마디 구호 평가만 계속 밀었던 것도 나름 영리한 계산의 전략적 행동이었다.
만약 조 바이든이 처음부터 민주당 후보로 나왔으면, 트럼프를 여튼 제압하지 않았을까? 힐러리는 사실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도 끌어들이지 못했으며(전통적 민주당 지지 지역에서도 저조한 득표가 이를 반영), 며칠 전 백인 경찰관이 흑인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젭 부시가 올해 초 '누군가는 힐러리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 '명분'을 정작 자신은 화끈하게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많이 배운 명문가 출신은 결코 맨정신으로 못할 짓), 이 광대 역을 기다렸다는 듯 트럼프가 훌륭히(!) 수행한 것. 'Lock Her Up'은 트럼프 개인의 모토가 아니라 공화당 진영 전체의 숙원이었던 셈. '힐러리를 막아줄 그 누구라도 우리는 지지하겠다.' 한국인 다수의 정서와는 정확한 대척점을 이루는 이런 숨은 합의가 결국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른 셈이다.
하나만 더 들자면, 미국 젊은 층이 8년 전, 4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민주당을 열정적으로 찍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유력 후보 힐러리를 8년 전 정치신인이었던 오바마가 누르고 선출된 건 변화에의 열망이 크게 작용해서였는데, 역설적이지만 이번 대선까지도 '변화가 아닌 기득권 이미지'가 그때 씌워진 이래 그녀가 끝내 극복을 못했다는 뜻도 된다. 지금 언론에선 '포퓰리즘'이라는 키워드 하나로만 설명을 하려나 본데, 난 개인적으로 그런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세련되지도 못한 어프로치에는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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