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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유진이 너는 ……이 세상에서 살아서는 안될 놈이야. (171쪽)
나를 향해 누군가가 저 말을 뱉는다면 그와 나의 관계는 어떻다는 말인가. 원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있는 말일까. 인간의 존엄성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존재 가치를 뭉개는 저 발언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임계치를 넘기고도 남을 분노가 솟지 않을까. 하물며 엄마가 나를 향해 쏟아낸 말이라면.
정유정이 올해(2016) 내놓은 신작소설은 띠지에 걸린 메모처럼 나 역시 '손꼽아 기다려온 소설'이었다. 여름만 되면 정유정 작가의 대표작 [7년의 밤]이 떠오른다. [7년의 밤]을 읽은 독자라면, 책을 읽으며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가 누구인지 한번 더 이름을 확인했을 것이고 다음 작품을 고대하였을 것이다. 소설로 공포물 중 단연 으뜸으로 꼽는 책이다. 뒤이어 나온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역시 스릴러물. [28]은 서사의 변주보다 등장인물을 심리를 냉정한 시선으로 뾰족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나왔다. 제목이 주는 무게가 진화 생물학의 전문학술서만큼 무겁다. 제목이 [종의 기원]이다.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381쪽)
정유정 작가는 '악의 근원'에 천착한 것 같다. 그의 전작들에서 등장한 악인의 형태들의 공통점은 객체였다는 것, 그래서 [종의 기원]에서는 악을 주체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고 [종의 기원]의 주인공 유진을 잔학무도한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찔끔찔끔 유진의 본성을 꺼내 보인다. 묘사한다. 침착하고 집중력 강한 내성적인 남자 유진은 우리 기준에선 '평범한 청년'일 뿐이다. 평범성에서 악의 폭발성을 보일 때는 분노의 역치를 넘어섰을 때이다. 유진은 어릴 때부터 억눌러온 화기를 스물 여섯살이 되어서야 점화한다.
[종의 기원]은 아무래도 스테디셀러인 [7년의 밤]과 비교당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게 정유정은 [7년의 밤]의 작가다. 강렬했던 서사만큼 기대치는 점점 올라갔고 그래서 [종의 기원]을 기다렸다. [7년의 밤]과 상대적인 비교를 하며 내 나름의 감상을 적을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서사성은 약하다. 이틀 동안 펼쳐진 일을, 회상과 기억을 통해 16년 간의 세월을 넘나들긴 하지만, 결국 짧은 시간의 사건을 한 권치의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은 작가가 인물의 심리묘사에 주력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유진이 약을 통해 눌러온 악을, (복용해온) 약을 끊음으로써 세상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고 억지로 구겨넣었던 본성의 기지개를 가차없이 뻗는다.
불길 같은 흥분이 신경절을 타고 온몸으로 내달렸다. 숨이 차올랐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현기증이 났다. 내가 칼을 쥔 게 아니라 칼이 내 손을 거머쥐고 여자 안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저항이 용납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장력이었다. 눈앞이 와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칼을 쥔 손이 저릿저릿해왔다. 음속을 돌파하는 듯한 충격이 몸을 덮쳐왔다. 머릿속 어디가에선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실낱같이 열려 있던 이쪽 세상과의 통로가 닫히는 소리였다. 나는 내가 다른 세상의 국경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도, 돌아갈 의지가 없다는 것도.
이런 순간을 상상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나를 제어할 자신도 있었다. 정말로 이런 순간이 오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도 머리도, 오로지 교감 신경의 지시에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너무도 쉽고 빠르게 상상의 경계를 넘어버렸다.
세상이 사라졌다. 위장에서 요동치던 불길이 성욕처럼 아랫배로 방사됐다. 발화의 순간이었다. 감각의 대역폭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마법의 순간이었다. 내 안의 눈으로 여자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전지의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전능의 순간이었다.(203쪽)
유진이 잠자고 있던 악을 깨우는 모습을 묘사한 문단이다. 차근하게 이 문장들을 내 몸으로 장착시켰다. 내 안이 꿈틀거렸다. 정유정 작가는 '사이코패스'에서 제재를 찾은 것 같다. 유진이 평범성에서 무너져 가는 장면을 철저히 유진의 입장으로 문학적인 묘사를 갈겨댔다. 마치 내가 유진으로 빙의해서 면도칼을 손안에 감추고 번득이는 야수의 눈으로 먹잇감을 찾아, 훅 불어온 피비린내를 향해 발빠른 발걸음을 옮기는 것 같았다.
하나에 집중하고, 파헤쳐가는 작가의 끈질김에, 박수를 보낸다. 발표될때마다 주목받는 전작들은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작가로서의 삶은, 평탄할 것이라는, 독자들이 도리어 안도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작가에게 찬탄과 기대를 보냈지만 정작 정유정 작가는 만족하지 않은 것 같다. 숙제를 못한 것처럼, 마음의 짐을 안고 있는 것처럼, 작가는 결코 평안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결국, 대중의 눈보단, 작가의 개인의 과제 수행에 더 가까운 작품을 써나간 게 아닐까. 그것이 진화생물학 또는 진화심리학으로 분류해도 될 거창한 제목을 달고 [종의 기원]은 탄생했다. 대중성의 무게보다 문학성의 무게를 더해주는 작품이라고 감히 평가 한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유진의 악성을 약으로, 보호자라는 권력으로 누르고 있었지만, 유진의 비이성적인 악행은 운명처럼, 제 일처럼, 벌어졌다. 유진은 그것을 마치 드디어 제 삶에 주인된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유진을 제외한 눈들은, 주인된 삶의 결정권을 주어선 안되는 인물로 보일 뿐이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100명 1명꼴이지만 유소년기, 청소년기에 외부적 환경에 별문제가 없다면 이런 기질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학대나 범죄 환경에 노출된다면 유전적 기질이 화학작용해서 드러날 우려는 크다. 확률수치를 보고 우선 놀랐다. 생각보다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많다는 것, 퍼뜩 드는 생각이, 나도 혹시 이 수치 안에 포함되진 않았을까, 하는.(ㅋㅋ) 다행히 폭력, 범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큰 사람이라서 내가 사이코패스의 유전성을 가질 확률은 낮아보인다.(짐짓 심각했음) 이런 류의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1도씩 어두워지는 건 사실이다. 경계심이 는다. 여름엔 역시 정유정인 이유다.
세상에는 외면하거나 거부해봐야 소용없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 일이 그렇고, 누군가의 자식이 된 일이 그러하며,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추측항법으로 날아가는 제트기는 되고 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마지막 주권 정도는 되찾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 상황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내 삶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171쪽)
불길 같은 흥분이 신경절을 타고 온몸으로 내달렸다. 숨이 차올랐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현기증이 났다. 내가 칼을 쥔 게 아니라 칼이 내 손을 거머쥐고 여자 안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저항이 용납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장력이었다. 눈앞이 와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칼을 쥔 손이 저릿저릿해왔다. 음속을 돌파하는 듯한 충격이 몸을 덮쳐왔다. 머릿속 어디가에선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실낱같이 열려 있던 이쪽 세상과의 통로가 닫히는 소리였다. 나는 내가 다른 세상의 국경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도, 돌아갈 의지가 없다는 것도.
이런 순간을 상상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나를 제어할 자신도 있었다. 정말로 이런 순간이 오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도 머리도, 오로지 교감 신경의 지시에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너무도 쉽고 빠르게 상상의 경계를 넘어버렸다.
세상이 사라졌다. 위장에서 요동치던 불길이 성욕처럼 아랫배로 방사됐다. 발화의 순간이었다. 감각의 대역폭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마법의 순간이었다. 내 안의 눈으로 여자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전지의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전능의 순간이었다.(203쪽)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206쪽)
약을 끊으면, 본래의 내 몸 상태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익히 아는 바였다. 본질적인 상태에서 남과 다른 어떤 부분이 내 특성, 혹은 본성일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면, 그리하여 삶에 특정한 영향을 끼친다면, 영향력이 커져서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면..... 문젯거리가 되겠지. 이모가 약을 쓴 건 그 때문이었을까. (243쪽)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283쪽)
벤치그네는 비어 있었다. 어머니는 완전히 떠나버린 듯했다. 나타났던 이유도, 떠난 이유도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탯줄을 잘라버린 기분이었다. 불가침의 국경을 넘어선 부랑자가 된 것 같았다.국경 너머에 두고 온 건 아마도 나 일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온 나, 지상에 단단하게 발을 붙이고 있다고 믿었던 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나면 돌아갈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뿌옇게 흐린 저 겨울 대기 속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 말고는.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른 2시간 30분이 감쪽같이 기억에서 지워졌던 이유가 뭔지. 기억해내는 순간, 나고 자란 세상을 떠나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의 삶을 끝내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떠날 준비도 끝낼 준비도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준비없이 저지른 일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할 길이 망각밖에 더 있을까.(292~293쪽)
정유정 작가의 작품을 이야기하려면 <7년의 밤>을 건너 뛰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11년에 이 소설이 출간된 이후에 독자들에게 그리 많이 읽힌 것은 책을 손에 잡는 순간에 도저히 중간에 읽기를 멈출 수 없는 강한 흡인력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7년의 밤>에 대한 '박범신' 작가의 추천의 글처럼
" 뒤돌아 보지 않는 힘있는 문장과 압도적인 서사, 그리고 정교한 취재를 기반으로 한 생생한 리얼리티" (<7년의 밤> 뒷표지 글 중에서)라는 글이 정유정 작가의 모든 소설을 말해주는 듯하다.
정유정의 소설인 <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3년의 구상과 집필로, <내 심장을 쏴라>는 작가 자신이 직접 폐쇄병동을 취재하고 체험하고 자료를 조사해서, <28>은 2년 3개월의 집필기간을 거쳐서...
그것도 모자라서 다 쓴 작품을 고스란히 백지화하고 또 다시 쓰기로도 한다.
그런 열정이 바로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정유정의 작품 중에서 처음 읽었던 <7년의 밤>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감상하는 듯, 글만으로도 생생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고, 글만으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도저히 여성 작가가 쓴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무섭고 섬뜩한 소설이다.
<7년의 밤>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악몽을 꾸면서 깨어나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는데 눈이 안 떠지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아니면, 등장인물의 행동이 괴기스럽고 무서워서 마음을 졸이면서도 그 끝이 궁금해서 도저히 영화 보기를 중단할 수 없는 스릴러 영화라고나 할까.
그래서 독자들은 정유정의 새로운 소설이 출간될 때마다 그 소설을 읽게 된다.
<7년의 밤>을 읽으면서 '인간은 어디까지 악마적인 근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종의 기원>도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게 되고, 악이 점점 커지는 과정을, 그리고 그 악이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가를, 악마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심리상태, 파괴된 청춘에 대한 애증과 연민.
그러나, 이 책을 덮는 순간에 깊은 생각에 빠지면서 드는 결론은 악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를 통해서 한유민과 한유진 형제가 첫 영성체를 받는 과정에서 유진이가 영성체에 받기 위해서 제단에 오르다가 쓰러져서 정신을 잃게 되는 것으로 악인의 출발을 예고한다.
유진은 온통 피범벅이 된 채로 피냄새에 잠에서 깨어난다. 그에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어머니의 목소리.
16년전에 아버지와 형을 잃고, 간질증세가 있어서 자신의 꿈인 수영선수의 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날....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유진은 지난밤 12시부터 오전 2시 30분까지의 2시간 30분의 기억이 사라졌다. 그 기억을 찾아야만 거실에 목이 베어져서 죽은 어머니의 죽음을 밝혀낼 수 있다.
우선, 유진은 어머니의 사체를 처리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집안 청소를 한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의 방에서 발견된 일기인지 메모인지 무언가를 기록한 노트를 발견하게 된다.
어젯밤의 이야기에서 16년 전의 이야기까지가 날짜 순으로 담겨 있는 노트, 기록된 내용을 읽으면서 유진은 그당시의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더듬어나간다.
어젯밤에 일어난 살인사건에서 출발하여 10살적의 기억까지를 되짚어보면서 유진이 왜 지금의 모습으로 변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유진의 입장에서 합리화해 나간다.
수영대회에서 간질 증세를 보인 후에 정신과 의사인 이모의 대응과 그에 따르는 엄마의 행동은 유진이 그가 하고 싶은 일을 접게 하고, 엄마와 이모의 말에 순응하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한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무탈하고 무해한 존재로 살 수 있도록. 사람 속에서 살되 사람과 어울려 살지 않도록'하는 그녀들의 언행.
자식의 인생을 죄지우지하는 엄마들의 언행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과연 그것이 자식을 위한 것이었을까?
겉으로는 말 잘 듣는 아들이지만 그 안에 내재된 인간의 본성은 차츰 악인으로 변해간다. 발작 증세가 일어나기 전에 느낄 수 있는 피비린내.
그 피비린내는 이 작품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심하게 악취를 풍긴다. 유진을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어머니가 입양한 해진이 형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것과 어머니와 해진의 친밀감도 한 몫을 한다.
유진이 악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는 정신적인 결함이나 이모와 어머니의 언행이 큰 몫을 하기에 책을 읽는 중간중간 유진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는 연민이 솟구치기도 하지만 그건 절대로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정유정은 '작가의 말'에서,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을 빌린다. ‘살인’은 인간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며,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고, 살인과 악, 나아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이 즉,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작가의 말 중에서 발췌)
사이코패스들의 살인사건을 접하면서 이웃 오빠, 아저씨같은 순수한듯한 그들의 모습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던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바로 사이코패스가 이렇게 탄생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악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생각을 말하는 작가의 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인간에게 악의 심연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밖으로 분출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행동이고, 그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덕과 교육, 윤리적인 행동이 무엇인지를 학습해 왔기에 이성에 의해서 올바른 인간이 될 수 있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유에서든 악인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사회를 떠들섞하게 했던 계모의 살인사건을 보면서 우린 어떤 생각을 했던가.
점입가경은 계모의 말, '나도 어릴 적에 계모한테 학대를 받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악은 악일 수 밖에 없다. 더 이상 미화되어서는 안된다.
" 유진이 너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면도칼을 움켜 쥔 손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숨결에선 쌕쌕 소리가 났다.
"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이야"
죽창을 날리는 듯한 말이었다. 나는 목을 꿰인 짐승처럼 바르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나를 향해 다가드는 어머니를 내려다봤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머릿속이 껌껌했다.
" 그때 끝냈어야 했어. "
어머니는 어느새 내 가슴 밑에 와 있었다. 날 선 도끼 같은 눈으로 나를 쪼갤듯이 노려봤다. 나는 뒷발질로 더듬어서 계단 한 칸을 올라갔다.
" 그때, 죽었어야 했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p. 78)
내 생에 이모의 영혼이 지금처럼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어떤 눈을 가진 영혼이기에, 일곱 살짜리가 그린 그림을 '모친 살해'의 암시로 읽을 수 있었는지. 어떤 입을 가진 영혼이기에 열 살짜리 조카에게 포식자라는 선고를 내릴 수 있었는지. 어떤 낯짝을 가진 영혼이기에 한 인간의 삶을 '치료'라는 명붐으로 조져놓을 수 있었는지. 어떤 심장을 가진 영혼이기에 '포식자'의 홈그라운드로 혈혈단신 쳐들어 올 수 있는지. (p.p. 263~264)
평범한 소년이 살인자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점점 교활해지고 지능화되어갈 악인의 모습이 소름끼친다.
이 책을 읽던 삼복의 한 밤중, 느닷없이 폭우가 내렸다. 하늘이 뻥 뚫린 듯 내리는 빗소리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이 소설을 도저히 더 읽어내려갈 수가 없었다.
세밀한 묘사와 치밀한 구성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감상하는 듯하다.
아무도 결백하지 않다.
이른바 '엽기적 살인마'는 최근에서야 급부상한 키워드는 아니다. 실은 사람이 사람을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하는 일은 수백년전, 혹은 수천년전에도 있어왔다. 다만 그것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게 된데에는 괴물같은 파괴력을 지닌 '인터넷'이라는, '정보 교환'의 '수단'이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놀이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있다. 매일매일, 매순간, 매초.. 업데이트 되는 다양한 '소식'들이 당신의 모니터 화면에, 혹은 스마트폰 액정에 떠오른다. 그 '소식'들 중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스캔들이 아마도 압도적인 비율로 많을 것이다. 그 스캔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문자화 되는 순간, 많은 이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소문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절차(조롱에 가까운 패러디)를 거쳐 소위 '신상털기'와 그것의 재빠르고 광범위한 '배급'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이것이 '스캔들'의 종착역이다. 누군가의 신상이 철저하게 털리고, 수많은 커뮤니티에 실어나르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그것으로 성공적인 마무리를 자축하고 그뒤에 따라붙은 '정정기사'나 '드러난 진실'에 대해서는 알은체하는 사람 조차 없다. 물론 뒤늦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로 압축되는 조금은 이성적인 반론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그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각설하고,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작가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맹점에 주목했다. 여기 '한 남자가 여자아이의 목을 비틀어 살해한 후, 호수에 던졌다' 라는 사실이 있다. 이 한 줄의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맨 처음 무슨 생각을 하게될까? 혹은 어떤 말을 내뱉게 될까? 적어도 "그 남자는 어쩌다가 그런 불행한 일과 맞닥뜨리게 되었을까?"는 아닐것이다. 또, '여자아이를 살해한 그 남자는 모두가 잠든 밤에 댐의 문을 열어 근처에 살고있는 주민 수십여명을 살해했다' 는 어떤가? 아마도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남자'라는 이를 정상인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미치광이 살인마'정도는 귀여운 수식어이고, 온갖 화려한 육두문자가 '그 남자'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뿐인가? '그 남자'의 아들, 아내, 가족들은 '살인마'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평생 지고 살아가야 할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우리 스스로 '살인자'가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살인자'가 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나 소설, 드라마에서는 늘 '피해자'의 입장이 우세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작가들은 '살인범'과 그들의 가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모방범'을 들수있다. '모방범'은 기존 추리소설의 방식을 뒤엎으며, 탄탄한 이야기 구성과 캐릭터에 대한 철저한 분석으로 독자에게 끊임없이 극적 긴장감과 재미를 안겨준다. 더불어 인간 존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혀준다.
정유정 소설 <7년의 밤>의 경우도 플롯은 '모방범'과 흡사하다. '범인이 과연 누구인가?' 혹은 '범인은 어떻게 소녀를 죽였는가?'에 이야기의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고, '그는 왜 살인자가 되어야 했는가?' 혹은 '그는 왜 댐을 열어 주민들을 수장시킬 수 밖에 없었는가?'에 그 방점이 찍힌다. 이처럼 누군가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일은 어쩌면 모든 예술가의 의무의자 권리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들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그 사실들을 만들어냈느냐에 집중하는 일. 작가는 현재와 과거, 그리고 더 과거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겉잡을 수 없이 파멸을 향해 치닫는 등장인물들을 치밀하게 묘사해낸다. 지루할사이없이 엄청난 속도로, 그러나 철저하게, 모든 진실들이 눈 앞에 펼처진다. 그리고 독자는 그 엄청난 진실들 사이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끔씩 책을 덮게될지도 모르겠다. 이 엄청난 압박감에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도대체 7년 전 그날 밤. 무엇이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는가? 정말로 무슨일 일어났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현수'의 아들 '서원'처럼 혹시 모를 어떤 가능성. 사실은 '내 아버지가 그렇게 잔인한 살인마는 아닐 것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라는 희망의 가닥을 잡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의 끝자락에서 결국 '어느 누구도 결백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뿐이다. 이 모든 진실을 그저 흘려보내지 못한 채, 아니면 그저 '이야기의 끝'을 보고자 중간에서 '이야기를 끝낼 수 없었던' 승환 조차도. 그리고, 이 소설을 쓴 작가, 이 소설을 단숨에 읽어내려간 나, 그리고 당신 조차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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