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위대한 폴리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잘못 번역하기 일쑤인 논평 하나를 남겼는데 그가 정말 말하고자 했던 의미는 “인간은 폴리스에 사는 생물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폴리스가 무엇이며 그리스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 없이는 그리스의 역사, 그리스의 정신, 그리스인의 성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폴리스를 우리는 흔히 ‘도시국가’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폴리스는 도시와 별로 비슷하지 않았고, 국가와는 정말 닮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그리스인이 폴리스라고 부르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맞아떨어지는 번역어가 없다.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 도시국가라는 용어 대신 폴리스라는 그리스어를 쓰는 것이 낫다.
너무나 불안정했던 그 시기에 산골짜기나 섬의 주민들은 자기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만 했고, 지역마다 방어 거점이 꼭 필요했다. 그것은 대개 평야 가운데서도 수비하기 좋은 언덕이었을 것이다. 이곳이 ‘아크로폴리스’였으며, 요새화되어 왕이 거주했다. 이곳은 또 자연스럽게 민회 장소가 되었고, 종교 중심지가 된다.
폴리스는 당초에는 훗날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는 것, 즉 공동체 전체의 요새이며 공공생활의 중심을 의미했다.
폴리스는 저자가 소개한 많은 저작들의 인용에서 보여지듯이 국가나 인민 등의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지는데, 그렇다면 과연 폴리스는 사회적으로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매우 공동체적인 사회조직으로써 혈연적이고 군사적이며 이념적이고도 문화적인 공동체였다. 덧붙여 일반적으로 폴리스는 배타적이고 자급자족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전기 그리스 : 초기
저자는 고전기 초기시대에 이오니아, 스파르타, 아테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스파르타는 에우로타스강을 끼고 라코니야 평야에 위치한 폴리스로, 산악지형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이며,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자급자족하는 사회였다. 스파르타의 사회계층은 크게 세 가지인데, 스파르티아테스, 페리오이코이(이웃 사람들), 헤일로타이가 바로 그것이다.
스파르타의 정치기구는 독재정의 저지를 위해 두 명의 왕을 두었고, 국내에서는 두 왕은 에포로이(감독관), 즉 대체로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5명의 임기 1년의 정무관에 의해 견제되었다. 국외에 있어서는, 스파르타의 군대는 항상 왕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지휘되며, 이때의 왕은 절대권을 행사하였다. 원로원도 존재했고, 모든 스파르타인의 민회도 존재했다. 그러나 민회는 토론을 할 수 없었다.
아테네인은 아티카라는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초기에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테네가 강성하게 된 것은 훨씬 뒤에 아티카의 12개의 소도시가 정치적 통합을 이룩한 후의 일이다. 결국, 약 900년에서 600년 경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그리스 민족의 공인된 지도자가 되었을 때, 아테네는 2류 내지 3류의 세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솔론인데, 그가 단행한 개혁은 과연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채무로 인한 노예화를 금지했고, 부채를 경감시켰고, 토지소유를 제한했고, 채무로 인해 상실된 토지를 회복시켰으며, 해외로 팔려나간 이들을 아티카로 되돌아오게 했다. 또한, 그는 모든 시민들은 민회에 참석할 자격을 부여했다.
솔론의 개혁 이후 정치적 불만은 다시 고조되었고,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참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귀족들의 정치권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귀족을 추방, 토지소유를 제한했고, 빈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했으며, 금광개간을 통해 화폐를 적극적으로 유통시키는 한편, 상인집단을 보호하여 정치적 제휴세력으로 삼았다. 또한, 폴리스 사회성격을 농민, 상인 중심의 사회제도로 전환하고자 하였으며, 국가적 결합을 위해 일련의 문화행사, 즉 올림포스, 디오니소스 등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참주정치는 3대가 계속된 예가 없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2대로 끝나게 되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클라이스테네스이다. 그는 시민단의 혈연적 성격을 사회적으로 전환하고자 데모스를 구성하였다. 그는 아티카를 도시, 내륙, 해안의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였고, 친부족은 이 세 개의 지역에 각각의 데모스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각 부족은 전인구의 교우적 구분이었으며, 부족이 부족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모일 때 그 자연스러운 집회장소는 아테네였다. 이것은 그 자체가 폴리스를 결속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그는 시민단을 개편하고 500인회를 창설하여 실질적인 행정기능을 담당케 하였고 민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고전기 그리스 : 기원전 5세기
앞서 살펴보았던 클라이스테네스의 개혁에 일조를 한 사건이 490년에 발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페르시아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폴리스 간의 델로스 동맹이 이루어졌고, 결국은 전쟁에서 승리, 전리품을 아테네가 독점함으로써 아테네가 폴리스에서 제국체제로 변모하게 된다. 또한, 이 전쟁의 결과로 전쟁에서 군함의 성원으로 활약했던 무산시민의 정치적 발언권이 커졌고, 성인남자시민으로 구성된 민회가 국정최고기관이 되었다.
아테네가 제국의 면모를 갖춰갈 때, 페리클레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461년부터 그가 사망한 429년까지 민회를 확고하게 지배한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와 협정을 체결하여 아테네를 그리스에서 무적의 위치로 만들려 했다. 그는 제국을 확대하여 군사?사법적으로 다른 폴리스를 예속, 제국이 거두어들인 소득을 민중에게 균등 분배하였고, 시민단을 확대?민회를 개편하여 민회가 관리 선출, 예산집행 등을 총괄하게 하였다. 또한 사법체계의 확립, 즉 배심원제도를 확립하고, 군사지휘관을 제외한 모든 행정직의 임기를 1년으로 하여 매년 행정직을 교체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와 전쟁
그리스 세계는 페르시아전쟁 이후 분할되었다. 한쪽은 제국으로 변모한 아테네이고, 다른 쪽은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및 스파르타에 동조하는 약간의 국가들이다. 전자는 해군이 강했으며 이오니아인이었고 후자는 육군이 강했으며 도리아인이었다. 아테네는 민주적 제도를 좋아했으며 동맹국에게 그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다른 그룹은 과두정치, 혹은 기껏해야 제한된 민주정치를 좋아했다.
이 전쟁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의 역사에서 전환점이었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27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짧은 휴지기를 제외하면, 싸움은 그리스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계속되었다.
긴 전쟁 과정 속에서도 폴리스의 삶은 계속되었다. 중요한 사안들은 모두민회에 모인 인민에 의해 결정되었다. 모든 시민으로 구성된 이 민회가 장군들을 투표로 선출했고, 제2, 제3 제4의 전선을 확장했고, 평화 조약을 논의했고, 전선에서 온 보고서들을 검토했다. 정치 생활만 지속된 것이 아니라 지적, 예술적 삶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 동안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토론하고, 주장하고, 비판했다.
폴리스의 몰락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사실상 도시국가의 종말을 의미했다.
스파르타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폭력 때문에 다른 도시들이 연합을 맺어코린트스 전쟁을 일으켰다. 기원전 387년에 ‘페르시아 왕의 칙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형태로 평화는 회복되었으며, 그리스 도시는 다시 한 번 자율성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주도적인 도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테베 삼국이었으며, 이들은 연합하려 하고 있었다. 371년에 그리스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사건이 발생하였다. 테베군이 레욱트라에서 스파르타군을 격파한 것이다. 그리스는 이러한 북방에서 일어난 뜻하지 않은 위협으로 이 잠시 동안의 정의를 누리지 못했다.
결국 마케도니아의 부상으로 필립포스 2세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 그리스를 정복하고, 알렉산더 3세가 마케도니아 대제국을 건설하게 됨으로써 폴리스를 주축으로 하는 그리스 세계는 붕괴되었다.
그리스인의 생활
지금까지 그리스 세계가 형성되어 도시국가의 사실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그리스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이러한 그리스 세계에 살던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을까.
사물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감각이야말로 그리스 정신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다. 호메로스가 구체적인 세부사항과 개인들의 성격을 너무나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편적인 틀 속에 확실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많은 그리스인이 동시에 여러 가지 업무를 담당하는 생활태도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그것은 폴리스 자체가 통치하는 기구가 아니라 삶의 거의 전체와 관계 맺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의 정신은 여러 가지 부문으로 분화되고 전문화되고, 분류적으로 사고를 하지만, 그리스인의 본능은 넓은 시야를 가지며 사물을 유기적 전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 세계는 지금과 비교하자면 매우 소집단의 사회였고, 현재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방면에서 팽창·확대된 대집단의 사회이다. 우리들의 경제력도, 정치력도, 군사력 등도… 이렇듯 외관상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그때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의 성장을 거두었다.
작은 폴리스에서 나오는 위대한 힘! 거대한 제국에 흡수되지 않고, 정신적 성장이 억눌리지도 않은 원동력은 무엇일까. 폴리스는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한 구성원이 동료 시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들은 폴리스의 기원이 정의를 실현하려는 소망에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폴리스의 다른 구성원이 자신에게 해를 입혔다고 생각하면 그는 자신이 당한 부당한 일을 전체 폴리스에 대고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이곳에서는 공공 정의가 사적 복수를 압도했다. 무능한 지휘관은 분노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바로 고소당하고 엄벌을 받았다. 폴리스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결코 폴리스가 아니다. 그리스인은 폴리스가 정의의 본보기, 질서의 본보기, 그리스인이 코스모스라고 부르던 것의 본보기로 대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들의 광장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던 가장 인간미 넘치고, 자유와 여유로움을 만끽하던 2세기 반 동안에 아테네는 정치인으로는 솔론, 페이시스트라토스, 테미스토클레스, 아리스테이데스, 페리클레스를, 극작가로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메난드로스를, 가장 인상적인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가장 안상적인 연설가 데모스테네스를, 아크로폴리스의 건설자 므네시클레스와 이크티노스를, 조각가 페이디아스와 프락시텔레스, 최고의 해군 제독 포르미온을,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의 인물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